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적 사고를 표현하는 기본 수단인 언어는 한 마디로 ‘인간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초창기의 몸짓과 소리는 인간 본연의 구체적․ 신체적인 발현이자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었다. 그 뒤 음성언어는 소리라는 공명을 통해 내적인 감정과 사유 내용을 드러내는 가운데 화자와 청자 사이에 밀접한 상호작용을 낳으며 발전해 왔다.
음성언어, 문자언어, 그리고 인쇄술
인류 역사상 가장 견고하고 공적인 언어수단으로 인정받는 문자는, 음성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발명된 것으로 인간의 사유방식 자체를 변화시켰으며 사회문화적인 변모까지 가져왔다. 문자언어의 발전을 통한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는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변화가 현재의 디지털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구술문화의 음성언어는 화자의 감성이 담긴 미디어라는 점에서 통감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미디어로서의 음성언어는,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설명하듯, “오감의 통합적 사용을 통해 온전한 지각이 유기적으로 사용되는 신체 본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기록의 수단으로 등장한 문자는, 음성에 감정과 내면의 상태까지 담아 유연하게 전달했던 구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달리 추상적인 개념에 기반을 둔 이성과 논리 그리고 과학적인 사회문화를 발전시켰다(그러나 문자의 발명 이후에도 인류는 구술언어의 특성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의 항상성을 유지시키는 기반으로 음성언어의 유기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을 사용해 왔다). 문자의 발전을 가속화한 인쇄술은 표준화, 획일화, 균질성이라는 문자 문화의 특성들을 드러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인 창조력에 기반을 둔 문자의 시각화를 낳기도 했다.
인쇄술의 또 다른 영향은 문자언어를 사물로 인식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인쇄술은 활자 한 자 한 자를 별개의 사물로 인식하고 이를 인쇄라는 대량생산과정을 통해 전체적인 텍스트의 조합을 완성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쇄는 활자를 분절, 해체 그리고 조합이 가능한 독립된 개체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음성언어의 감성까지 담아내는 타이포그래피
시각디자인에서의 활자인쇄술이라는 뜻을 가진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는 단어의 출현은, 문자를 시각적으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재료로 인식하고 이를 통한 다양한 시각활동을 예고하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나아가 이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은 문자의 이미지로서의 역할에만 천착하지 않고, 구술문화에서의 화자의 음성에 담긴 감성과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구술문화에서는 침묵 역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요소로 작용한다. 이 같은 비언어를 통한 언어의 의미화 작용은 문자의 시각화 현상을 연구한 실험과 시도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지면의 빈 여백이나 혹은 시각화된 문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은, 문자와 동일한 비중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이미지화된 문자는 텍스트성으로 대변되는 고유의 의미 이외에 시각적 이미지가 가진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전달함으로써 의미의 다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언어의 시각화 작업은 음성언어를 통한 감성의 자연스런 표출 혹은 감정의 변화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고정된 의미의 텍스트와 전통적인 글쓰기가 상정하는 엄격함에서 벗어난 공감각적인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문자의 시각화 양상은 디지털 기술의 도래로 인해 보다 급격하고 다양하게 변모했다. 인쇄술이 활자를 사물로 보게 한 최초의 기술이었다면, 디지털 기술은 문자를 음소단위 이상으로 해체하고 분절하며 자유롭게 재조합함으로써 가변성을 통한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보여 준 ‘혁신’이었다. ‘Type as image’라는 새로운 분야가 시각디자인 분야에서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 잡은 20세기 말에는 문자의 새로운 정체성 확보와 관련한 일련의 연구와 실험들이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해체와 재조합이 용이하다고 보이는 알파벳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시도들은 시각디자인, 특히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새로운 담론으로 등장했다.
반면, 사각형의 틀 안에 자음과 모음이 모여 하나의 글자가 되고 단어를 이루는 한글은, 글자의 활용이나 한글 자체에 대한 인식론적 관념에 집착해 텍스트성 이외의 감성과 감정을 담은 문자언어로서의 실험이 지체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외형이나 그 창조원리의 측면에서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보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실험이 가능한 대상이다. 탈네모꼴이라는 안상수의 한글체와 그 일련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시도는 한글의 탈텍스트성을 선도해가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최근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자유롭게 분절시키고 해체하며 자의적으로 재조합해 자신들의 작업에 중요한 시각적 질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시각화된 문자언어의 의미화 과정이다. 단지 디지털 기술에 의한 가변적인 시각요소로서뿐 아니라 화자의 감성과 구술문화에서의 공감각적인 언어로 새롭게 창조되는 의미화 과정이 덧붙여질 때, 문자언어의 시각화 작업은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양상으로 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다.
시간성과 움직임을 더한 새로운 언어와 한글
언어로서의 문자가 지닌 텍스트성과 시각 이미지로서의 문자가 지닌 매체적인 특성의 융합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의해 또 다시 혁신적인 변모를 보여준다.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4차원의 시간성과 문자언어와 시각이미지 그리고 모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무빙타이포그래피가 그것이다. 문자발명 이전의 구술문화시대의 음성언어는 인간의 정신작용을 보여주는 본능적인 언어였으나, 문자는 논리성과 객관성을 내세우며 감각과 사고의 편향을 낳았다. 그런데 무빙타이포그래피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구술언어와 문자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균형의 언어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무빙타이포그래피의 시간성과 이를 통한 움직임(모션)이라는 요소는 화자의 감성과 감정을 한층 역동적으로 전달하는 역량을 가진 특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사회의 특징인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이해와 소통 그리고 보다 감성적인 접근을 부르짖는 시대적 화두가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세대들의 커뮤니케이션은 대부분 CMC, SMS, MMS 등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이뤄진다. 이들은 글쓰기 양식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사용하지만 음성언어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을 방불케 하는 양상을 보인다. 문자는 단지 재료일 뿐, 글쓰기의 사회문화적 문법이나 규칙을 초월하고 거부하며 더욱 감성적이고 구술언어적인 표현양식을 지향한다. 디지털 기반의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은 문자의 텍스트성이 지닌 폐쇄성과 구조적인 고정성을 탈피하려는 시도이며, 음성언어의 상황의존적이면서도 화자와 청자가 밀접하게 주고받는 감정의 전달에 대한 향수가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CMC 환경에서 등장하곤 하는 ‘샤방샤방’ ‘샤라락~’ ‘ㅋㄷ ㅋㄷ’ 등은 의태어와 의성어의 구술성을 복원한 대표적인 예들이다. 웃는 모양을 나타내는 ^_^, ^^ 등이나 물고기를 표상한 X)))*> 등과 같은 실제 사물을 표현한 다양한 이모티콘들의 발명이 이어지는 것 역시, 기술적인 환경에 전복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 이용해 언어의 주체로서 인간의 내면적 심리와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무빙타이포그래피가 인간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시공간의 활용에 기반을 둔다. 시간의 주관적인 활용을 통한 움직임의 창조는 곧 개인의 음성이 지닌 톤, 굵기, 말하기 속도 등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수성을 표현하는 언어의 시각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CMC 환경에서의 ‘휘리릭’이라는 단어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갑자기 커뮤니케이션 장소를 떠날 때나 또는 어느 새 나타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우리는 문자를 통해 신체의 동작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무빙타이포그래피는 이를 시각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문자언어와 음성언어 그리고 화자의 감성을 융합한 언어의 컨버전스(Convergence)를 가능하게 한다.
무빙타이포그래피로 표현된 ‘휘리릭’의 경우, 위의 이미지에서 표현된 점점 작아지며 사라지는 모습 이외에도 각기 다른 화자의 다양한 감정 상태를 속도의 조절과 서체의 변형, 혹은 크기의 변화 등 시간과 공간의 주관적인 활용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슬픔의 감정이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흑흑’의 무빙타이포그래피 역시 순간적인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성을 넘어선 직접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무빙타이포그래피는 시간성이라는 움직임을 통해 시각-청각-촉각적인 감각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새로운 언어 활용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무빙타이포그래피가 단지 기술을 활용한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장식요소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와 정서에 기반을 둔 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을 복구하는 데 기여하는 실제적 도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무빙타이포그래피로 이어지는 언어양식의 변화의 맥락에서 볼 때, 한글이 지닌 조형미와 한글 창제원리는 서구의 문자가 지니지 못한 특유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게 한다. 실제 한글을 재료로 수많은 연구와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때 한글과 무빙타이포그래피의 만남이 단지 조형미만이 아닌, 의미화 작용의 가치를 지닌 언어의 새로운 양식으로서의 실험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즉, 한글이라는 문자언어 본연의 텍스트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탈텍스트성을 통해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그리고 감성이 융합된 공감각적 언어로서의 무빙타이포그래피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Jubert Roxane. 2006. Typography and Graphic Design :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Translation by Deke Dusinberre, David Radzinowicz. Paris : Flammarion.
* 이 글은 2008년 12월 웹진 『온한글』에 게재된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