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있는 작은 출판사 '사월의눈'은 사진책만 펴내는 곳이다. 운영자인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과 북 디자이너 정재완 부부는 '사진-텍스트-디자인'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이 두 사람에게 출판은 사진과 텍스트 그리고 디자인 간의 관계를 질문하는 실천적 장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2013년 첫 책 <사이에서>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5권의 사진책을 만들어온 사월의눈. 오롯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한 탐구와 실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전가경, 정재완을 만나본다.
이름이 참 예뻐요. ‘사월의눈’에 대한 소개를 해주세요.
2012년 여름에 등록한 것으로 기억해요. ‘사월의눈’이라는 출판사명으로 정재완 씨와 ‘적극’ 합의를 본 끝에 오랜 시간 원했던 사진책 출판사를 등록할 수 있었죠. 이름의 배경에 많은 분이 물어오시는데, 풍경을 말했을 뿐이에요. 2012년 4월 1일,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서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순간 ‘사월의눈’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심오한 의미 보다는 단어의 어감이 좋아서 선택하게 되었는데, 디스토피아적 전망도 밑바탕에 살짝 깔 수 있어서 좋았다고 보았어요.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장밋빛 그림보다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뜻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계기는 전가경의 연구 주제였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했던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으로 독일의 1960년대 청년 잡지 <트웬(twen)>의 사진디자인을 연구하게 되었어요. 아트디렉터 빌리 플렉하우스(Willy Fleckhaus)의 사진 운영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무척 흥미롭게 공부했죠. 타이포그래피보다는, 사진과 그래픽 디자인 간의 접점에 관심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사 졸업 후 2006년도부터 일하게 된 AGI Society라는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출판 팀장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운 좋게도 맡게 된 책들이 모두 이미지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림책과 사진책을 만들게 된 것이죠. 그때 제가 잘할 수 있고, 파고들 수 있는 디자인 분야이자,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주제가 ‘사진-텍스트(글)-디자인’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월의눈은 이러한 몇 가지 경험과 그로부터 파생된 생각들의 연장선이에요. ‘사진-텍스트-디자인’이라는 주제를 이론이 아닌, 실천적 행위로 풀어내고자 하는 활동입니다.
출판사라면 분명 수익도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사진책은 많은 사람이 찾을 것 같진 않아요. 혹시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없으셨나요?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진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 책이 안 팔리는 ‘장르’이자 제작비 많이 드는 사양의 책임은 사월의눈의 첫 책을 만들면서 아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만약 이 현실을 알았더라면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간혹 지식은 좋은 의미의 사고를 그르치기도 해요. 이 말은 애초부터 수익은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다는 겁니다. 어차피 수익을 염두에 두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모양새의 책은 만들지 못하죠. 당연히, 겨냥하는 ‘시장’은 기존의 상업출판 시장이 아니었어요. 그 시장에서 나오는 여행 사진 곁들인 감성적인 여행 에세이들은 오래전부터 따분하게 느껴 졌죠. 게다가 사진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낮은 사진책을 보면 허망한 경우도 많았어요. 일본의 경우, 다종다양한 사진책들이 출판되죠. 호화본부터 시작하여 문고판의 사진책까지 사진을 책으로 소비하고 감상하는 경로가 훨씬 다채롭습니다. 사진책에 대한 인식이 국내에서는 이분법적이었다는 문제의식이 작용한 셈이죠. 보통 사진책은 작품집의 한 양태로서 고급스러운 책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늘의 사진의 ‘민주적’ 위상과는 상반되는 인식이에요. 사진책의 완성도는 높아지되, 소비의 경로는 다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에 대한 인식 또한 기존의 정통 사진계 중심의 ‘작품으로서의 사진’ 관념에서 ‘편재하는 이미지로서의 사진’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 그래픽 디자인이 중요한 키를 쥐고 있어요. 사진과 글을 주선하는 행위가 디자인이에요. 사진과 글이 어떻게 주선되는가에 따라 같은 사진도 다르게 전달되고요. 디자인이 매우 수동적인 서비스 행위로 인식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사진(또는 이미지)과 글(또는 텍스트)을 ‘주무르는’ 방식에 따라 전달하는 의사가 달라지게 마련이거든요. 저는 이 점을 더 깊게 파고들고 싶었고, 이 주제를 실천할 수 있는 플랫폼이 바로 사진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실험’을 감행할 순 없기 때문에, 책마다 약간씩의 수위를 두고자 합니다. 여행사진이라는 장르는 매우 고전적인 장르잖아요. 하지만 이 장르도 어떤 판형에 어떤 종이, 앞뒤에 놓인 조형적 맥락이 어떻게 제시되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속내가 달라지죠. 사진의 중요성은 이미 20세기 초반 서구의 모더니스트들이 인식했어요. 그때부터 얀 치홀트나 엘 리시츠키 같은 인물들은 그래픽 디자인의 ‘새로운’ 언어로 사진을 수용했고요. 이후 진행되는 사진과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는 매우 흥미진진하지만, 이곳에 모두 나열할 순 없을 테고요! 아무튼, 100여 년 넘는 그 교유가 실질적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받은 디자인 교육은 대부분 타이포그래피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장르지만, 이미 도처에 이미지들이 깔린 걸 보면, 타이포그래피만큼이나 대등한 그래픽 요소로 봐야 하는 것이 사진, 곧 이미지라고 봅니다.
최근 몰두하고 있는 작업이나 관심사가 있다면요?
앞서 열거한 주제를 구체적인 출판행위로 어떻게 집약시켜 표출해 나가는가가 계속 몰두하는 관심사입니다. 사월의눈에서 내는 사진책은 정통 사진 장르에서 논하는 사진을 인쇄하기도 하지만, ‘그 밖의 사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요. 표면적으로는 ‘사진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각 권에는 이러한 ‘사진-텍스트-디자인’에 대한 세부 주제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가령, 올 상반기 안으로 발행하고자 하는 <아파트 레터링>(가제)의 경우,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시각문화에 관한 사진책이 될 예정입니다. 두세 편의 글이 실릴 예정이고요. 사진은 정재완 씨와 제가 직접 촬영했습니다. 초기에는 사진 촬영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저희가 전문 사진가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사진의 조형적 완성도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콜렉팅을 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였기 때문에 특정 사진가에게 이 수집의 역할을 위임할 순 없었어요. 결국, 내부에서 이야기된 바로는, 어차피 사진이 전문 사진가의 촬영과 인화로만 끝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인 ‘후속’ 작업을 통해 사진을 만들어 보자고 결론 냈습니다. 후속 작업이란 크로핑, 트리밍, 채도, 온도 등 사진에 여러 디지털 ‘후가공’을 적용하는 것이죠. 이때 사진 못 찍는 일반인도 사진을 잘 만드는 새로운 유형의 사진가가 될 수 있다고 봐요. 기존의 포스트-프로덕션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것이죠. 막상 결과물이 어떨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사진책이 전문 사진가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계속 발설하고 싶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자신의 개인 언어로 이용하고, 이를 통해 책을 만들고 표현하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책을 만들고자 할 때, 같이 작업할 사진이나 사진작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요?
특별한 기준은 없는데, 그때그때 관심사에 따라 사진가나 협업자를 찾게 되죠. 가급적 정통 장르의 사진가보다는 장르 사이의 경계에서 움직이는 분들을 찾아보려고 해요. ‘사진은 ~이다’라는 정의론자(?)와는 협업이 힘들 것 같아요. 저희는 그걸 계속 깨부수고 싶으니까요. 아직은 친밀도가 중요하게 작용해요. 그리고 다루는 주제. 최소 6개월 이상을 긴밀하게 협업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소통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죠.
특히 기억에 남는 책 작업이 있었다면 그 이유와 함께 말씀해주세요.
저희에겐 지금까지 나온 다섯 권의 모든 책이 소중합니다. 첫 책인 <사이에서>는 디자이너 강태영 씨의 사진책인데, 그분의 동의와 협업이 없었더라면 사월의눈의 첫발을 떼지 못했어요. 여행사진의 스토리텔링을 갖고 오랜 시간 고민했고, 사진에 관한 글도 쓰고, 반 헥 브릴리안타라는 네덜란드의 클로스 브랜드도 알게 되었던, 조금은 불안하지만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박연주 디자이너의 추천으로 알게 된 문성인쇄와의 제작 협업은 우리의 디자인을 구체화하고 책의 물성을 실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었어요. 시인이자 사진가인 신현림의 <사과 여행>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위스 그래픽 디자이너 요스트 호훌리(Jost Hochuli)가 디자인한 튀포트론(Typotron) 책자의 포맷을 가져와 적용해 보았던 책이었어요. 손승현 사진가의 <밝은 그늘>은 작가분이 마련해 주신 넉넉한 기금으로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신나는 작업이었고, <마생>은 바다 건너 소통이 매우 힘들었지만 사월의눈에게 초판이 완판되는 진기한 경험을 안겨준 책이고요. <빈방에 서다>는 전시와 책이 동시에 진행됨으로써 두 ‘매체’ 간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제본 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었던 작업이었습니다. 매 순간이 특별합니다.
정재완 선생님이 생각하는 북디자인은 어떤 것인가요?
정재완: 책을 디자인하면서 몇 가지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1. 되도록 가벼운 책. 2. 편하게 열리는(펼쳐지는) 책. 3. 글자와 이미지가 선명하고 또렷한 책.(특히 검정 글자) 4. 오랜 시간 견고한 책. 5. 디자인이 유행 타지 않는 책. 6. 내용과 부합하는 크기를 갖춘 책. 7. 본문 조판이 짜임새 있는 책. 8. 재료(종이/클로스/가늠끈 등)가 좋은 책. 그러나 너무 비싸지 않은 책. 9. 저자, 편집자, 제작자 등과 협업 과정이 즐거운 책. 10. 내가 갖고 싶은 책. 11. 디자인이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책. 등등인데요,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책으로 만들어지는 게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전가경 선생님은 (물론 글 잘 쓰셔서 그렇겠지만) 디자인 전공을 하고 저술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처음으로 발표한 글은 무엇이었나요?
먼저 저는 제가 특별히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을 전공하다 디자인계로 오니 상대적으로 그런 점이 부각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는 글을 워낙 잘 쓰시는 동료들과 지인들이 있어서 당당하게 글발을 자랑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본래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었어요. 학부와 다른 대학원에서는 오랜 시간 방황하면서 문학을 전공했고요. 그런데 미술에 대한 꿈을 놓지 못해 20대 후반 뒤늦게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때 들어간 학교에서는 저를 자꾸 연구자나 저술가로 자리매김하도록 부추기더군요. 본래는 북 디자인을 하고 싶었는데요, 안상수 그리고 정병규 선생님의 공동 지도하에 석사 논문을 쓴 후, 안상수 선생님께서 저에게 안그라픽스에서 책을 내보라고 제안해 주셨어요. 그 결과가 2009년도에 나온 저의 첫 저술서인 <세계의 아트디렉터 10>이죠. 사실상 그 책이 지금까지 글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줬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선 안상수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전가경 선생님은 디자인도 하시는 거로 알고 있어요. 정재완 선생님과 같이 디자인을 하실 땐 어떤 프로세스로 일하시나요?
애초 디자인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북 디자이너가 꿈이었기 때문에 글을 쓰되 어떻게든 책을 만들어 보자는 욕심과 포부가 있었어요.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저는 디자인은 실무가 무엇보다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 어떤 다른 분야보다 실무에 대한 감각이 생명력이라고 보아요. 그런데 이때 실무에서 편집을 하느냐, 실제 마이크로-/매크로 타이포그래피를 세부적으로 조절하는 디자이너로 일하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사진책에서는요. 판권 면에 편집과 디자인을 굳이 분리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사진책에서는 이미지의 서사와 배열을 결정하는 사진편집이 절대적인데, 이 편집은 디자인과 함께 굴러가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분리된 행위가 아니거든요. 아마도 글 중심의 단행본에서는 성격이 다를 순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지 중심의 책에서는 편집과 디자인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굴러가요. 솔직히 말해 제가 하는 것이 편집인지, 디자인이지 이름 붙이기 애매합니다. 제가 보통 하는 역할은 책의 전체적인 콘셉트를 정하고, 사진을 배열하는 것이죠. 그러면 정재완 씨가 그에 맞는 디테일한 타이포그래피적 기술을 적용해요. 가령, 제가 이런 느낌의 책 꼴이면 좋겠다고 말하면, 정재완 씨는 구체적인 판형을 갖고 나옵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글과 사진이 배치되면 좋겠다고 하면, 정재완 씨가 그에 맞는 본문 조판을 제공해 주고요. ‘편집 디자인’이라는 말이 그런 점에서 많은 함의가 있어요. 좋은 디자인은 탄탄한 편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두 역할을 동시적으로 해내는 ‘편집자연 디자이너’, ‘디자이너연 편집자’가 있다면 앞으로의 디자인 생태계에서 더 유리한 고지에 서있다고 봐요.
두 분이 함께 일할 때, 어떤 시너지가 생기는지 궁금해요. 반대로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전가경: 제 석사 논문 디자인을 정재완 씨가 해줬거든요. (안상수 선생님 지도 밑에서는 학교 제출용 논문 외에 별도의 논문 한 권을 더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때 이미 호흡이 잘 맞는다는 걸 제대로 느꼈습니다. 좀 웃기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아직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정재완: 사월의눈에서 전가경 씨와 일하기 시작하면서, 북 디자인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어요. 이전까지는 사진을 보고, 디자인하고, 인쇄하는 일은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했어요. 또 책 한 권을 기획하고 만들고 유통하는 출판 전반에 관여하다 보니 책에 대한 관점도 보다 풍부해진 것 같아요. 어떤 매너리즘의 동굴에서 빠져나왔다는 생각도 들어요.
두 분은 정병규 선생님 제자이기도 하시잖아요. 두 분께 선생님은 어떤 존재이셨나요?
전가경: 북 디자인에 입문하려고 할 무렵, 기웃거리던 스튜디오가 스튜디오 바프(이나미 대표)였어요. 그 당시로써는 매우 독특한 북 디자인을 전개했던 진보적 스튜디오였죠. 그때 용기를 내서 대표님께 메일을 보냈어요. 북 디자인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고. 이나미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정병규 북 디자이너라는 분이 신촌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북 디자인 강좌를 진행하고 있으니, 이를 듣는 게 도움이 될 거란 말씀을 주셨지요. 절실했던 만큼 바로 등록했죠. 그리고 정병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2002년도인가, 2003년도로 기억해요. 선생님께서는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 규율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이해와 지식도 강조하셨어요. 이상하게 타이포그래피 이야기 보다는, 이미지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지요. 이후 별도의 스터디 모임을 통해 롤랑 바르트, 수잔 손탁의 저술서를 공부했습니다. 정병규 선생님께서 “디자이너라면 이 정도 사진 이론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지 않겠냐.”라고 반농담으로 말씀하셨는데, 그때의 공부가 지금의 제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추천해 주셨던 존 네이피어의 <손의 신비>나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 마리타 스터켄과 리사 카트라이트의 같은 책들은 그래픽 디자인을 근현대사, 매체학, 시각문화연구라는 보다 광범위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 줬습니다. 저에겐 언제나 이론적 토대를 다져주시는 선생님이십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원 수업 보다는 정병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야사’의 디자인 공부가 제대로 된 ‘진한’ 공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공부공동체는 일종의 ‘야학’이었어요. 한국의 만연한 학연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편집자와 디자이너,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뒤섞여 있고, 학생과 실무자가 어울려 있는, 참 불균질한, 비제도적 공부공동체였어요. 제 디자인 공부는 거기서 시작하고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재완: 학부 3학년 편집 디자인 수업 때, 선생님께서 벤야민과 플루서의 책을 들고 수업하시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당시에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게 근사해 보였어요. 졸업 후 제가 정디자인에 다닐 때, 선생님 서재에는 사방 높은 벽면에 책이 빼곡히 차 있었어요. 말하자면 디자인 도서관이었어요. 그 후로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뵈는 선생님 가방은 책과 필기노트가 한 짐이에요. 늘 그동안 보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메모하며 행복해하십니다. 건강 때문에 시력이 약해지기도 하셨지만, 여전히 읽고, 쓰고, 작업하는 현역 디자이너이십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채찍’이에요.
책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것 외에 디자인 관련하여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전가경: 현재는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떻게든 이 논문을 어서 끝내서 사월의눈 활동에 더 중점을 두고 싶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연구 기반의 전시를 기획해 보고 싶어요. 지금은 박사논문이 모든 활동을 가로 막고 있어서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만, 작고 소박하지만,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 역사와 아카이빙을 현대적으로 풀이한 전시 기획을 시도해 보고 싶어요. 현재 한국 디자인 씬에서 필요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끝으로 한 말씀 해주세요.
여러 단계의 최종 목표가 있겠죠. 준비 중인 <정병규 사진책>(가제)을 올 하반기 혹은 내년 상반기에 내는 것이고요. 워낙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좀 힘들긴 하지만 끝내야죠. 한국 시각 디자인사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반기에 <아파트 레터링>(가제) 발행하고요. 건강하게 하고픈 일 하면서 살고 싶어요. 사월의눈 통해서 발설하고 싶은 ‘사진-텍스트-디자인’ 소주제들이 50종 내외의 여러 갈래로 나오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