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누구나 “글씨 좀 예쁘게 써라.” 혹은 “글씨를 참 예쁘게 쓰는구나.”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글씨가 학문 수양의 기본이자 결정체였다고 여긴 조선시대 학자들의 서예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일까요? “천재는 악필이다”는 말로 위안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글씨를 바르게 쓰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동경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성품도 바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글씨체가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생각은 자칫 비과학적이거나 근거 없는 미신처럼 받아들여 질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정반대입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서양에 비해 쓰이는 범위가 넓지 않지만 글씨체를 통해 그 주인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필적학(graphology)’이라는 이름의 학문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1622년 이탈리아의 의학자 카밀로 발디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J.H.미숑, 독일의 W.프라이어 등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필적이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를 반영한다는 것을 논증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필적학에서는 글씨의 크기나 필압, 속도, 기울기 등에 따른 형태, 자간과 행간이 주는 전체적인 조화 등을 분석하여 글을 쓴 사람의 심리적 상태와 의도, 나이, 성별 등의 정보를 얻어냅니다. 그 덕분에 필적학은 국내외 범죄 수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본진 검사가 수사 현장에서 범인이 남긴 필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얻은 현장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필적은 말한다>라는 서적을 출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항일 운동가와 친일 인사들의 글씨를 비교하여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필적학의 의미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입니다.
“항일운동가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작고,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며, 유연하지 못하고, 각지고 힘찬 것이 많다. 글자 간격은 좁고, 행 간격은 넓으며,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친일파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다. 글자 간격이 넓고, 행 간격은 좁으며, 규칙성은 떨어진다. 일부 친일파는 극도로 불안정한 필치를 보인다.”
10여 년간 900여 편에 이르는 항일 운동가와 친일 인사의 편지를 직접 수집하고 분석한 결과, 저자가 발견해낸 특징이 정말 잘 드러나죠?
책에서는 돈을 많이 모으는 사람, 출세하는 사람, 스타로 성공하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 남을 잘 포용하는 사람, 창의적인 사람 등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글씨체 또한 사례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책의 설명을 참조하여 제가 조사한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먼저 스타로 성공하는 사람의 글씨입니다. 우리 나라 대표 연예인인 장동건의 글씨입니다. 외모만큼이나 글씨체도 정말 예쁩니다. 스타들의 글씨에는 글자가 크고 마무리를 곧게 내리긋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서명에서 처음과 끝 자음을 크게 쓰는 경우가 많답니다. 이것은 자신을 화려하게 연출하고 싶어하는 무대 기질의 발로라고 합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싸인을 받을 때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창의적인 사람의 글씨는 어떨까요? 소설가 신경숙과 김춘수 시인의 글씨입니다. 감성이 풍부한 창작가들의 글자는 모나지 않고 마지막 부분의 뻗침이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나 성취욕의 표현입니다. 각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일정한 틀에 매이지 않는 성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또한 글자 간격이 넓은 경구가 많은 이것은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성향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의 글자 밑 부분의 여백이 적은 편인데 이것은 몽상이나 감성을 드러내고 글씨가 컸다 작았다 하는 것 역시 변화를 추구하는 예술적인 성격의 표현입니다.
모차르트의 글씨는 그 자체가 마치 악보 위의 음표처럼 보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이면서 익살스러웠던 그의 성격 또한 묻어나는 글씨체 입니다.
출세하는 사람들의 글씨는 어떨까요? 미국의 역대 대통령과 우리 나라의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체는 출세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알파벳 ‘t’의 가로획을 매우 높은 부분에 쓴다거나 자음 ‘ㅊ’과 ‘ㅎ’의 윗부분을 크게 쓴다는 것입니다. 책에 따르면 이처럼 글자의 첫 부분을 크게 쓰는 것은 다른 사람들 위에 서고 싶은 리더들의 외향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예를 발견했습니다. 당대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불우한 삶을 살다간 예술가 고흐의 글씨에는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는 것 같지 않나요? 남을 잘 포용하는 성격도 글씨에 드러날까요?
물론입니다. 타계하신 법정 스님의 유묵입니다. 자음과 모음 사이, 글자 사이에 여유 공간이 넉넉한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포용을 드러냅니다. 글씨 모양도 모나지 않고 부드럽습니다. 반대로 글자 사이의 여유 공간이 좁은 사람은 자의식이 강하고 자신과 남에게 엄격한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회계사나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씨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죠?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두 왕의 글씨체를 비교하면 지금까지의 내용이 잘 정리 되실 겁니다.
왼쪽은 세조, 오른쪽은 선조의 글씨입니다. 한 눈에 봐도 두 사람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필적은 성격, 특히 무의식적이거나 내면 깊숙한 곳의 심리가 쓰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 것이므로 일부러 꾸며 쓴다 해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글씨를 바꾼다는 것은 행동 습관을 바꾼다는 것이므로 성격 개선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향적이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글씨의 크기를 크게, 간격을 넓고 고르게, 뻗침은 강하게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잘 안 될 것 같으시다구요?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은 당연히 어렵습니다. 습관이 생성된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위 사진을 보면서 꾸준히 연습해 보세요. 정조대왕의 명필은 수 많은 연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