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정취가 묻어나는 동네의 골목길에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유치원이 있었다. 유치원에 작업실이? 의외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응용 물리를 전공한 뉴미디어 아티스트이자 교육자. 최첨단 분야의 일을 하면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는 뉴미디어 아티스트 최승준을 만났다. 글 인현진. 사진 김태범.
최근 관심을 쏟고 있는 일은 어떤 건가요?
학생들 성적이네요. 성적 정산을 아직 못 끝내서(웃음). 성적을 낼 땐 상호평가를 많이 해요. 팀원으로서 다른 팀원을 평가하게 하는데 예를 들면 A가 B, C를 평가하는 내용으로 제가 A를 평가하죠(웃음). 우선 긍정적인 피드백을 줘야 해요, 이 사람이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내서 개선 제안을 해야 하고요. 평가하라고 하면 비난하기가 쉽잖아요. 같은 반의 친구들이 경쟁적으로 보이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칭찬을 하고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데 처음엔 어려워해요.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까.
상호작용 중에서도 상호호혜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저도 어려워요. 매번 함정에 빠지고(웃음). 교육, 예술, IT 다양하게 협업을 한 편인데 실패한 경우도 있고요. 감기와 같아서 치료약이 없는 것과 같아요. 늘 변종 바이러스가 생기니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요. 면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협업에는 늘 어려움이 따르니까 상처를 받더라도 좀 더 건강하게 극복해갈 수 있으면 좋겠죠. 팀 작업을 하게 될 경우 특정 프로젝트는 성공하더라도 이후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번에 얼굴 역할을 하면 다음번엔 철저하게 배경으로 물러서 줄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단기적으로는 수평적으로 일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아직 물음표에요.
수업엔 어떤 식으로 적용하시나요?
한 가지 예를 들면 테이블에 큰 종이를 펼쳐놓고 말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요. 첫 번째 사람이 마음대로 그린 후 다음 사람도 마음대로 그리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이전 단계를 지우면 안 돼요. 과거를 인정한 상태에서 내 태도가 이 그림을 망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도록, 더 살아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도록 해야죠. 원래 계획했던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더라도, 서로를 인정하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오는 게 있다고 믿거든요.
다양한 수업방법을 시도해보셨을 것 같아요.
언플러그드 방법을 써보거나, 몸으로 익히기도 해요. 명령어를 써주면 그대로 움직인다든가. 추상적인 사고만 할 때보다 손을 써서 구체적인 일을 할 때 기억에 잘 남거든요. 작업 기억이 활성화될 때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가설을 적용해서 수업하기도 하고요. 동영상으로 과제를 먼저 내주고 수업 시간엔 과제에 대한 지도를 하는 방식을 시도해보기도 했죠. 다양하게 삽질을 하고 있어요(웃음).
그는 현장 안에 들어가서 말을 하시다가도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메타인지적인 면이 뛰어나다. 그의 말을 빌리면 '거시적인 면과 미시적인 면을 아우르는 트랜스스코프'적인 방법이다. 다층다각적인 면을 고려하며 입체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은 삶의 유연성을 만들뿐 아니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굉장히 유니크하면서도 유연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상 중에 ‘Powers of Ten’이 있어요. 하나의 상황을 거시적으로도 미시적으로도 보여주지요. 피크닉을 간 사람들의 모습에서 시작하는데 마을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은하계가 보이고 그다음에 손에서 세포의 구조까지 들어가는 내용이에요. 제가 습관적으로 하는 게 하나의 현상에 대해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트랜스스코프를 추구하는 거예요. 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안으로도 들어가 보고 밖으로도 빠져보고. 그런 것에 관심이 있고, 실천하려고 하죠.
그런 사고방식이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요.
하나의 이미지가 있을 때 해상도를 고저로 바꿔가면서 시간에 따라 중첩을 해본 적은 있어요. 픽셀처럼 덩어리로 보이다가 몇 단계로 겹쳐보기도 하고. 낮은 단계와 적당한 단계를 중첩하면 고해상도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내기도 하죠.
뉴미디어 아트라고 하면 어려운 기술부터 생각나는데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나요?
제가 해온 일 중의 하나인데, 아트센터 나비를 중심으로 활동할 때 워크숍을 진행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아카데미를 만들어서 뉴미디어 작업을 가르치자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래서 시작을 했는데 처음엔 30명이 왔는데 8주 뒤엔 3명이 남았어요(웃음). 교육에 대해 제가 잘 몰랐던 거죠.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다 전달해주고 싶은 마음에 잘 모르는 개념, 용어를 막 던졌어요. 기술, 교수법, 콘텐츠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저도 제 전문분야를 잘 알려주는 것에 서툴렀던 것 같아요. 어려움과 초보자의 감을 상실한 상태였고요. 굉장히 뼈아팠던 경험이었는데 그때부터 교육에 대해서도 궁금해져서 공부를 시작했죠.
교육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책도 많이 읽으시죠?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천천히 읽는 즐거움>인데요, 원제(原題)는 <기적의 교실(奇跡の教室)>이에요. 주인공은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국어 선생님인데, 막 개교한 한 고등학교에 들어가 <은수저>라는 한 권의 소설책을 3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읽어요. 선생님이 앞에서 소설을 낭독하다가 엿과자 이야기가 나오면, 오래된 과자니 아이들이 알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선생님은 예전과 가장 비슷한 엿과자를 수소문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엿을 입에 넣고 다시 그 부분을 읽죠. 아이들은 지식이 아닌 체험으로 엿과자를 알게 돼요. 또, 연이 나오면 연을 직접 만들어 책 속 주인공의 느낌을 배우는 거죠. 그러면서 깊게 사색하고. 아이들이 <은수저>라는 한 권의 책을 천천히 깊게 읽으면서 성장했듯 저도 평소 보는 것에서도 재미있는 것을 찾고 배우고 싶어요. 그러다가 수업에 적용할 수 있는 게 생기면 실험해보고. 교육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언젠가 노년쯤 작업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선생이다. 한 수업이 끝날 때마다 기록을 남기고 회고를 한다. 현재 이 순간, 나 자신과 접촉하면서 과제를 만들어가는 삶과의 밀착성이 느껴진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개인이란 독자적이되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을 불러일으키는, 작지만 거대한 허브라는 생각이 든다. '대나무는 겉으로 보기엔 하나지만 뿌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말에서 사람과 삶을 대하는 애티튜트가 느껴진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 어디를 목표로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궁극적으로는 교육에 관심이 있어요. 교육이 제 작업처럼 된 것 같고요. 상호작용을 통해 입자들에 관심을 갖기도 했는데 사회적인 영향을 생각하면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린이 체험전이나 전시장에서 보면 작품 안에서 대개 30초에서 3분 머물다 가요. 앞에 서서 어? 움직이네, 이러고 그냥 지나가고(웃음). 메시지가 전달되는가? 의문이 생기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을 했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교육이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교육을 통한 사람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가요?
2000년대 초반에 IT 계에서 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는 내용이었어요. 지인 중에 열심히 실천하는 분들이 계셔서 저도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고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수업에도 차용을 많이 했죠. 성장적인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되 데이터를 기반으로, 게릴라처럼 움직이라고 하죠. 그러면서도 필드에서 쓰이고 있는 현대적인 도구를 쓰는 거죠.
배움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과정이 있으세요?
기록과 회고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기업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나서도 아쉬운 부분이 사후분석을 잘 안 하더라고요. 한 프로젝트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배웠나 하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건 디자인 문화에서도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무엇을 잘했고, 어떤 것을 개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죠. 아이디어를 상상하고 실현하면 반드시 시행착오가 생기는데 그것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알게 돼요. 그것에 대해 다시 반성적 사고를 통해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하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데 ‘태도’를 기르는 게 중요해요. 어차피 일을 하다 보면 시행착오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죠.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지만 제 삶엔 얼마큼 적용하고 있는지는….(웃음)
기록과 회고를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대학 때 제가 중구난방 관심사가 뻗어 있다는 것을 은사님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해주신 말씀이 마디를 만들어라,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심사를 가지는 건 좋은데 마무리를 하고 다른 것을 하라고 하셨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마디를 만들면 편리한 게 관절이 돼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유연성이 생기죠. 기록과 회고를 하는 것도 마디를 만드는 작업이에요. 작업을 하다 보면 늘 어려움이 있을 텐데 아쉬운 점이 쉽게 바뀌지 않을지라도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많다는, 배움에 대한 기초 소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