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하나의 야구배트가 있다. 하지만 정말 야구배트가 맞는 걸까? 르네 마그리뜨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야구배트가 아니다. 앞에 선 사람에게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대답을 찾게 한다. 정답은 없다. 오직 하나의 질문과 하나 이상의 대답이 있을 뿐. 잭슨 홍의 작업은 오브젝트이되 오브젝트 이상의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애티튜드(attitude), 혹은 어떤 정신적 태도다.
작품이 참 독특해요. 원래 이쪽 분야에 관심을 많이 두고 계셨나요?
디자인이 백그라운드다 보니 작업을 해놓으면 순수한 디자인으로 얘기될 수도 있고, 순수미술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어느 쪽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긴 어려워요. 처음엔 비주얼한 외현에 초점을 두었는데 얼마 안 있어 답답해지더라고요. 제한받는 느낌도 들고요. 화이트큐브 안에서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지금은 오브젝트 메이킹이라는 영역 안에서 작업을 해나가고 있어요.
넓은 영역을 아우르고 계신데 본인은 자신을 뭐라고 규정하세요?
맥락에 따라 디자이너도 되고 작가도 되고(웃음). 작가라고 불리면 아직도 좀 간질간질해요(웃음). 오브젝트 메이커 혹은 폼 메이커라고 생각하는데 발명의 측면이 강해질 땐 폼 메이커가 어울리는 것 같고요.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안 만들어도 오브젝트 메이커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인위적인 틀 안에 가둬두기보다 중성적인 느낌으로 둘 때가 많아요.
설계는 직접 하고 제작은 맡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작방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브젝트 작업은 결국 판타지를 구현하는 거잖아요. 스스로 만들 수도 있지만 기술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전문가가 만드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죠. 그런데 아무리 도면작업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해도 실제 상황에선 다른 요소가 개입해요. 일종의 톨러런스(tolerance)가 생기는 거죠. 그것을 어떻게 콘트롤할 것인가가 관건이에요.
작품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전시 공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엔 공간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전시를 계속 하다 보니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공간의 힘이 너무 셀 경우 작업이 눌리는 경우도 있고, 싫다 좋다를 떠나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일반 가옥을 개조한 경우와 천정이 아주 높은 갤러리는 느낌 자체가 달라지니까, 어려워요. 아직은 공간을 갖고 놀 정도는 되지 못하니까(웃음). 작업을 쟁여놓았다가 공간에 따라 풀 수도 없고(웃음).
그는 강건함과 유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내적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견지자로서 자신과 작업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본다. 디자인의 영역과 순수예술이라는 경계를 넘나들며 통섭의 묘미를 느낄 줄도 안다. 어느 하나를 고집하지 않되 함부로 다른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한순간, 탁 놓아버릴 줄도 안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존재하는 그의 오브젝트들은 경계에서 피어난 찬란한 꽃들이다.
자동차 디자인에서부터 커리어를 시작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떤 매력을 느끼셨나요?
디자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패션 분야라고 생각했어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부분과 일반의 합의를 이끌어냈을 때 가능한 지점이 어딜까?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가자마자 아, 이건 아닌가보다! 생각했지만(웃음). 누구든 자신 안에서 투명하게 설명되는 부분도 있지만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요. 디자인이라는 막연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던 거죠.
전직 디자이너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을 것도 같아요.
2~3년 전엔 지워버리고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아, 이건 그냥 내가 가져가야 하는 몫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디자인 쪽에서 왔지만 갤러리 전시 두세 번 하고 갈 요량으로 온 것도 아니고요. 디자인을 하던 사람이 갤러리 쪽으로 왔을 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제 안에 계속 남아 있어요. 통섭의 개념으로 보면 영역을 넘나드는 의미도 있다고 봐요.
과거의 경험이 도움이 될 때도 많으시죠?
많죠. 이거 배워서 뭐하나, 했던 것도 있는데 의외로 쓸모가 많더라고요(웃음). 오히려 미술작업을 하면서 디자인 실력이 더 늘었어요(웃음). 실력을 키우기 위해선 반드시 익혀야 하는 과정이 있어요. 그걸 안 하면 눈은 개안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그건 정말 심각한 착각이거든요. 잘못하면 미아가 될 수도 있어요. 야구에 비유를 하자면 가장 기본인 직구부터 익혀야 하는 거죠.
야구 좋아하시나 봐요?
보는 것만 좋아해요. 야구에서 배울 게 많아요. 특히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는데 이 분은 예술작업을 하셨어도 대단하신 분이 되셨을 것 같아요. 예측 가능한 작업은 재미가 없고요. 뻔한 상황에서 뻥 뚫고 나오는 것이 있을 때가 좋아요.
오브젝트 메이커로서 그는 문제해결을 중시한다.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일까, 작품이 주는 인상이 강렬하다. 여운 또한 오래 남는다. 그가 내린 해답이 정답이어서가 아니다. 질문과 해답 사이에 깃든 우울, 분노, 기쁨, 슬픔, 그리고 단독자로서의 철저한 고독이 쉬지 않고 말을 걸기 때문이다. 그는 상식적인 세계에 머물고 싶은 우리의 심장을 일깨워 흔든다. 변화구로 승부할 결정적인 순간에도 묵직한 직구를 던진다.
오브젝트 메이커로서 직구는 무엇인가요?
문제해결이죠. 말하자면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거예요(웃음). 예산이 얼마고 매체나 생산방법은 무엇인지, 틀 안에서 가능한 것을 먼저 생각한 후 조형성이나 사용성을 생각하는 거죠. 젊었을 땐 되게 싫어하던 말이었는데 원점으로 돌아왔네요(웃음).
지금 전시중인 <13개의 공>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건가요?
작년에 작업을 많이 못해서 생각이 많았어요. 올해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전 준비하면서 막혀 있던 부분을 많이 풀었죠. 최종적으로 수상자는 되지 못했지만 마음껏 작업하면서 편해진 부분이 있어요. 전환점이 된 거죠. 이번 전시도 특별한 아이디어를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듭을 하나 지었다는 느낌이에요.
예전 작업을 보면 분노랄까, 그림자랄까, 굉장히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전시는 많이 편안해진 느낌이 들어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어요. 분노 에너지를 창조성의 엔진으로 썼던 습관이 있거든요. 주류 디자인에서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예술계로 도피해서 한다는 피해의식도 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상대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진 느낌을 받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웃음) 욕을 할 게 아니라 답을 낼 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 안에 여전히 비뚤어진 부분은 남아 있어요(웃음).
앞으로 계획은 어떠신가요?
이번 전시가 내년 1월까지라서 지금은 그냥 즐기려고 해요. 끝난 후에 자신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죠. 구체적으로 답을 내진 못했지만 깔끔함에 대한 콤플렉스를 어떻게 풀지 고민하고 있어요. 작업 경력이 10년쯤 되었을 때 총정리의 의미로 모노그래프를 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어쨌든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잘 생존하고 싶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