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주류 잡지들의 타이포그래피를 살펴보면 제목 서체의 굵기가 상당히 얇아진 경향을 볼 수 있다. 꽤나 큰 사이즈의 제목임에도 굵기가 부담스럽지 않다. 근래 들어 새롭게 등장한 헤어라인(Hairline)이라는 굵기이다. 이 굵기는 본문서체 쓸 경우 너무 흐려져서 가독성이 떨어져 쓸 수 없을 정도로 얇다. 헤어라인은 금속활자 시대에는 제작이 불가능했다. 설사 이 정도 굵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마모되고나 파손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서체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윤디자인 연구소에서 새롭게 내놓은 윤고딕 700은 이런 추세를 반영한 듯 10~90까지 총 9종류의 굵기를 가지고 있다. 기존의 6가지 굵기에 비해 선택의 폭이 많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본문의 선택 폭이 늘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유는 윤고딕 700의 가장 가는 굵기인 710은 본문으로 쓰기에는 너무 가늘다. 730 정도가 기존 120 정도의 느낌이다. 기존의 윤고딕 110을 200포인트 이상의 크기로 쓸 경우 본문에 비해 좀 무겁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경우 710은 아주 좋은 대안일 수 있다. 그리고 780, 790도 본문용이라기 보다 제목용에 가깝다. 예전에 제목용으로 많이 쓰였던 헤드라인체의 느낌이다(사실 헤드라인체는 헬베티카의 블랙의 느낌을 한글로 소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문 선택의 폭이 단지 6가지에서 7가지로 늘어난 정도로만 보이지만, 그 효과는 매우 다르다. 본문과 어울리는 제목의 굵기를 여러 가지로 선택하게 된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그야말로 서체 한 가지를 가지고 잡지 한 권의 타이포그래피 세트를 설정할 수 있게된 것이다. 과거에 유니버스나 헬베티카 한 서체만 사용된 외국잡지를 보며 부러워 하던 시절은 이제 안녕이다.
윤고딕 700의 특징 중 하나는 굵기에 따라 자간이 변한다는 것이다. 같은 줄 수의 단락일 때 가는 굵기일수록 지면에서 차지하는 글줄 수가 줄어든다. 윤고딕 100번대에서는 굵기와 상관없이 글줄의 수는 일정했었다. 이는 지면에서 본문의 회색도에 영향을 미친다. 윤고딕 700은 전체적으로 윤고딕 100보다 밝은 회색도를 띈다. 게다가 기준선이 위쪽에 있는 느낌이다 보니 글줄 아래쪽이 비어 보인다. 거기에 글자의 속공간 또한 윤고딕 100에 비해서 많은 편이다. 같은 크기, 같은 행간일 경우 700번대가 좀 더 가볍고 부드러운 인상이다.
‘이응’의 모양은 기존에 비해 한층 통통해졌다. 특히 ‘히읗’의 ‘ㅗ’형 상투는 기존서체와 가장 다른 인상을 주는 부분이다. 형태적으로는 훈민정음 목각판과 같은 느낌이다. 다만 기존 평행선형 상투에 익숙한 독자와 디자이너들에게 낯선 이 느낌이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느냐가 윤고딕 700이 본문용으로서 자리를 잡는데 관건이 될 것이다. 윤고딕 700의 활용은 페이지가 많지 않은 홍보물류에서부터 시작해서 가볍고 현대적인 내용의 출판물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아직 한자부분이 미완성이란 부분이다. 아직 710, 720과 780, 790의 한자의 굵기가 동일하다. 이는 한글과 섞여 있을 때 한자의 굵기가 달라 본문의 느낌이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다. 올 연말까지 보완된다고 하니 기다려볼 일이다. 개인적인 불만은 자폭이 좁아져 장체 형태라는 점이다. 기존 윤고딕 100의 자폭을 유지하고 덧붙여 장체와 사체를 만들어 주었다면 한글 폰트 최초로 더욱 완벽한 서체가족이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윤고딕 700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예전의 사진식자 판 고딕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답습해왔던 관행적 디지털 서체와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디지털 서체라는 점이다.
장성환
디자인스튜디오 203 대표.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동 대학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홍대앞 동네잡지 <스트리트 H> 발행인, (사)홍대앞문화예술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