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남산체(고딕 계열)와 서울한강체(명조 계열)로 구성된 서울시 전용서체는 2008년 7월 15일 공식 발표된 이후 서울시만의 아이덴티티 구축에 큰 몫을 해왔다. 현재 서울시 전용서체는 길거리 안내표지판과 관공서의 문서 작업 등 다방면에 활용되고 있다. 영국의 수도 런던과 해안도시 브리스톨, 프랑스의 수도 파리, 일본의 항구도시 요코하마 등은 서울시보다 앞서 전용서체를 개발해 사용했다. 도시 아이덴티티 확립을 통한 해외 관광객 유치, 시각적으로 일관되고 효과적인 정보 전달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처럼 도시가 전용서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그 도시에 얼굴과 목소리를, 즉 아이덴티티를 부여해준다. ‘얼굴’의 어원이 순우리말 ‘얼꼴’이었던가. 이제는 서울시의 글꼴이자 얼꼴로 자리잡은 서울한강체·서울남산체의 개발 과정을 알아본다.
디자인 콘셉트와 후보안 도출
서울시 전용서체는 서울서체(Seoul Typeface)라고도 한다. 서울서체는 서울시가 ‘세계 디자인 수도로서의 서울’을 목표로 추진한 디자인서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서울시는 2007년 10월 20일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로부터 2010년도 WDC(세계디자인수도, World Design Capital)로 선정된 이후, 색(서울색)·캐릭터(해치)·글씨체(서울서체) 등 3개 분야에 걸친 디자인서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중 서울서체의 과제는 ‘서울의 역사성과 전통성, 문화성, 사회성 등의 심층적 고찰을 바탕으로 보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성을 담아낸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간결한 형태로 여유로운 멋과 편안함을 지니고, 명조체와 고딕체 구조가 통일된 패밀리를 가진 폰트로 태어나야 했다.
이 같은 디자인 콘셉트를 바탕으로 세 가지 후보안들이 제작되었다. 단아한 여백의 아름다움을 담은 ‘비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마음을 담은 ‘열린 마음’, 다양함 속에 유연함과 통일성을 담은 ‘어울림’. 그리고 이들을 놓고 자문위원단과 서울디자인위원회의 검수가 진행되었다.
자문위원들의 의견은 다음 네 가지로 모아졌다.
· 본문용 서체는 정형화된 네모틀 분위기를 유지한다.
· 초성과 종성을 완성도 높게 수정해 ‘비움’을 상징화하고, ‘열린 마음’을 표현한 열린 글꼴 초성의 적용을 확대한다.
· WDC 선정을 대비해 영문서체 디자인의 중요성을 더욱 고려한다.
· 사인(sign)용의 경우 글줄의 지나친 흔들림을 자제한다.
여기에 서울디자인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평가를 덧붙였다.
· 서울서체는 장기간 사용될 것이므로 트렌디한 디자인보다는 보수적인 것이 좋다. 단, 표준안 제작 후 사용 용도에 따라 별도의 디자인을 적용한 서체를 개발할 수도 있다.
· ‘비움’안은 기존 서체들과 차별성이 없으며 명조체와 고딕체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열린 마음’안의 경우 ㅇ과 ㅎ의 열린 부분이 미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어울림’ 안은 공한체와 비교되어 ㄱ과 ㅅ이 불안정해 보이고, ㅎ은 작고 가로획이 시각적으로 불균형해 보인다.
이러한 자문과 평가들에 근거해 ‘비움’, ‘열린 마음’, ‘어울림’ 등 세 개 후보안들은 수정·보완되었으며, 디자인 콘셉트 역시 보다 밀도 있게 조율되었다.
서울시민들이 선택한 서울한강체 & 서울남산체
서울시는 세 가지 후보안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서울시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는 지난 2008년 6월 5일부터 19일까지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서울광장, 신촌 대학가, 혜화동 대학로, 강남 코엑스몰 등 서울 일대 번화가, 디자인서울 홈페이지, 디자인정글, 온한글 사이트가 설문조사의 무대였다.
설문 참여자는 총 10만6,394명(현장설문응답자 7,396명, 인터넷 설문조사 9만8,998명)으로, 이중 38%에 해당하는 4만151명이 지지한 ‘열린 마음’이 마침내 서울시 전용서체로 최종 결정되었다. 서울서체의 이름을 정하는 것도 서울시민들의 몫이었다. 서울붓꼴, 서울한강체, 서울우아체, 서울바탕, 서울 고운글꼴, 서울남산체, 서울명조 등 후보들 중 서울시민들의 선택은 4만270명이 지지한 ‘서울한강체’와 ‘서울남산체’였다.
형태상의 특징
서울서체의 패밀리는 서울한강체 4종(Light, Medium, Bold, Extra Bold), 서울한강 장체 5종(Light, Medium, Bold, Extra Bold,black), 서울남산체 4종(Light, Medium, Bold, Extra Bold), 서울남산 장체 5종(Light, Medium, Bold, Extra Bold,black), 세로쓰기용 1종 등 총 19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니코드 기반의 한글 1만1,172자, 영문은 베이직 라틴(Basic Latin) 94자, KS 심볼 986자, KS 한자 4,888자를 지원한다.
특히 명조체인 서울한강체의 곧고 간결한 획은 청렴한 선비 정신을 디자인 콘셉트로 적용한 것이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모양을 통일하여 고른 회색도를 이루고, 두 획의 굵기 차이도 최소화했다. 시원한 형태감을 위해 모듈의 구조를 단순화했으며, 판독성을 높이고자 글자와 공간의 비례를 비슷하게 했다. 열린 글꼴로 표현된 ㅍ과 ㅎ 등은 개방적이고 친화적인 인상을 상징한다. 영문 서체의 P와 R에도 열린 글꼴이 적용되어 한글 서체와의 연계성을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가독 시 발생하는 눈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획이 시작되는 부분의 돌기와 끝의 삐침을 부드러운 형태로 처리했다. 또한, 글줄의 시각중심선을 상단으로 조정해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의 변별력을 높였으며, 자간이나 단어 사이의 간격을 적정하게 조정했다.
전문가가 본 서울서체
김현미 SADI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교수
빈번히 등장하는 닿자인 이응은 정원에 가깝고, 명조체라 하더라도 가로획은 수평에 세로획은 수직에 가깝다. 기하학적 간결함은 시대를 타지 않는 현대적 미감을 보여준다. 붓글씨의 성격과는 멀어진 현대적 명조체이지만 둥근 돌기나 완만한 맺음, 히읗이나 치읓에 표현된 굵기의 변화 등은 단순함을 단아함으로 승화시킨다.
네모틀을 유지하면서도 민글자와 받침글자 간의 높이 차이가 있고 기존 서체에 비해 닿자의 크기가 작은 편이어서 서울서체는 여백을 가진다. ‘열린 마음’을 표현하고자 고안된 히읗과 피읖의 열린 구조는 안과 밖의 공간을 연결하여 더욱 지면의 흰 공간을 드러내는 효과를 준다.
이렇듯 가볍고 밝은 시각적 특성을 보여주는 서울시 서체 패밀리는 글자 형태와 구조에 있어서 명조체와 고딕체의 연관성이 높아 조화를 이루는 반면 서로간의 간극은 가까워 보인다. 명조체는 기존의 명조에 비해 간결하고 직선적이며 고딕체는 명조체와 형태, 구조 등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고딕에 비해서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본문용 서체로서의 서울서체는 기존의 명조체, 고딕체와 구별되는데 서울명조체는 로만 서체 패밀리가 가지는 세미세리프(semi-serif)적인 특성을, 서울고딕체는 세리프적 특성을 산세리프의 구조에 흡수하여 보여주는 휴머니스트 산세리프(Humanist sans serif)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명조와 고딕이라는 본문용 한글 서체의 발달된 두 서체군 사이를 짚어주는 서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강현주 인하대 시각정보디자인전공 교수
서울시가 서울만의 고유글꼴을 개발하여 도시정체성과 브랜드가치를 높이고자 한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의 의의와 중요성에 비해 개발기간이 너무 짧고 예산도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 학술연구용역이 선행되기는 했으나 충분한 사전조사와 기획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서체를 개발해 곧바로 폭넓은 매체에 적용시키는 것은 아니냐는 점 등 때문에 사업 초창기에는 디자인계 일각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서체개발 총책임을 맡았던 편석훈 윤디자인연구소 대표는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 프로젝트에 일반적으로 투입하는 것보다 3배나 많은 인원과 시간을 쏟아 부었으며, 비용이나 실적보다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사명감으로 많은 애정과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덕분에 서울서체의 1차 개발이 잘 마무리되어 발표된 것은 디자인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일련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번 서울서체 개발 역시 한국사회와 한국 디자인 관행의 악덕과 미덕, 한계와 가능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세기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하면 된다’와 ‘불가능은 없다’라는 소신이 21세기에 진행된 청계천 복원사업까지 이어졌다면, 서울서체 개발 역시 같은 경우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서울시장 임기 시절을 술회한『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에서 청계천 복원사업을 단 27개월 만에 끝내며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건설한 도로로 손꼽히지만 공사구간을 몇 군데로 더 나눴더라면 기간을 훨씬 더 단축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시민단체와의 공청회에서 “청계천 복원공사에 걸리는 시간은 2년이면 충분하다. 한 회사가 하는 데 6년이 걸리면 두 회사가 하면 3년, 세 회사가 하면 2년밖에 안 걸린다”고 했고, 완공 후에는 “기간은 마음만 먹으면 더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서체의 경우 3배의 인원을 투입하고 작업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을 통해 기간 내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서체개발과 같은 디자인 작업에서 경부고속도로나 청계천 공사에서처럼 구간을 끊거나 참여회사 수를 늘리는 방법을 통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가와, 설령 그러한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이 서체의 질적 수준에 미치는 영향은 없느냐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작업방식의 선택이 동종업계 및 후속 디자이너 세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 지도 짚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의 디자인 조건에 대한 현실인식과 철학적 가치판단의 차이에서 제기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