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로망과 현실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가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느끼는 것에는 괴리도 있을 터. 좀 더 현실에 밀착한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다양한 이력의 경험을 내려두고 세종문화회관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인생의 국면에 도전하고 있는 원승락 디자이너를 만났다.
최근 하고 있는 작업 이야기 좀 들려 달라.
서울시극단의 함익 관련 작업과 서비스플라자의 사이니지 디자인 등을 끝냈다. 여기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단기간에 많은 양의 일을 한 것 같다(웃음). 공연에 관련된 포스터뿐 아니라 매우 다양하고 소소한 일들도 가급적 많이 하려고 한다.
세종문화회관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결심의 이유는 무엇인가. 시행착오는 없었나?
이전 직장에서 재정적인 부분이 만족스럽게 채워졌지만 그래픽 디자이너가 가질 수 있는 성취감을 거의 가질 수가 없었다. 거창하게 스튜디오를 벌릴 용기도 나지 않았고. 곧 더 이상 젊은 디자이너라고 하기에는 나이도 차고 욕심이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알 수 있는 임계점에 도달한 걸 은연중에 느끼고 두려웠다. 어떤 전환점이 필요했다. (당연히 나인투식스의 로망도 작용했지만) 모든 직장인이 그렇겠지만, 특히 디자이너의 에고는 자신의 직업(작업)을 통해 자아실현 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단 한 달에 불과하더라도 변화가 필요했다. 물론 막상 겪어보니 생각과는 다른 점이 있고, 디자인 회사와 조직 구성이나 운영이 다르다 보니 적응하는 과정에서 힘든 일도 많았다. 이곳에 언제까지 머무를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결심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트디렉터였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생활을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려운 점이나 특별히 달라진 점은 무엇이었나,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디렉션을 주로 하다가 여기에선 직접 ‘누끼’를 따고 있을 때…(웃음). 더 이상 기초적인 걸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배우면서 일한다. 각성도 되고, 관점도 넓어지고, 특히 손이 엄청 빨라졌다(웃음). 매우 흥미로운 지점인데 신입사원이되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기분마저 느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전의 직장은 디자인의 직무에 최적화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회관은 공연이 중심이다 보니 적응하는데 시행착오가 꽤 있었다.
그는 매우 솔직하다. 자신이나 자신이 하는 일을 포장하려는 태도 없이 덤덤하게 자신이 처한 현실과 한계를 정확하게 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종문화회관 디자이너로서 스튜디오 올드 타입(홈페이지)의 대표로서 항상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세종문화회관은 어떤 곳인가?
일단 구성원들의 층위가 매우 다양하다. 일반 사무직 직원들과 아티스트들이 공존하고 예술단조차도 하나의 단일한 장르가 아니고 무려 9개의 단체가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다양한 단체가 함께 소속되어있는 극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9개의 단체는 9개의 취향과 자존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요소가 디자인에도 이어진다고 봐야 한다. 이런 구조적인 상수가 매우 독특한 문화와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내부에서 바라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들이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지만 세종문화회관은 서울 그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가지 모순적이고 상충되는 가치가 공존하면서도 무언가 계속 움직이고 있는.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가 말했듯이 정박해서 배를 고쳐야만 더 안정적이지만 항해를 멈출 수 없는 항해 중에 계속 갑판을 고치는 존재라고 할까. 아티스트들의 예술성과 대중성이 갈등하고 그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런 정반합의 총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한 바대로 9개 장르의 단체인데 소통과 조율에 어려움을 느낄 법도 한데 어떻게 해결하는가?
자세히 듣고 싶다. 우선 9개 단체에 관련된 디자인 업무를 내가 전부 소화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아직 어려움은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의 90% 담당자들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취향을 설득해서 바꾸는 건 기본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얘기한 바대로 취향은 살아온 삶의 궤적과 다를 바 없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어떤 문화를 소화했는지 어떤 취향이 학습되어있는지를 한 번의 작업으로 설득하기는 좀 낭만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실제적인 프로세스로 말하자면 시안을 많이 만들어서 보여준다. 당연히 지나치게 많은 시안을 보여주는 거에 대한 단점이 있지만 처음 보이는 시안 중에 어떤 것도 의뢰한 쪽에서 흥미를 못 느낄 때 기가 많이 꺽이는 편이다. 처음에 선택의 다양성을 만들어두는 게 나의 경우에는 훨씬 편하다. 아쉬운 대로 작업이 좁혀지면 발전시키는 게 새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건 사실이다.
디자인의 결과물만 보고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실제로 작업과 관련해선 개인의 취향보다 더 중요한 건 안목과 수준인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관 주도의 굵직한 디자인 프로젝트에 대해 세간에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담당 디자이너나 최고 결정권자들의 취향이 별로여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 안에 수많은 프로세스가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이 항상 일어나니까. 다만 취향과 클래스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취향은 존중하되 그 취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공연관람을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로 시작했다면 거기에서 기준점이 생기듯이, 어떤 수준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햄릿이나 시즌 오프닝 포스터 등 타이포그래피 사용이 인상적이다.
내가 좋아하고 편하게(손쉽게) 작업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래픽 툴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작업방식을 선택할 때 디테일하게 손이 많이 가는 것보다 심플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타이포그래피를 포함해 클래식한(교과서적인) 디자인에 대한 로망이 있다. 인터내셔널스타일이나 스위스스타일 따위의 스테레오 타입이 보여주는 정제미랄까, 구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효율적인 것 같다.
그는 가볍게 이야기하고 유쾌하게 웃는다. 그러나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안에는 그동안 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했을 고민과 생각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녹록지 않았을 삶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온 자만이 갖는 자기 목소리가 있다. 남의 말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현재 지금 가장 고민하는 점은 어떤 건가?
뜻하지 않게 잠깐 디자인잡지 기자도 하고 디자인 스튜디오의 전시 큐레이터도 해보고 급기야는 디자인 매거진의의 아트디렉터 등을 경험하면서 수많은 디자이너를 만났다. 매체에 노출되는 모습의 이면을 부단히도 지켜봤다. 업계에 대한 환멸, 피로감, 두려움 같은 걸 목격하면서 디자이너에 대한 한계와 매너리즘도 빨리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한 줌도 안되는 내 잔재주가 언제쯤 유효기간이 끝날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나의 취향을 누구도 원하지 않을 무렵에 내가 어떤 포지셔닝으로 성취감과 생존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한다.
당신 스스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지인’이라는 말을 했다. 어떤 의미인가?
그 수사는 아내가 붙여준 별명이다. 적확히 표현하자면 한국을 대표할만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지인이라고 해두고 싶다. 언제나 그렇지만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훌륭한 디자이너들과 인연이 있다고 우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에 바람직한 미덕이 아닌가 싶다.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분들과 같이 나도 함께 묻어가고 싶다.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들과 교류하면서 나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작업을 흉내 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말해야 할 것 같은데(웃음). 어쩌면 세종문화회관의 위상에 걸맞은 한국을 대표할만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의 링크가 되기에 적절한 별명이 아닐까 싶다.
디자인의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디자인은 디자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의 가치에 잠재되어있는 암묵적인 프로파간다 이를테면 디자인이 모든 걸 변화시킨다는 식의 수사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열쇠 수리공이 수리를 잘하고 싶어 기술을 연마하면서 열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스스로에겐 아름답고 행복한 생각일 수 있겠지만…. 후배에게 그걸 말하는 순간 열등감 내지는 교조가 돼버리는 것 같다. 디자인이란 업계의 생리. 말하자면 현실적인 급여나 대우, 향후 전망 등이 상당 부분 게토화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후배들에게 디자인이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신념을 주입하는 선배들이 여전히 있는 것 같다. 디자인의 가치는 좋은 작업에서 비롯된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현실을 보지 않으면 맹목적이 될 수 있겠다. 물론이다. 디자인의 비전이나 디자이너의 소명에 대한 미담은 전적으로 반대하진 않지만, 그것이 표현되는 수사가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게 분명 녹록지 않으니, 아무래도 운위할만한 기제가 작동한 탓도 있고 가시적인 아웃풋을 뽑아내기 좋은 분야인 탓도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디자인 용역비의 공허함을 경험해보지 않은 분들의 아젠다로 디자인이 소환되는데 비극이 시작되는 것 같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았나?
휴가?(웃음). 디자인 외에 상황들, 시스템, 내가 이런 식으로 시도해봐야겠구나, 이런 점들을 느낀 것이랄까. 어떤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디자이너로서 가질 수 있는 작업에 대한 욕심과 회관의 필요가 일치하는 여러 가지 접점들 그런 것들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은 어떤 예술단의 공연 연습을 보고 매우 프로페셔널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공연을 ‘performing art’라고 명명하는지 알 수 있었다. 궁극의 몰입상태가 단지 공연하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도 도달하게 한다는 걸 직접 경험한 것이 나에겐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 순간엔 어떤 아티스트들의 오만 혹은 아집 등에 대해 왜 그리 세상이 관대한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