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치맥’. 맥주병이나 캔 등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분명 ‘나, 이 서체 본 적 있어.’ 라고 말할 정도로 일상 속에서 이미 익숙한 서체 스타일, ‘블랙 레터(Black letter)’. 블랙 레터는 유럽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서체 스타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서유럽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중세시대 고딕 건물을 보고 형상화 하여 만들어진 글자체, 블랙 레터에 대해 알아보자.
블랙 레터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둥글고 획이 가늘어 흰 지면이 많이 드러나게 하는 ‘화이트 레터(White letter)’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흰 지면에 촘촘하게 등장하는 굵고 검은 직선의 특징 때문에 블랙 레터로 불렸다. 이러한 특징은 두꺼운 벽과 높고 작은 창을 가진 중세 고딕 건축물과 많이 닮아있다. 이런 글자 모양을 만들기 위해 중세유럽에서 사용되던 끝이 넓적한 펜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서부 유럽에서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가장 많이 사용되던 글꼴 모양이다. 독일에서는 20세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1933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독일의 공식서체 스타일로 지정했고, 20세기 독일에서 생산된 모든 책의 57%가 본문에 블랙 레터 스타일을 사용했을 정도다. 또한, 서양 최초의 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책 역시 이러한 스타일로 인쇄되었다.
블랙 레터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폭이 좁은 편이고, 각이 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서부 유럽에서 ‘좋은 쓰기의 본(本)’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블랙 레터는 본래 손글씨이기에 시간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특징에 따라 텍스투라(Textura), 로툰다(Rotunda), 슈바베허(Schwabacher), 프락투르(Fraktur) 등 총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이러한 변화의 경계는 알프스 산맥이다.
텍스투라는 알프스 산맥 이북지역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에서 발달한 글꼴 모양이다. 모든 글자 모양이 직선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뾰족하고 딱딱하지만, 직선이 모여 만드는 형태가 꽤 화려하다. 영국의 옛 인쇄물에 많이 등장하는 서체양식이기에 다른 나라에서 올드 잉글리시(Old English)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글자체다. 이 글자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폰트로는 올드 잉글리시 텍스트(Old English Text)와 가우디 텍스트(Gaudy Text)가 있다.
로툰다는 알프스 산맥 이남 지역인 이태리, 스페인 등지에서 많이 쓰이던 글자 형태로, 텍스투라와는 반대로 모든 글자가 곡선으로 이루어져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 강하다. 로툰다 형식을 대표하는 서체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산 마르코(San Marco)가 있다.
슈바베허는 텍스투라와 로툰다의 특징을 적절히 섞어 뾰족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선이 적절히 공존, 자유분방한 형태가 특징이다. 슈바베허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대표 서체로는 듀크 드 베리(Duc de Berry)가 있다.
프락투르는 텍스투라와 슈바베허의 중간 그 어딘가라고 말할 수 있다. 굵은 직선이 주는 느낌이 강해 뾰족한 느낌이 들지만 중간중간 적절히 들어간 곡선이 공격적인 느낌을 최소로 줄여 준다. 프락투르는 오늘날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블랙레터 양식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독일의 정통성을 시각언어로 보여주는 서체이기 때문이다. 페트 프락투르(Fet te Fraktur)와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프락투르의 대표적인 서체이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글자이기에 전 세계 많은 맥주 라벨 디자인에 블랙 레터 형태의 서체를 사용하는 듯 보인다.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서구 주요 신문사와 학교 졸업장 같은 공식 문서에 블랙 레터 스타일이 사용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 로고가 있다. 이처럼, 권위와 전통을 강조할 때 가장 적합한 서체 스타일이 바로 블랙 레터가 아닐까 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왔고, 다양한 글자형태로 파생되는 등 유럽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서체 스타일, 블랙 레터. 최근 우리나라도 블랙레터 형식의 한글 서체들이 점점 생겨나는 추세다. 기존의 것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전반적인 역사적 내용을 이해하고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더욱 좋은 결과물을 가져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