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인 폰트 회사인 모노타입(Monotype)에서는 전통적인 폰트의 모던화를 추구하였다. 영국 태생의 조각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에릭 길(Eric Gill)은 1927년에 기존의 존스턴(Johnston) 서체를 이용해 세리프와 산세리프의 장점을 두루 갖춘 ‘길 산스’ 서체를 탄생시켰다.
세리프와 산세리프의 융합
1927년에는 타이포그래피 역사에서 중요한 두 서체가 탄생했다. 두 서체 모두 20세기 모더니즘을 반영하는 산세리프 서체지만, ‘전통성 계승’의 여부는 서로 달랐다. 독일의 푸투라(Futura)는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탄생했다면, 영국의 길 산스는 전통과의 소통을 통해 탄생했다. 길 산스 체는 산세리프의 기하학적인 형태의 기본 골격을 지니고 있지만, 세리프가 갖는 글자의 모양과 비례를 그대로 적용해 디자인한 서체이다. 따라서 길 산스 체는 산세리프의 간결함과 세리프의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일환인 ‘실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리프와 산세리프의 융합’은 사실 에릭 길만의 독창적인 콘셉트가 아니었다. 길 산스는 1910년대 영국 캘리그래피의 명인 에드워드 존스턴(Edward Johnston)이 런던 지하철 사인 시스템을 위해 디자인한 존스턴 서체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다. 본래 조각가였던 에릭 길은 영국 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당시 영향력 있는 교육기관인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 앤 크래프트(Central School of Arts and Crafts)에서 에디워드 존스톤에게 캘리그래피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에릭 길은 존스턴의 산세리프로부터 영감을 받아 자신이 가진 글자에 대한 경험과 감성을 더해 길 산스를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붓으로 그린 듯 우아한 멋을 지닌 ‘길 산스’
길 산스 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디테일에 신경 쓴 부분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손글씨의 모양을 반영하는 소문자 a, g 등의 모양, 획이 만나는 부분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굵기의 변화나 글자폭의 변화 등에서도 전통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길 산스 체를 보면 산세리프체가 흔히 갖는 투박함을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은은한듯 우아한 멋을 풍기고 있다. 소문자 g는 그 대표적인 예인데, 복층 구조의 g를 이어주는 획이 작도처럼 도안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붓으로 그린 모습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소문자 r의 어깨, 소문자 a의 마무리 획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을 살펴볼 수 있고, 대문자 Q의 꼬리는 마치 붓으로 그려 위로 치켜 올린 맛을 느낄 수 있다.
영국의 BBC에서 프리미어리그까지
길 산스는 런던과 북동부 철도회사(LNER: London & North Eastern Railway)의 표준서체로 사용되면서 1929년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기관차의 명찰부터 타임테이블까지 모든 곳에서 길 산스 체를 두루 사용했다. 또한, 1935년 디자이너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에 의하여 펭귄 북 표지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전 세계의 책장에서 길 산스 체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0년대 중반, 영국을 비롯한 유수의 기업에서 길 산스 체를 기업의 서체로 적용하면서, 모노타입사의 ’20세기 50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밖에 1990년대 후반 축구 유니폼에도 디자인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한 이후 각종 서체가 유니폼 속 이름과 백넘버에 적용되었는데,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England Premier League)의 구단에서는 길 산스를 바탕으로 둔 프린팅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길 산스체는 타이포그래퍼 얀 치홀트(Jan Tschichold)를 비롯해 전문가들로부터 20세기 산세리프의 새롭고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평가 받으면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지금까지도 길 산스는 전통을 시대에 맞게 재창조해내는 영국다움의 상징으로 국영방송국 BBC의 로고에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