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형자’라…. 운영자의 동생일까? 아니면 운씨 성을 가진 형자 씨일까? 아쉽게도 땡. 모두 정답이 아니다, 라는 썰렁한 농담 따위는 접어두고. ‘운형자’란 여러 가지 곡선으로 되어있는 판 모양의 곡선용 자로서, 쉽게 말하면 구름 모양을 닮은 자를 말한다. 필자도 나름 디지털 세대이기 때문에, 운형자를 직접 사용해본 적은 없는데, 이 운형자는 레터링을 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이다.
*이 기사는 윤디자인연구소 공식 블로그 ‘윤톡톡’에 포스팅한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원문 바로 가기)
요새는 디지털 도구가 상당히 발전했기 때문에 한글을 디자인할 때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디지털 상에서 직접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다. 캘리그래피적 성격을 가진 서체가 아닌 이상, 손 스케치는 기본 뼈대를 설정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작업은 모두 디지털 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러나 예전에는 컴퓨터의 사양이 현재와 같이 좋지 못했으며 사용하는 폰트의 종류도 지금만큼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손으로 직접 레터링 작업을 하여 새로운 한글 글꼴을 디자인했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인, 1980~90년대 이야기. 이때 활동했던 많은 디자이너 중에서 한글과 관련하여 활발한 연구와 실무 작업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필자가 존경해 마지않는 분, 그는 바로 김진평 선생이다.
한글 디자이너라면 기본적으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 <한글의 글자표현>. 이 책은 한글의 다양한 글자 표현방법이 정리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주로 사용되던 명조체와 고딕체의 구조를 분석한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책의 저자가 김진평 선생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합동통신사 광고 기획실에서 근무했다. 또한, 한국판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아트디렉터를 맡았으며, 1981년부터 서울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한글에 대해 지극한 관심과 사랑, 열정으로 1970년대 한글 활자꼴의 황무지 시대부터 1990년대 후반(1998년 타계)까지 한글의 가치와 위상을 시각적 차원에서 다루고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이론적 측면에서도 한글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인 시각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한글 글자체의 기초적인 이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글의 역사를 디자이너의 시각에서 정리하여 한글 글자체 변천사를 정립하였다는 업적이 있다.
내용 출처: 이용제 글, 디자이너 열전. <한글 활자 연구가 – 김진평>, 네이버캐스트(바로 가기) <한글공감>, 유정숙∙김지현 지음, 안그라픽스, 2010
그뿐만 아니라 그는 레터링을 통한 수많은 실무 작업도 진행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회사명, 기업체명 등의 로고타입과 잡지 제호, 헤드라인(캠페인) 문구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로고들도 있고, 심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도 있다.
김진평 선생은 (필자처럼) 악필가였기에 예쁜 글씨에 대한 관심과 막연한 호기심이 활자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작업물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글자꼴을 볼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글자의 꼴만으로도 다양한 형태를 이룬 레터링이 있고, 반면 글자의 꼴 위에 다양한 시각적인 효과를 준 레터링이 있습니다. 레터링은 그 쓰임새 상 눈에 띄어야 하기 때문에, 글자의 형태가 독특하지 않은 이상 글자의 형태 위에 질감이나 시각적인 효과를 주어서 눈에 띄도록 만든다. 지금은 포토샵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손쉽게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주로 글자의 라인을 강조하면서 글자의 안팎에 그림자 효과를 주거나 글자의 일부 자소 형태를 그래픽 요소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했다. 그중 ‘아스피린의 미처 몰랐던 약효’를 보면 글자 안쪽으로 그림자 효과를 주었는데 그것이 약간 수채화의 바랜 느낌을 내면서, 왠지 모르게 정말로 ‘미처 몰랐기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지금의 포토샵 프로그램의 그림자 효과로는 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아날로그의 맛이 아닐까? 그리고 ‘사나이’는 자소에 그래픽적인 요소를 주어 주목성을 갖도록 했는데, 그 당시에 줄무늬 나팔바지가 유행했었나 보다. 최신 유행 바지가 ‘ㅅ’ 형태로 변신했다. 아마도 이 ‘사나이’는 ‘패션삐쁠’이었나 보다.
위 작업들이 기본적인 고딕 형태에 시각적인 효과를 준 것이라면, 아래의 작업들은 글자의 형태도 변화시키고 질감도 주어서 효과적으로 의미(주제)를 표현한 작업이다. ‘클로즈업’은 치약 제품의 이름인데 마치 치약을 짜서 글자를 쓴 것처럼 질감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글자 자소 형태도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름없는 죄수’는 죄수답게 거칠게 표현되어있고, ‘에너지 파동’은 마치 기름으로 글자를 써서 기름이 밑으로 흘러서 뭉쳐있는 것같이 글자의 형태를 표현했다.
이에 반해,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글자의 꼴에 집중하여 만든 레터링 작업들도 있다. 붓글씨부터 시작해서 블랙레터를 닮은 글자, 영어의 필기체를 닮은 글자, 아랍문자를 닮은 글자, 굴림체를 변형한 글자, 유아적인 느낌이 드는 글자까지 정말 다양한 이미지의 글자꼴을 표현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작업을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레터링이 모눈종이 위에서 실제 운형자를 갖고 작업했었다는 것! 그래서 실제 원도를 보면 하나의 곡선을 만들기 위하여 어떤 크기의 원을 어떻게 운용했는지, 각도는 어떻게 틀었는지 등등을 확인해볼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하나 자세히 보다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나의 곡선이 그냥 감각에 의해 그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곡선이 어떤 타당한 비율로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다양하고 완성도 높은 레터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글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감을 바탕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체 특징(타국 언어 포함)을 분석하여 그를 한글에 접목시킬 수 있는 디자인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김진평 선생의 레터링 작업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전통적인 네모틀 글자에 현대 감각을 가미했던 그만의 글자 디자인 세계가 구축된 것” –안상수 “글자 구성에 있어 매우 짜임새가 있는, 서정적인 손맛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로고타입” –윤영기 “상당히 심도 있는 레터링을 바탕으로 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글자” –석금호 “모나지 않고 손맛을 놓치지 않는,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로고타입” –한재준
지금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상에서 원을 만들고 그 원의 크기를 조절하거나 형태를 변형하는 이런 모든 작업을 손쉽게 마우스 드래그 한 번으로 할 수 있다. 이런 도구의 이점으로 인해 빠르게 많은 작업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그러나 그에 비례하여 모니터 상에서 만들어졌다가 쉽게 삭제되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작업물도 많다. 직접 손으로 종이에 그려가면서 곡선을 그린다면 시간은 더 걸릴 수 있겠지만 선 하나하나가 이루어지는 원리를 깨우치면서 더 정성껏 그려나가지 않을까? 내가 그리는 선들이 모여서 하나의 글자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팔자는 살포시 여러분에게도 한글 레터링을 권해본다. 글자를 직접 만들어보는 신기함과 기쁨을 누려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