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얘기, 여행. 김지환의 ‘city railway system’도 진솔의 아름다운 일러스트도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더니 이 둘, 사근사근한 태도와 조근조근한 말투가 어쩜 이리 같은지.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둘이 하는 작업의 시너지를 느끼며 조용히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작지만 내실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제로퍼제로(ZERO PER ZERO)를 만났다.
ZERO PER ZERO의 뜻은?
김지환
ZERO는 한자인 공(空)자의 의미를 부여해서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의 공간과 진솔 씨 공간이 모여서 또 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는 개념이에요.
ZERO PER ZERO 소개
김지환
전통적인 시각 디자인 분야인 편집이나 CI보다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작업을 하려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요.
ZERO PER ZERO에서 각자의 역할
김지환
저는 주로 전체적인 디렉팅을 해요. 제품 제작이나 대외적인 미팅, 경제적인 운영 부분도 맡고 있고요. 그런데 우리 둘의 역할 경계를 정확히 한다기보단 섞여 있는 부분이 많아요. 거의 10년 가까이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네요.
진솔
노선도 작업은 김지환 씨가, 일러스트 작업은 제가 하지만, 주로 제가 작은 요소를 만들면 김지환 씨가 그걸 넣어 크게 디자인하는 식으로 해왔어요. 노선도 작업도 일러스트 작업도 함께하는 셈이죠. 둘밖에 없으니까 작업 파일을 주고받고 하는 게 익숙해요.
ZERO PER ZERO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김지환
2006년에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요, 공동 작업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이 있어요.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만들었던 거라 전혀 새로운 느낌의 영상이 나왔죠.
진솔
그때 그 작업을 친구들이 보았는데, 둘이 함께하니 시너지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신선하고도 재미있었어요. 그게 시작이었네요.
요즘 최고의 관심사
김지환
기존의 노선도(City Railway System) 작업의 연장인데요, 암스테르담 편이 이번 달 안으로 출시돼요. 일 년에 한 도시 정도 새로운 작업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요즘 관심도 신경도 가장 많이 쓰이죠.
노선도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김지환
2006년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됐는데, 그때 했던 프로젝트가 도쿄의 기념품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외국인의 입장에서 그때 제일 관심 있었던 것이 지하철 노선이었거든요. 굉장히 복잡하니까요. 노선만 백몇십 개가 되고 회사도 달라 환승도 안 돼, 노선도도 따로 되어 있어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지금 제가 만든 노선도에 역만 1,500개가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복잡한 것을 오히려 재미있게 끌어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노선도 자체에 흥미가 생겨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진행했고 졸업 전시도 그걸로 하게 된 거죠.
지금 작업 된 나라들은 어떤 기준이 있나요?
김지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제가 다녀온 나라이고요. 작업을 처음 할 때는 노선이 복잡하고 표현할 거리가 많은 곳이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먼저 한 게 오사카, 도쿄, 서울이었죠. 그런데 노선의 전체적인 아이덴티티가 잘 잡혀있는지 아닌지도 중요했어요. 그것 때문에 유명 도시지만, 작업이 안 된 곳도 있고 반면 유명하지 않아도 콘셉트가 확실해서 만들어진 곳도 있죠.
노선도로 전시도 많이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김지환
저희 제품이 국내에서만 소비되기에는 시장이 작아서 해외로 진출을 하려고 전시를 많이 했어요. 기억에 남는 전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00% 디자인 도쿄’라고 도쿄에서 했던 전시였어요. 서울시에서 젊은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서울관을 만들었는데, 저희도 아주 작은 공간을 받아서 참가한 거예요. 그때 딱 3작품만 걸었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아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렸는지 전시장에서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였죠. 또 하나는 런던의 케미스트리 갤러리(Kemistry gallery)라고 유일하게 그래픽 디자인만 전문으로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어요. 거기서 초청이 와서 2010년에 단독 전시를 했는데, 정말 좋은 갤러리에서 전시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기뻤어요.
진솔
전시 때문에 런던에 처음 간 거여서 아직 런던 노선도가 없었어요.(웃음) 너무 안타까워서 서울에 돌아와 바로 작업을 했죠.
각자 어떤 ‘여행자’인지 소개해주세요.
김지환
제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구랑 가느냐’에요. 아무리 좋은 데라도 함께 공감하고 기뻐할 사람이 없다면 기억에 남는 게 없더라고요. 반면 좋은 사람하고 가면 아무리 허름한 데라도 모두 추억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진솔 씨가 옆에 있으니 ‘좋은 파트너가 있어 행복한 여행자’.(웃음)
진솔
저는 여행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들이 정말 좋아요. 그게 나무든 보도블록이든. 사소한 거지만 미묘한 디테일 때문에 정말 새롭게 느껴지거든요. ‘눈에 보이는 다른 영상을 사랑하는 여행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상의 어떤 경험이 디자인으로 나오는 편인가요?
김지환
여행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인데요, 저는 여행을 가면 슈퍼마켓이나 백화점, 아니면 저희처럼 작지만 알찬 가게를 주로 많이 가요. 제품을 보기 위해 간다기보단 이런 느낌의 가게에서는 이런 느낌의 제품이 놓여있고, 구입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고. 이런 거 보는 거를 좋아해요. 다양한 점을 배우고 제품이나 디자인을 할 때 도움이 많이 되죠.
진솔
저는 여행 다닐 때 사진을 많이 찍는데요, 돌아와서도 정말 자주 봐요. 제가 작업할 때 실물이나 사진을 보고 그리는 그림이 많아서요. 사진 찍어두는 걸 좋아해요.
노선도 외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김지환
SK텔레콤의 hello, T라는 작업이 있어요. 기존의 딱딱했던 브랜드 이미지를 동물 캐릭터로 만들어 친근한 이미지를 적용했죠. 이걸로 전시도 하고 상품도 제작해서 판매했는데, 많은 분이 좋아해 줬던 작업이어서 정말 즐겁게 했던 작업이었어요.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김지환
결과물만 봤을 때는 임팩트와 완성도이지만,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작업을 대하는 디자이너의 태도나 마인드, 의지라고 생각해요. 그게 있다면 나머지는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죠.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어떤 고민, 어떤 생각을 하나요?
김지환
타이포는 얼굴이나 눈처럼 디자인의 인상을 좌우해요. 그래서 저희의 작업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가장 어울릴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주로 직접 제작하거나 가공을 하고요, 기존 폰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헬베티카를 많이 써요.
진솔
사실 전통적인 타이포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작업할 때마다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타이포를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그래픽과 어울리게 표현하려고 애써요.
궁극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는 스튜디오가 되고 싶나요?
김지환
보통의 에이전시들이 못했던 작업을 하고 싶어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조금은 특별한 것들을 하고 싶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그런 것을 직접 찾아서 자체 프로젝트를 하는 거죠. 실제 진행하고 있기도 하고요. 흔히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진솔
최근에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나가이 가즈마사의 전시를 보았어요. 지금 그분 나이가 90세가 넘으셨거든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들을 쏟아 내세요. 제가 본 전시에서 한 관이 전부 새 작품일 정도로요. 그 위압감과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저희가 나중에 어떤 목소리를 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나요?
김지환
‘코리아 딕셔너리 프로젝트’라고 노선도 말고 자체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는 게 있어요. 그동안 한국의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인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관심 있었고 그걸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가장 먼저 배지(badge)가 나왔는데요, 그건 아주 단편적인 거고 지금은 한국적인 요소들을 모아 책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올해 하반기쯤 나올 것 같아서 연말에 그걸로 전시회를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