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먼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목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중에서 파주에 들어서는 순간 둥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하루키에게 들렸던, 그가 신발끈을 다시 매고 먼 여행을 떠나게 만들었던 그 먼 북소리는 아니었다. 사랑과 모험과 열정이 오롯이 담긴 책들이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소리였다. 글. 인현진
(위)출판사 부스 / 파주북어워드 전시 (아래) 파주출판단지 모형
파주는 도시 자체가 펼쳐진 책과 같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행간처럼 펼쳐진 길을 따라 걷다가 노천카페에 앉아 뜨거운 카페라떼를 천천히 마시고 싶어진다. 가을이면 이곳에 북소리가 울린다. 2011년에 첫 소리를 울린 파주 북소리는 다양한 전시와 심포지엄, 강좌, 공연 등이 열리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북 페스티벌이다.
전시가 주로 열리는 곳은 파주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출판단지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이 건물은 2004년 제14회 김수근 건축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변 자연과의 조화가 아름답고 시간이 지날수록 멋지게 녹슬어가는 건물의 외양도 근사하지만 구석구석 사진을 찍기에도 좋은 곳이 많다. 들어가는 길엔 시화전이 한창이었다.
<한글 나들이 569>(다목적 홀, 2012. 9. 15~10. 9.)는 파주 북소리 2012의 대표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의 한글 관계 전시 가운데 가장 많은 자료를 선보이고 있다. 입구인 ‘들어섬’에서 출구인 ‘나섬’까지 열림, 울림, 어울림 세 공간으로 나눠 각각 다른 체험을 하게 한 섬세한 동선 배려가 돋보인다. 버선발로 사박사박 걷는 듯 한글 속에 푹 빠지는 시간.
<추억의 그 잡지>(이벤트 홀, 2012. 9. 15~9. 23.)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잡지 가운데 1896~1990년대까지의 간행물과 희귀본을 모은 특별전이다. 종이로 만든 테이블과 코끼리를 보는 재미는 덤. 9월 25일부터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1층에서도 전시중이다.
문자가 있기 전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표현했을까?
<Asia Asia>(책마을 전시장, 2012. 9. 15~9. 23.)는 아시아 8개국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다. 다양한 전통문양 속에는 최첨단 현대미술의 정신과 맞닿는 지점이 보인다. 아시아의 정체성과 소통을 생각해보며 하나하나 음미해볼 만하다.
이번 전시 중 가장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단연 <호주 우수 어린이책 일러스트전>(갤러리 지지향, 2012. 9. 15~9. 23.)이 아닐까 싶다. 2012년 볼로냐 아동 도서전(Bologna Children Book Fair)에 출품되었던 32점의 호주 대표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11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일러스트레이터 숀 탠(Shaun Tan)의 ‘The Lost Thing’도 볼 수 있다. 보자마자 탄성이 나올 정도로 깜찍하고 환상 가득한 작품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했다.
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책은 늘 힘이 되었다. 어떤 날은 꺾인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어떤 날은 무력한 어깨에 죽비를 쳐주고, 또 어떤 날은 조용히 그저 옆에 머물러주었다. 어떤 방해물도 없이 하늘은 하늘로, 나무는 나무로, 책은 책으로 존재하는 파주에서, 내년에도 새롭게 울릴 북소리를 기대해본다.
파주북소리 2012
행사 기간 : 2012.9.15 – 9.23
홈페이지: http://www.pajubookso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