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위스 서체 디자인 거장 아드리안 푸르티거(Adrian Frutiger, 1928~2015)가 향년 87세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SNS에 그들 애도하는 글을 올리며 많은 이들과 슬픔을 나누었다. 그를 기억하며, 오늘은 그가 1975년에 제작해 지금까지도 프랑스 곳곳에 쓰이며 얼굴 역할을 하고 있는 서체, ‘프루티거(Frutiger)’에 대해 알아보자.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1954년 서체 유니버스(Univers)를 디자인한 후 단번에 세계적인 서체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유니버스는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산세리프 서체로도 널리 알려졌다. 또한, 유니버스는 문자 이름이 아닌 숫자 시스템으로 굵기를 분류한 첫 영문 서체로도 유명하다. 이 서체는 이름만큼이나 영화 포스터, 글로벌 기업인 페덱스(Fedex)와 이베이(eBay) 로고, 2003년까지 생산된 애플(Apple) 키보드의 영문 서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Universe’하게 쓰이고 있다.
→ 관련 기사: 숫자 시스템으로 굵기 분류한 첫 산세리프 서체, 유니버스(바로 가기)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1968년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 측(the Charles De Gaulle Airport)으로부터 공항에 사용할 새로운 타입 페이스를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즉시 개발에 착수했다. 프루티거는 그가 개발한 서체, 유니버스를 활용하는 쉬운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서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고전적인 느낌의 디자인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시도’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프루티거는 7년이라는 시간을 샤를 드 골 공항을 위한 새로운 서체 개발에 착수했고, 1975년 드디어 완성했다. 같은 해, 샤를 드 골 공항에서 쓰이는 모든 표지판 및 알림판을 프루티거 서체를 사용하여 제작, 지금까지 공항의 얼굴과 같은 서체로 쓰인다.
프루티거는 출시 후 지금까지 유니버스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서체이다. 이 서체는 유니버스와 같은 산세리프 스타일의 타입 페이스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유니버스는 원칙적이고 체계적인 디자인에 반해 프루티거는 고전적인 느낌의 디자인으로 기하학적 요소가 녹아있다. 클래식한 스타일이지만 모던함을 잃지 않고, 따뜻한 느낌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이 프루티거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길이 되어 주는 ‘표지판 용도’라는 특성상 다양한 거리와 각도에서도 가독성이 좋아 유니버스체 만큼이나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지금도 브리티시 로열 네이비(British Royal Navy)나 디에이치엘(DHL)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나 정부에서 프루티거 서체를 애용하고 있다.
이 서체는 제작 후에도 꾸준히 프루티거 넥스트(Frutiger Next), 프루티거 아라빅(Frutiger Arabic), 뉴 프루티거(Neue Frutiger) 등 다양하게 패밀리 서체들이 개발 및 개선되고 있다. 또한, 프루티거 자신에게는 프루티거 개발로 인해 타입 디자이너로서 다시 한번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에는 폰트 회사 라이노 타입(Linotype)에서 프루티거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프루티거와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 ‘프루티거 세리프체’로 알려진 메르디앙(Meridien)을 함께 재작업하기도 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폰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며 활동했던 고 아드리안 프루티거. 반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체를 만든 다는 것은 완벽함 그 이면의 수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듭한 끝에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동안 잘 썼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잘 쓰겠다는 감사의 마음을 보내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