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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치미술가 김용관

    임의, 우연, 무작위라는 아름다운 패턴


    인터뷰. 임재훈

    발행일. 2020년 04월 14일

    설치미술가 김용관

    『타이포그래피 서울』이 그래픽디자이너나 글꼴디자이너가 아닌 설치미술가를 인터뷰이로 만난 건 처음이다. 독자들도 이 인터뷰가 다소간 낯설지 모르겠다. 에디터 또한 설치미술가 김용관이 눈 설다. 그럼에도 굳이 인터뷰어로 나선 건 궁금증 탓이다.
    
    작년 여름, 서울 명동에 스포츠 용품 기업 아디다스의 브랜드 센터가 생겼다. 개장 기념으로 ‘서울’을 주제로 한 아티스트 컬래버레이션 작품들이 실내에 전시됐다. 그중 한 작가가 눈에 띄었다. 그는 참여작 네 편에 ‘Obsolete Landscape’라는 묶음말을 달았다.(2015년 동명의 작품을 발표한 바도 있다.) 폐기된 풍경, 무용한 풍경, 쇠퇴한 풍경, 시대에 뒤떨어진 풍경, 한물 간 풍경, ···.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일반적 이미지―역동성·진취성·트렌디함―와는 정반대인 정서다. 반브랜드(anti-brand)처럼도 보이는 작품을(혹은 작가를) 신축 브랜드관 안에 들였다는 점. 이것이 되려 해당 브랜드의 ‘스피릿’으로 느껴졌다. ‘impossible is nothing’의 공간에 ‘Obsolete Landscape’를 펼쳐놓은 작가, 이름이 김용관이었다.
    
    이후 김용관을 좀 조사(?)했다. 2019년 이전의 작품, 전시 정보, 글 들을 탐문한 것이다. 대체로 난해했다. 몰이해의 사정이 에디터만의 개별 사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관객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은 잡히지 않는 미지‘들’에 둘러싸여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몰라 그저 괴로울 뿐이다.” 같은 비평문도 있는 걸 보면. 이 문장을 쓴 평론가는 뒤이어 “그러나 그들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며 김용관을 변호하는데, ‘그저 괴로운 관객’ 입장에선 그 변론조차 또 다른 ‘미지’로 읽히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직접 만나야만 했다. 평론을 경유하지 않는 직항 노선으로 작가의 세계에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수 개월이 지났고, 세상은 코로나19 시국이 돼 있고, 『타이포그래피 서울』 편집국 정책에 따라 김용관과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이루어졌다. 인터뷰라기보다 온라인 GV에 가까운, 관객이 묻고 작가가 답한 대화록 같은 텍스트. 김용관의 작품 세계가 아득했던 관객들에게, 이 텍스트가 순조로운 직항 노선이 되기를 바라며.
    ‘Obsolete Landscape’,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200×200cm, 2015
    아디다스 2019 플래그십 스토어 컬래버레이션
    2019년 빈폴 30주년 기념 컬래버레이션

    루즈앤라운지, 빈폴, 아디다스, 알레그리, 커스텀멜로우 같은 의류 브랜드들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셨는데요. 좀 신기합니다. 작가님의 작품 경향, 혹은 세계관이란 퍽 철학적으로 보이거든요.(이 점에 대해선 곧 집중적으로 여쭤볼 겁니다.) 작가님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중적인 브랜드들이 김용관이라는 ‘어려운(만만찮은) 작가’를 계속 찾는 이유에 대해서요.

    제 관심사와 생각을 두서없이 전개하고 나열하다 보니, 제가 봐도 다소 불친절한 느낌이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여러 브랜드에서 연락해주시는 이유는, 제 작품이 패턴과 모듈로 구성돼 있어서 브랜드 이미지와 결합하기 용이해서가 아닐까 싶네요. 컬러풀하다는 이유도 있을 것 같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컬래버레이션을 자주 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면이 크게 작용합니다. 미술계가 호황이 아니고 작품을 자주 판매하는 것도 아니어서, 컬래버레이션은 제가 돈을 벌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제 활동 중 하나예요. 물론 작가로서 디자인과 제품 개발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요. 새로운 디자인과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좋아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문구류와 가구 만드는 일에도 참여하고 싶어요. 다만, 연락 주시는 기업과 브랜드의 지향성, 도덕성에 대해선 종종 고민하곤 합니다.

    ‘비대칭 행렬(Asymmetric Matrix)’, 박스에 인쇄, 가변 크기, 2017
    ‘대칭 행렬(Symmetric Matrix)’, 박스에 인쇄, 가변 크기, 2016

    “규칙적이지 않은 행위가 만드는 규칙성, 규칙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행위 속에 숨겨져 있던 규칙성, 임의-우연-무작위-반복-패턴이 만드는 시각 구성,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역사성에 대한 탐구”.(‘비대칭 행렬’ 작가노트 중)
    이 말은 마치 김용관의 작품 세계를 위한 안내 사항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영화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떠올렸어요. 주인공 ‘네오’는 단독자-구원자로 계시된 존재였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전 수많은 ‘네오’들의 최신 버전에 불과했습니다. 네오가 주체적·우발적으로 행한 일들은 미리 프로그래밍 된 코드에 따른 것이었어요. 김용관의 세계관에선 우리 모두 ‘네오’인 건가 싶습니다. 제아무리 ‘임의-우연-무작위’라 해도 ‘반복’되는 순간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이 세계에는 ‘임의’도 ‘우연’도 ‘무작위’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세계의 역사란 철저히 ‘규칙성’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쯤 되면 관객의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창작 혹은 예술이란 세상의 규범을 벗어나는 ‘탈규칙’의 행위 아니었나? 김용관 작가는 자신의 창작과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는 거지? 그 스스로도 규칙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걸까? ···어지러워진 이 관객의 머리를 맑혀줄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곳이 아닌 새로운 시공간, 새로운 세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 이곳과는 다른 물리 법칙과 최소 단위로 구성된, 새로운 기본 설정을 지닌 세계를 늘 상상하곤 하거든요. 개인적으로 SF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세계관, 설정, 가정인데요. 과학이 아닌 다른 것이 근거가 되는 세계관, 설정,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AF(Art Fiction). 예술적 근거를 둔 세계관, 설정, 가정. 먼 미래의 예술. 인간이 아닌 존재의 예술. 대체 역사적 예술(뒤샹이 더 일찍 체스에 전념했더라면). 물리 법칙이 다른 시공간의 예술. 모든 인류가 예술을 하는 세계. 예술적 개념이 물리 법칙의 토대가 되는 우주. ··· 등등.

    제 작품은 대부분 이런 상상을 바탕으로 한 여러 세계관, 설정,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패턴, 모듈 같은 규칙적 구조는 그 결과로 등장하는 시각 요소죠. 어떤 세계관, 설정, 가정도 무한한 시공간이 아닌 이상 반복되는 지점이 있을 테고, 반복되면 패턴과 모듈이 발생하고, 패턴과 모듈에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가설을 작업의 화두로 삼고 있어요.

    제 작품에 ‘무한’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무한만이 규칙을 벗어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다음은 예시로 소개하는 〈AF〉 3부작 중 하나인 6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신파(New Wave)〉에 대한 설명입니다.

    New Wave
    현재인 우주와 미래인 코코의 미래예술 탐방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시공간 이동이 자유로워진 미래, 1000억 년 후의 미래, 1000경(京) 년 후 미래의 예술과 생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관을 두 인물이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체험을 한다.
    원자 단위까지 정교하게 구현한 행성 크기의 고양이 조형물, 초물질 토마스, 예술의 개념과 방법론을 공유하는 플랫폼 플라톤, 대안적 복합 문화 예술 신생 공간 PLACELESS, 세상의 모든 좌대(座臺) 전, 아트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종교가 되어버린 FOAM 프로젝트, 슈타이얼 번지 점프, 아바타 조각 체험장, 비지구적 예술에 대한 담론, 다른 우주와 존재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AUC 센터, 힐베르트 어드벤처, 1인의 단체전-10인의 개인전, 에어아트 등 다양한 미래예술에 대한 상상을 엿볼 수 있다. 가상의 ‘비주얼 노벨(visual novel)’을 리플레이 하는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다

    “만일 세상의 수많은 결과물들이 결코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세상을 바꾸는 시도 또한 당위적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당위적 구조에 의문을 품으며 가치를 수평으로 재배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개인전 〈표본공간, 희망에 의한 기관의 변이〉(2013) 작가노트 중)
    위 말의 맥락상 당위적 구조는 수직적 구조, 위계(hierarchy)를 의미하는 표현일 텐데요. 따라서 “가치를 수평으로 재배열하는 것”이란 수직과 위계에 대한 해체 작업이 되는 셈입니다. 관련 작품들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각각의 세계는 고유의 물리 법칙을 토대로 만들어지죠. 하지만 역사는 수많은 임의, 우연, 무작위적 결정과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임의, 우연, 무작위적 결정과 선택이 있었다면, 다른 역사가, 다른 가치를 중시하는 세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가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면,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수직적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고 수평으로 재배열하면,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중심이 되는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 이런 공상을 기반으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것이 토대가 된 몇 가지의 사고 실험을 개인전 〈표본공간, 희망에 의한 기관의 변이〉(2013.9.27-10.20 인사미술공간)에서 진행했습니다. 당시에 설정한 세계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본공간, 희망에 의한 기관의 변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다'는 말로 니체는 필연과 영원회귀를 등치시켜버렸다. 모든 것이 무한한 시공간에서 어떤 사건의 발생 확률이 0이 아닐 때, 그 사건은 언젠가 어디에선가 반드시 발생할 것인가. 이곳에서는 선과 악의 총량이 각각 무한하기에 우리의 선한 행동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수의 끝에 1을 더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한에 1을 더해도 결국 무한이기에) 선한 행동이 세상 전체를 조금이라도 더 좋게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면―단지 선택의 순간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면―아무리 많은 선한 행동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표본공간, 희망에 의한 기관의 변이〉 전시작
    [위] ‘변의 수가 12의 약수인 도형들로 이루어진 시계’, 플래시 애니메이션, 러닝 타임 28분 48초, 2012
    [아래] ‘선의 수가 소수로 이루어진 정다각형들의 이상’, 리소프린트, 29.7x42cm, 2013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하셨지요. 작가님의 작품 경향을 판화 기법에 비유해본다면 왠지 메조틴트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메조틴트라는 게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판면 전체에 점들을 빼곡이 찍어 오돌토돌하게 해놓고, 그 상태에서 누르고 깎고 펴면서 형상을 만드는 방식이잖아요. 태초의 거친 세계(판면)가 있고, 이후에 질서(형상)가 부여되는 방식이랄까요.
    ‘7개의 육면체(Seven Hexahedrons, 2013)’의 경우, 위상학적으로 판이한 7개 육면체를 조각한 작품입니다. 육면체(면이 여섯 개인 입체 도형)라는 개념 자체가 판면-세계라면, 각기 다른 7개 육면체들은 형상-질서로 보입니다.
    ‘닮은꼴(Similar Figures, 2013)’은 작가노트의 설명대로 “무언가 가슴 벅찬 언어로 구성된(겉모습 또한 매우 감상적인) 여러 서적들을 자르고 배열을 달리하여 정사각형으로 만든” 작품인데, 그 결과 “서적들은 각각의 목소리를 잃고 물성과 뉘앙스만을” 남깁니다. 각 서적들의 고유한 판면-세계가 잘려나가고 재배치됨으로써 일률적인 형상-질서 체계 하에 놓인 셈입니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로마의 테라스〉에 메조틴트 판화가가 등장합니다. 판면이 형상을 앞섬에 익숙해서인지, 살아가는(대개는 고통받는) 방식 또한 질서가 부여되기 이전의 세계를 동경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작가님이 ‘규칙적이지 않은 행위가 만드는 규칙성’이나 ‘규칙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행위 속에 숨겨져 있던 규칙성’ 등을 탐구하는 이유도, 어쩌면 규칙이 있기 전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 아닐까 추측해봤습니다. 규칙이 없는 세계라는 건 그 누구도 경험해본 바가 없으니까요. 그런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든 찾아내기 위한 과정, 이것이 작가 김용관의 작품 경향이라고 느껴집니다. 작가님 스스로는 자신의 예술 동인을 어떻게 설명하시는지요.

    원래는 만화가가 꿈이었습니다. 제가 나온 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만화 동아리가 있었고, 안전하게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판화과를 선택하다 보니, 판화에 대해 특별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판화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판화를 작업에 활용하고 있지는 않네요. 제 작품 경향을 메조틴트에 비유하시는 것을 보고, 그래도 판화를 전공한 것이 내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긴 했구나 싶습니다.

    아무튼, 만화는 시각 언어와 문자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예술 장르인데요. 저는 시각 언어와 문자 언어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늘 생각해왔습니다. 대단한 아이디어는 없었지만요. 꿈과 재능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현재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몇 편의 동인지와 학습만화를 만든 경험이 있기는 하네요. 아까 말씀드린 세계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형식적으로는 시각 언어와 문자 언어를 중심으로, 제 자신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7개의 육면체’, 목MDF에 분채도장, 가변 크기, 2013
    ‘닮은꼴’, 도서를 자르고 재조립, 가변 크기. 2013

    “아무렇게나 쓴 문장에도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 그것은 다음 문장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결말의 방향을 한정하고 말 것이다. 문제는 결말이 이미 정해졌고, 그것이 매우 나쁠 경우다. 그럴 때면 제자리에 머무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 한없이 결말에 가까워져도 결코 마침표를 찍어선 안 된다.”
    〈두 바퀴 회전〉 전시 도록에 실린 김용관의 글 「시계방향으로의 항해」 중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

    직선 :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圓周)의 곡선.
    김기택 시 「직선과 원」 일부

    글 쓰는 일을 하는지라 「시계방향으로의 항해」의 ‘글쓰기’ 메타포가 무겁게 읽혔습니다. “제자리에 머무는 글쓰기”를 하는 자신을 상상하다 김기택 시인의 위 시를 떠올렸습니다. 팽팽하고 격렬하게 제자리에 머무르고, 그렇게 완벽한 원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 인정하기 싫지만 생활인들의 보편적 삶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작가 김용관이 바라는 결말, 혹은 현대인들에게 도래하길 희망하는 결말이 혹시 있나요?

    제가 희망하는 결말은 희망적인 결말입니다. 「시계방향으로의 항해」는 결말이 정해진 어떤 슬픈 사건을 마주하며, 공상적 방법론을 통해 슬픈 결말을 끝없이 유예하며, 슬픈 결말에 도달하는 것을 억누르는, 그런 희망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 세계는 ‘이미지의 신’과 ‘이야기의 신’이 대화하며 만들어낸 것이에요. 시작과 끝이 수미쌍관처럼 이어져서 끊임없이 시작과 끝을 되풀이하는 이야기입니다. 시작과 끝 사이의 이야기는 조금씩 변주되면서 다른 이야기가 되고요.

    이 이야기가 무한히 지속되려면 한 가지 가정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나눌 수 있다, 라는 가정요. 시간과 공간의 최소 단위가 있다면 그것을 블록 삼아서 만들 수 있는 세계의 경우의 수 또한 유한할 테니까요. 그래서 「시계방향으로의 항해」는 시작과 끝, 바운더리가 정해진 세계를 끊임없이 쪼개서 계속 다른 이야기, 이미지를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된 모습, 제 개인적인 경험, 꿈과 현실에 대한 생각, 이야기와 이미지에 대한 생각이 들어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가 유한하다면, 이미지가 언젠가 종말을 고한다면,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만화에 빗대 말하면 이미지는 ‘칸’이에요. 이야기는 칸과 칸의 관계(칸들)에서 만들어지고요. 그러니까 이미지는, 칸은 고정돼 있습니다. 칸들은, 이야기는 연속적이고요. 그리고 칸은, 이미지는 유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는 다른 눈을 가진 존재, 새로운 시공간, 물리 법칙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두 바퀴 회전〉 전시작 ‘이미지 조각(Image Sculpture)’, MDF에 UV 인쇄, 캔버스에 잉크젯 인쇄, 가변크기, 2018

    이미지를 이미지로 있게 하는 최대 크기와 최소 크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가령 3200×2400개 사각형(픽셀)이면 웬만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겠죠.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순차적으로 저장하는 슈퍼컴퓨터가 있다면, 과거에 있던, 미래에 있을, 혹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모든 이미지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미지는 종말을 맞이하려나? 시각예술이 몇만 년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모든 이미지가 고갈될 텐데, 그러면 시각예술은 끝나는 걸까? 물론 시각예술이 단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떻게 하면 이미지를 유한의 감옥에서 구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무한해질 수 있을까? 가능성이 무한해야지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테니까요. 이미지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무한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넣는다면, 끝없이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칸이 아닌, 칸‘들’이 된다면, 이야기의 연속성을 받아들인다면, 이미지는 유한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공상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관객과의 만남에 참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작업, 기획 중인 전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전시가 열린다면 또 한 번 관객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몇몇 일정이 무산됐습니다. 지금은 7월과 9월 각각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를 열심히 준비 중이에요. 그리고 김시훈·이홍민·최재훈 작가, 천미림 독립 큐레이터와 함께 결성한 전시 콜렉티브 ‘네오서울(Neo Seoul)’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연말에 네오서울의 세 번째 전시를 가질 계획입니다.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Ruins of Mimesis, Mimesis of Ruins)’, 비트맵 애니메이션, 러닝 타임 9분 4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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