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지는 현재 구글에서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지난 2008년 미국의 SVA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지금까지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 중이라고. 그녀는 한 색깔을 고수하는 대신 늘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하므로 스스로 '스타일이 없다'고도 얘기를 한다. 그 덕에 실제로 다른 분야의 클라이언트에게 새로운 작업에 대한 의뢰가 들어올 때가 많다는 것. 진취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그녀에게만 있는 특별한 에너지를 지금부터 소개한다.
세계적인 기업 구글에서 일하는 거 어떠세요? 가장 좋은 점을 꼽아 준다면요?
많은 분이 잘 아시는 대로 구글은 검색엔진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유튜브, 안드로이드, 크롬 등 다양한 프로덕트를 통해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지요. 회사로서의 구글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저는 그 안에 있는 ‘크리에이티브 랩’이라는 곳에서 일한답니다.
구글의 독특한 복지 시스템은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것 같아요. 짧게 자랑을 하자면, 뉴욕 오피스는 본사 다음으로 가장 큰데, 다섯 개의 카페테리아에서 세 끼 양질의 식사가 나오고, 곳곳에 과일, 스낵, 음료수 등이 있는 마이크로 키친, 운동기구와 당구, 탁구 테이블이 있는 게임룸, 마사지룸, 낮잠을 잘 수 있는 냅팟(nap pod) 등의 시설물이 있어요.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세계 여러 다른 도시의 오피스나 혹은 개인 사정에 따라 오피스가 아닌 곳에서 일할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사실 구글이라는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걸 당연하게 지지해주는 문화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수평 구조가 이뤄지는데, 이를테면 막 들어온 신입 사원도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아이디어를 꺼내놓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럼 윗사람들은 거기에 최대한 귀 기울이려고 노력해요. 그러니까 모두가 발전적인 경쟁을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려고 애쓰죠.
저희 팀에 대한 가장 큰 자랑거리라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에이티브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에요. 인재에는 돈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는 랩의 문화 덕분에 제게 아이돌이나 다름없던 스타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종종 오는데, 그럴 땐 아직도 연예인 만난 팬처럼 떨려요.
구체적으로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요.
제가 속해 있는 크리에이티브 랩은 디자이너, 필름메이커, 작가, 테크놀로지스트 등 주로 크리에이티브들로 구성된, 뉴욕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팀이에요. 초반에는 구글 내의 인하우스 에이전시 같은 개념으로 시작해 광고 등의 마케팅 작업을 주로 했었는데, 이제는 UX/UI 디자인, 브랜딩, 퓨처비전 프로젝트 등 아이디어를 요하는 모든 일을 맡고 있지요. 어떤 특정 프로덕트를 맡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글의 수많은 프로덕트를 재정립하고 하나의 브랜드로 잇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죠.
제가 랩에서 주로 하는 일은 퓨처비전 프로젝트인데, 전에 없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한 아이디어 및 디자인 콘셉트와 방향을 잡는 일이에요. 그 덕에 늘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제가 입사하고 처음으로 맡다시피 한 프로젝트가 바로 구글 글라스 프로젝트였답니다. 하드웨어가 실재하기도 전에 콘셉트 영상을 먼저 만드는 일이었는데, 사용자의 경험을 상상해 만든 한 편의 영상을 통해 이 기술이 쓰이게 될 방향성과 전체적인 디자인의 톤 등을 보여주었어요.
지금도 신기술 개발과 관련된 영상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아쉽게도 언급을 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진 않아요. 외부에 공개된 프로젝트로는 프로젝트 아라, 프로젝트 룬(와이파이가 연결된 풍선으로 전 세계에 무선 인터넷을 지급하자는 프로젝트), 무인 자동차 프로젝트 등이 있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좋아하는 로고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브랜딩 영상, UX/UI 디자인, 애니메이션 등의 일도 하고요.
구글에 입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아니면 특별한 노력을 했다든지요.
저희 팀에는 ‘구글 파이브’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매해 대학교나 대학원을 갓 졸업한, 각기 다른 슈퍼파워를 가진(이건 저희식 표현인데, 말 그대로 특기를 의미하지요.) 학생 다섯 명을 뽑아 1년간 함께 일하는 프로그램이에요. 그렇게 일을 한 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구글에서 배웠던 것을 펼쳐나가고, 어떤 사람은 랩 혹은 다른 팀에 남아 정직원으로서 일하게 되지요.
저는 3기 파이브 멤버였어요. 당시 저희 팀에는 필름메이커였던 저를 포함해 디자이너, 코더, 작가 그리고 전략가가 있었어요. 매년 졸업 기간이 되면 지원서를 받음과 동시에 랩에서 직접 미국 전역에 있는 학교들에 학생들을 추천해달라고 연락을 돌려요. 저의 경우도 운이 좋게 졸업 직후 학교에서 추천해 준 경우였고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구글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당연히 디자인 혹은 모션 스튜디오나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될 거로 생각했고, 대기업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끌어안고 사는 걸 좋아했던 것도 있고, 모션을 하면서도 늘 웹에 대한 꿈이 컸어요. 인터뷰를 보러 갔는데, 만난 사람들 하나같이 다 매우 멋진 거예요. 자기 일에 대한 자신감,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아, 여기 꼭 가고 싶다, 싶었어요.
최근 근황을 말씀해주세요.
아무래도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 대부분이 기밀이다 보니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들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종종 회사 일 말고도 프리랜싱 일을 받는데, 최근에는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다양한 분야의 교육자들이 모여 TED처럼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단체인데, 거기 들어가는 브랜딩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교육 얘기가 나왔는데 오는 9월 학기부터 제 모교인 SVA에서 모션 포트폴리오 수업을 가르치게 됐어요. 모션 그래픽과 인터렉티브 디자인을 혼합한 수업이 될 예정이에요. 설레는 만큼 긴장도 되지만 학생들만큼 저 자신도 많이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모션 그래픽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SVA 그래픽 디자인 과정의 일부로 모션 그래픽 수업이 있는데, 사실 전 3학년이 될 때까지 모션 그래픽이 뭔지 몰랐어요. 3학년 때 들을 수업을 정하면서 모션 그래픽이라는 게 있는데 한 번 배워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수업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죠. 디자인과 움직임과 음악이 함께한다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모션 그래픽은 정말 시간이 많이 드는데 저는 하루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만 해도 지칠 줄 몰랐어요.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영상을 만드는 게 마치 그래픽에 생명을 입히는 과정 같았어요.
구글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한 클라이언트 또는 세계적인 매거진에서 당신을 찾고 언급해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음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진심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하하. 글쎄요, 클라이언트 분들께 작업이 단단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어요. 영상을 만들 때는 매 프레임을 디자인한다는 생각으로 작업해요. 그런 점이 클라이언트들에게도 와 닿았나 봐요.
굳이 조금 다른 점이라면, 저는 한 색깔을 고수하는 대신 늘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하려고 해요. 기왕이면 저번 작업과는 최대한 다른 느낌을 보여주려고 하죠. 그래서 스스로 ‘스타일이 없다’고도 얘기를 하는데, 그 덕에 실제로 다른 분야의 클라이언트에게 새로운 작업에 대한 의뢰가 들어올 때가 많아요. 대개는 당연히 비슷한 작업을 한 적이 있는 디자이너를 쓰려고 하는데, 새로운 느낌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클라이언트들이 제게 연락을 많이 주시는 것 같아요.
작업 프로세스가 궁금해요. 작품 구상은 어떻게 하나요?
디자인은 Problem Solving, 즉 문제 해결이라고 하지요. 작업하기에 앞서 해결하고자 하는 바나 전달하려는 주제를 먼저 적어 내려가요. 콘셉트의 키워드만큼이나 제게 중요한 건 뉘앙스인 것 같아요. 영상 전체의 분위기와 느낌을 말하는데, 관련 레퍼런스는 주로 그런 톤이 비슷한 것들을 찾아요. 레퍼런스는 영상뿐 아니라 사진이나 순수예술, 제너러티브 아트(generative art)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찾는 편이고요.
평소 온라인에 꾸준히 레퍼런스를 모아두는 습관이 있어 필요할 때는 금방 찾을 수 있어요. 레퍼런스를 모으면 그다음에는 스케치를 시작해요. 원래 모션 그래픽은 스타일프레임과 스토리보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저는 스토리보드를 대개 건너뛰고 바로 작업을 시작하는 편이에요. 모션으로 스케치를 하는 버릇이 든 건 회사에 다니면서인데, 가령 단순한 도형의 움직임만 가지고 먼저 느낌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를 잡으려고 하지요.
작업을 위해 특별히 더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아니면 집착하는 부분이라도.
어떻게 해야 결과물의 유통기한을 최대한 길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에요.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유행과 흐름이 생기면서 예전의 작업들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지만, 좋은 디자인이라면 그 싱싱함이 훨씬 오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모션 그래픽의 특성상 스타일이나 테크닉에서의 유행이 강하고 빠른 편인데, 그 안에서 균형을 잡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었다면요?
역시 구글 글라스 콘셉트 영상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만들어본 ‘퓨처 비전’ 프로젝트이자 UI/UX 콘셉트 영상이었거든요. 실제적인 스토리가 있는 영상 작업을 해본 것도 처음이었어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디자인을 하면서 끊임없이 내가 유저라면 어땠을까를 고민했어요. 내가 원하는 바를 대입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나’라는 사람으로 대표되는 인종이나 성별, 연령 등을 고려해 최대한 많은 시각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어요. 참고로 구글 영상에는 가족이나 연인의 사랑 이야기가 많은데, 그건 저희가 로맨티시스트라서(?)라기보단 사랑이라는 주제는 전 인류를 초월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에요. 이 영상에 들어가는 UI를 통해서 제가 가장 먼저 나타내고자 했던 건 제가 앞서도 얘기했던 뉘앙스와 톤이었어요. 친근하고 재미있는 느낌을 전달하자는 게 주목표였어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인 외에도 배운 게 참 많아서 가장 기억에 남네요.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조언 하나 해주신다면?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먼저 생각을 해보는 게 가장 첫 번째 문제인 것 같아요. 유학 생활도 그렇지만, 비자를 받아 일을 시작하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타지 생활을 헤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스스로 아는 게 중요해요. 또, 해외에 나가면 그 나라 문화에 대해 폭넓게 공부를 해야 해요. 디자인은 문제 해결이기 때문에 사회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깊이가 생기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디자인만큼이나 인문학, 사회 현상 등에 대한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해요.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아직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게 가장 신 나는 점인 것 같아요 하하. 제 개인적인 목표라면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보는 거예요. 단순한 여행을 넘어 제가 가는 곳에 어떤 자취를 남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충분히 스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아! 한가지 목표라면 디자이너로서 좀 더 큰 문제를 해결해보는 거예요. 디자인이 사회 문화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어마어마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