2020년 소방의 날(매년 11월 9일)은 여느 해와는 다르게 국민적 관심을 모았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해 4월 소방공무원의 신분이 국가직으로 전환된 일일 것이다. 관련 정책 논의부터 법률안 발의, 통과, 그리고 시행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일이다. 이 지난함에 비하면 여야 정치권과 국민 여론이 큰 이견 없이 찬동했던 드문 정책 사례였다. 정부 행정기관인 소방청은 그해 소방의 날 기념식을 알차게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는데, 그런 노력의 상징이 바로 기념식 포스터다. 기존의 국가 행사 포스터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 ‘살려서 돌아오라, 살아서 돌아오라’라는 캘리그래피 문구. 이 문구는 소설가 김훈의 것이다. 김훈은 기자 시절 소방관들의 현장을 밀착 취재한 르포 기사를 쓴 바 있고, 소방관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집필하기도 했다. ‘살려서 돌아오라, 살아서 돌아오라’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소방의 날 기념식 포스터에선 흡사 영화 타이틀 로고와도 같이 이 문장의 색채가 새로워져 있었다. 마치 배우가 새로운 배역을 받은 것처럼. 카피 한 줄에 서사 한 편을 담아야 한다면, 그 작업의 적격자는 디자이너일 것이다. 제58주년 소방의 날 기념식 포스터를 디자인한 이는 그래픽 디자이너 한중수다. 영화 포스터의 문법을 국가 행사 포스터에 적용한 전략 덕분인지, 포스터 한 장이 발화하는 서사의 힘이 상당했다. 모두가 재난으로부터 피신할 때 그 속으로 진입하는, 재난 속의 누군가를 기어이 구해내고야 마는,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누군가의 삶으로 출동하는, 그들이 살아온 진압과 구조의 삶, 그런 그들이 국가직 공무원이어야 할 절대적 당위성, ··· 이러한 플롯들이 포스터 한 장 안에 농축돼 있었던 것이다. 한중수에 대해서는 ‘레터링에 주력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나, 그 정도로만 알고 있기엔 못내 마음이 걸렸다. 2020년 소방의 날 기념식 포스터를 계기로 찾아본 그의 또 다른 ‘영화적/서사적’ 작업들 때문이다. 그래픽과 타입페이스로 서사를 연출하는 디자이너, 그래픽과 타입페이스를 주연 배우 삼아 한 편의 디자인을 감독하는 디자이너, 라는 것이 한중수에 대한 새로운 입장이었고 이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 소속 디자이너였다가 2020년 1월 ‘펀데이’를 오픈하셨지요. ‘빛나는’은 영화계뿐 아니라 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회사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직장인이라, 이런 하찮은(!) 질문을 먼저 드려보고 싶은데요. 디자이너로서 퍽 괜찮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독립을 결심한 사정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튜디오 ‘펀데이’를 운영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한중수입니다. ‘빛나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참 민망합니다. 사실 오래 근무하며 많은 일을 한 게 아니라서, 어디 가서 “나 ‘빛나는’ 출신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긴 쑥스럽습니다.
분명 원하고 좋아하는 영화 관련 일이었는데, 제가 꿈꿨던 직장 생활에 대한 그림과는 뭔가 갭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바보 같은 생각이었죠.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고, 일하기 편한 무릉도원 같은 회사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때는 참을성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네요.
그래도 짧은 시간 동안 실장님 어깨 너머로 많이 보고 배웠습니다. 지금 제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 밖의 많은 부분들이 ‘빛나는’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여전히 실장님한테 고맙고 죄송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독립을 결심했다기보다는, 학생 때부터 혼자 일하고 싶어했어요. ‘나만의 것을 해보자’라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오랫동안 했던 것 같아요. 점점 나이를 먹고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을 해보니, 타인들과 함께할 때보다 저 혼자 일할 때 더 능률적이란 걸 알게 됐어요. 나 스스로 재미있게 즐기면서, 그리고 편안하게 일을 하니 그만큼 결과도 만족스러웠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 경우엔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혼자일 때보다 여러 동료들과 협업을 통해 더 큰 성과를 내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회사를 나와서 한두 해 동안은 개인 프로젝트와 포트폴리오 위주로 작업을 하면서 나름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2020년 초에 스튜디오를 오픈했어요.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활동해도 좋지만, 기왕 시작하는 거 스튜디오 이름도 짓고 사업자등록도 내고 해볼까? 하면서 ‘스튜디오 펀데이’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사실, 제가 ‘그래픽 디자이너 한중수’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따로 있어요. 『한국의 올드카』(2018)라는 일러스트레이션북의 크라우드 펀딩이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민병섭, 그래픽 디자이너 김종범, 그리고 한중수, 이렇게 3인방이 공동 제작한 책이었지요. 당시에 제가 펀딩 페이지를 즐겨찾기만 해놓고 한동안 까먹고 있다가 후원을 못했었거든요. 지금도 못내 아쉽습니다.(웃음) 이미 타임라인이 3년이나 흘렀지만, 프로젝트 후기를 간단히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획 의도라든지, 작업 에피소드라든지, 무엇이든지요.
세상에··· 이 프로젝트를 기억해주시는 분이 계셨군요! 후원 실패로 아쉽게 종료됐던 프로젝트죠. 왜 후원 안 해주셨어요! 하하, 농담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담당한 민병섭, 책의 전반적 편집과 디자인을 맡았던 김종범과는 대학교 선후배 사이예요. 저는 프로젝트 말미에 참여해 『한국의 올드카』 레터링과 작은 굿즈 디자인을 담당했습니다.
『한국의 올드카』는 우리 기억에서 점차 잊혀가는 것들, 그중에서도 옛 자동차를 소개하고 들여다는 아트북이에요. 자동차는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갖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빠르게 발전한 기술과 누구보다 앞서서 미래를 준비하려던 우리의 열망 때문인지, 대한민국 올드카들은 외국의 올드카들만큼 보존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의 올드카들을 알리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민병섭, 김종범, 그리고 저 모두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는 처음이었거든요. 많이 헤맸습니다.(웃음) 홍보를 위해서 국내 자동차 회사에 연락을 해보기도 하고, 평소 올드카를 좋아하는 연예인들에게 무작정 인스타그램 DM을 보내보기도 하고. 하하. 지금도 저희 셋이 모이면 그때 이야기를 하는데요. “너무 아쉬웠던 프로젝트였다”, “다시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 지금은 세 명 다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아서 당장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다시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꼽는 ‘펀데이’ 최고작이 있는데요.(웃음) 스튜디오 인스타그램에서 본 작업입니다. 어느 예비 부부의 청첩장 디자인요. 영화 포스터 형식을 차용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객을 관객으로 만드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참 좋았습니다. 경제 활동의 산물도 아니고 커리어 제고를 위한 야심작도 아닌, 전적으로 ‘누군가의 특별한 하루(결혼식)를 디자인한’ 순수성 짙은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요.(웃음) 이 작업은 어떤 연유로 진행을 하게 된 건가요?
정말 순수했던 작업이었죠. 가장 아름다운 날로 기억될 하루를 디자인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항상 했었어요. 때마침 친하게 지냈던 학교 선배가 결혼을 한다기에 제가 청첩장을 만들어보겠다고 먼저 얘기를 꺼냈습니다.
이 예비부부가 가진 특별함이 있었거든요.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제 커플은 드물었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선 그 선배 커플이 유일했어요. 제가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또 그 덕에 영화 포스터 디자인 회사에서 일도 했었으니, 이 커플을 영화 주인공처럼 그려보고 싶었어요. 해외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두 사람의 스토리도 왠지 영화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마침맞게 또 예비 신랑이 해외에서 관광객들 대상으로 스냅 사진 찍어주는 일을 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배경도 덤으로 생겼죠. 사실 제가 한 건 타이틀 디자인과 조금의 합성밖에 없습니다. 하하.
국경일 경축 행사를 비롯한 여러 공공 행사의 타이틀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많이 진행하셨더라고요. 제73주년 제헌절(2021. 7. 17.) 경축식, 제58주년 소방의 날(2020. 11. 9.) 기념식, 제75주년 경찰의 날(2020. 10. 21.) 기념식, 제4352주년 개천절(2020. 10. 3.) 경축식, 제60주년 4·19 혁명(2020. 4. 19.) 기념식 등등.
‘펀데이’가 제작한 공공 행사들의 타이틀 레터링이나 포스터는 상당히 영화적입니다. 이를테면 2020년 소방의 날 포스터를 보면, 마치 소방관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가 떠올라요. 아무래도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근무했던 영향일까요? 행사를 그저 행사로 보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서사적 콘텐츠로 대하는 듯한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맞습니다. 국가 기념일은 말 그대로 어떤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날이잖아요. 당연히 깊은 서사가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영화처럼요. 이를 디자인 콘셉트로 잡아본 겁니다. 그동안의 국가 기념식 로고나 포스터 등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르게 구성해보고 싶었어요.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켜서 많은 분들에게 한눈에 각인되도록요. 그래서 영화적 표현 방식, 그러니까 글자와 이미지가 적절히 섞인 형태를 적극적으로 썼습니다.
에디터님이 언급하신 제58주년 소방의 날 포스터를 예로 들면, 소방관 분들은 하루하루가 재난이며 블록버스터일 거란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당연한 일상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소방관님들처럼요. 제가 포스터 작업을 진행했던 2020년에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이 이루어졌어요.
그해 소방의 날이 갖는 의미가 대단히 컸습니다. 이런 특별함을 디자인에 한껏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방관의 영웅적 측면을 부각하고, 영화적 표현을 가미해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타이틀 디자인에 꽤 신경을 썼어요. ‘소방관의 눈물겨운 희생을 표현하려면 감성적인 명조가 어울릴까? 아니야, 슈퍼히어로 같은 든든하고 강한 느낌을 주자. 그러려면 굉장히 볼드한 고딕 느낌으로 가야겠지?’ 혼자 막 이런저런 느낌으로 시안을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선별된 작업에 캘리그래피가 더해져서 최종 디자인이 완성된 것입니다.
넷플릭스 외화 콘텐츠들의 한글 타이틀 디자인 작업을 진행했던 걸로 압니다. 외국어 타이틀 디자인의 결을 고스란히 유지한 상태로 한글화를 하는 일인데, 아예 새로운 걸 만드는 것보다 더 난이도가 높을 듯합니다. 작업 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여태껏 한 번도 안 해봤던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제약 없이 다양한 실험을 했던 학생 시절에도 안 해본 방식이었어요. 원문 언어(문자)의 디자인 콘셉트를 살리면서 한글로 리디자인을 한다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어 타이틀 작업을 설명드리고 싶어요.
한글과 라틴 알파벳은 문자적으로 차이가 큽니다. 모아쓰기 문자인 한글은 박스 하나당 여러 자소들의 조합이 가능하지만, 라틴 알파벳은 하나의 박스에 한 글자만 들어가죠. 영어 타이틀 디자인이 굉장히 디테일한 텍스처로 구성돼 있다면, 이러한 디자인 요소를 한글로 재현하는 과정은 상당히 엄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글은 이미 초성·중성 혹은 초성·중성·종성으로 조합된 문자라서, ‘이미 구조적으로 글자 하나 이상이 모여 있는 상태’에서 또 하나의 디자인 요소를 추가해야 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경우에 따라 작업 난이도가 극악을 달리기도 했어요.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 만큼 정말 값진 걸 얻었습니다. ‘글자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이었어요. 이전에는 그저 글자의 디테일만 신경썼다면, 이 작업 이후에는 디테일에 앞서 전체적인 자형(字形)의 밸런스를 먼저 파악하고 맞춰가는 방식에 익숙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로우라이더스〉 타이틀 작업의 경우, 영어 타이틀인 〈LOWRIDERS〉의 원안대로 아예 순서와 포인트 위치까지 똑같이 한글화를 해버렸다면 밸런스가 뭉개져서 가독성이 심각하게 훼손됐을 거예요.
원안에서 첫 글자 ‘L’의 뾰쪽 솟은 삐침 획들의 형태가, 한글 타이틀에선 마지막 글자 ‘스’에 나타나는데요. 원안의 포인트 위치를 의도적으로 첫 자에서 끝 자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원안의 끝 글자 ‘S’의 포인트는 한글 타이틀의 첫 글자 ‘ㄹ’에 이식했습니다. ‘S’와 ‘ㄹ’이 시각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점에서 힌트를 얻어 차용한 결과물이에요.
이런 방식으로 원본 타이틀의 디자인 요소를 한글 타이틀에 최대한 재현하되, 가독성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얼마간 변주를 적용한 것입니다. 넷플릭스의 한글화 작업을 통해 이런 훈련을 정말 빡세게(!) 했어요. 제 개인적으로 새로운 글자를 그려내고 만들어내는 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른 듯 같은 뜻〉: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비영리 단체 ‘S&C 뉴욕(Stigma & Cognition NY)’과 뉴욕한국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한글 포스터 전시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인터뷰 시리즈 「인터뷰 애프터뷰(interVIEW afterVIEW)」를 혹시 아시나요?(웃음) 첫 인터뷰 후 여러 해가 지나 두 번째 인터뷰로 다시 만나보는 코너입니다. ‘펀데이’ 오픈이 2020년이니까, 5주년을 맞는 2025년 봄에 또 한 번 인터뷰를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제 맘대로 정해본 거라 죄송합니다. 그때쯤, 스튜디오 ‘펀데이’와 디자이너 한중수는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시나요?
‘5년’이라면 뭔가 변화하기 딱 좋은 주기 같네요. 10년은 길고 1년이나 2년은 짧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2025년에는 그게 잘 풀려서 자리가 잡혀 있다면 좋겠습니다. 디자이너 한중수도 평범한 인간 한중수도, 2025년에도 또 그 앞으로도 현명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또 스튜디오 이름처럼 일을 즐기면서 지속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도, 2025년에도 즐겁게 fun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