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판 인쇄(Letterpress), 옵셋 인쇄, 디지털 인쇄에 이르기까지 인쇄기술 발전의 세 가지 단계를 모두 거쳐 온 37년이란 세월. 중국 북 디자인의 거장 뤼징런(呂敬人)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한 권에 책에는 현재에 존재하는 (문화적인) 패턴, 자기 자신,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숨겨져 있는 민족문화의 전통적인 흔적'을 갖고 있다며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시적인 미감을 가져다 주어 영원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표현을 했다. 책에 관한 가늠할 수 조차 없는 거장의 깊은 마음.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한국을 비롯한 외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뤼징런을 만나봤다.
얼마 전에 한국 타이포그래피 학회 좌담회서 뵀었어요. 그때 한국에는 어떤 일로 오셨었나요?
안상수 선생님의 요청으로 방문했던 거예요. 파티(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에서 수업과 워크숍을 하게 되었는데, 바닥에 물로 글을 씀으로 소재를 얻는 과정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그 소재로 학생마다 16페이지 분량의 책을 편집하게 되었고 손으로 제본하는 워크숍도 했습니다. 파티에서의 수업이 끝난 후 타이포그래피학회 좌담에서 뵙게 되었는데,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대한 한·중·일 세 국가의 문자 특색과 공통성에 대해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어요.
한국과 일본은 얼마나 자주 방문하시나요? 다른 나라 디자이너들과의 교류는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한국과 일본을 자주 방문하는 편입니다. 특히 최근 10년간 매년 한국을 방문하였는데요, 지난 2000년 서울 국제 그래픽 디자인 대회(ICOGRADA), 2005년 제1회 파주 동아시아 북디자인 포럼을 시작으로 한국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 디자이너와의 교류를 즐기게 되었지요. 제가 가르치고 있는 중국 청화미술대학교는 한국의 예술대학교와 자주 교류를 하며 두 나라의 학생들이 서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곤 합니다. 지금 제가 담당하는 ‘징런 북디자인 연구반’은 일 년에 두 번씩 워크숍을 진행하는데요, 중국 워크숍이 끝난 후에는 꼭 한국 파주 출판단지로 와서 견학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아주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만의 작품 세계는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시면서 작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저만의 작품 세계가 있다면 전통과 현대, 융합에 대한 사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편집 디자인 작업에 열중하고 있어요. 북 디자인으로 보았을 때 어느 하나의 부분도 한 권의 책과 분리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 디자인이란, 편집학, 인포메이션학, 재료학, 공예학, 디자인학 등이 함께 융합을 이루는 과정이지, 단순한 책의 외적인 형태나 상품 패키지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물질을 창조하는 것이지요. 현대의 책은 시대에 맞는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고, 단순히 옛날의 방식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현재에 존재하는 패턴과 나 자신을 끊임없이 돌파하지만, 작품 중에는 보이지 않은, 숨겨져 있는 민족문화의 전통적인 흔적을 갖고 있으며, 현재, 더 나아가서 미래의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시적인 서적 미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영원히 대대로 전해질 수 있게 말이지요. 아직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작가, 출판인, 편집자와 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교류를 통하여 텍스트를 전달하는, 질에 관한 생각을 제기함과 동시에 편집 디자인 방안에 관한 의견을 나눔으로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더 유쾌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징런 북디자인 스튜디오’에 대한 소개를 해 주세요.
‘징런 북디자인 스튜디오(홈페이지)’는 1998년에 설립했고 주로 북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 클라이언트는 대부분 출판사이고 종종 국가 프로젝트도 맡아서 해요. 예를 들면 국가 도서관과 함께 진행한 ‘중화선본재조공정’, 2008 베이징올림픽, 2010 상하이세계박람회 등 공식적인 프로젝트도 있었습니다. 스튜디오는 또, 베이징의 제일 우수한 인쇄회사인 야창그룹과 함께 ‘징런 북아트 공방’을 창립했습니다. 저는 자주 학생들과 함께 공방을 방문하고 실천학습을 통해 중국 고대서적 예술과 책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게 했지요. 스승인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님의 ‘예술x공학=디자인2’이라는 이념은 저와 제 스튜디오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술의 감성과 공학의 결합, 창의는 이로 하여금 디자인의 제곱 가치, 세제곱 가치, 심지어 N제곱 가치도 얻을 수 있지요. 2006년 6월, 종이회사와 함께 ‘징런즈위(징런페이퍼로그)’를 설립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종이 전시와 판매, 수공책 공방, 전시 활동, 북 디자인 연구 수업, 북 스토어, 카페 등이 있고 종이 문화와 관련된 예술 활동도 많이 주최하고 있습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십 개의 전시를 열었고, 5기의 북 디자인 연구반을 진행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아주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일도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제가 작업을 할 때 디지털 과학의 편리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전통 종이를 향한 관심과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것은 책이 종이 문화의 시적인 매력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미래의 독자는 대중, 분중, 소중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정보체계도 더욱더 다양해 질 것이고 북 아트는 디자이너들에게 더 광범위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최근엔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선생님 개인적인 작업도 좋고, 스튜디오 작업 이야기도 좋습니다.
최근에 하는 일의 범위가 비교적 넓습니다. 첫째는 스튜디오에서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디자인도 하고 책을 쓰기도 하고 북 디자인 관련 연구를 하기도 해요. 예술적인 것과 출판, 그리고 출판사의 구속에서 벗어나 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책은 하나의 단순한 형식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중국 북 디자인 협회의 일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우선 실무를 맡고 있고 북 디자인 전시, 공모, 학술칼럼, 업무교류 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편집 책임을 맡는 <북 디자인> 잡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셋째는 디자인 교육입니다. ‘징런 북 디자인 연구반’을 잘 해 나가고, 중국 내 여러 대학의 북 디자인 수업과 국제 디자인 수업 교류도 열심히 해야 하며 출판업, 디자인계 간의 교류와 디자이너 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저는 곧 70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출판계에서 일한 지 37년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희열을 느끼고 때로는 실패에 풀이 죽을 때도 있었지요. 시고, 달고, 쓰고, 매운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많아요. 하나하나의 책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저는 활판 인쇄(Letterpress), 옵셋 인쇄부터 디지털 인쇄에 이르기까지 중국 인쇄기술 발전의 세 가지 단계를 모두 거쳐왔어요. 그중 3권의 북 디자인 작업을 예로, 이 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70년대 말에 처음으로 출판계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1980년 초, <생과 사>라는 책을 디자인한 그 시절만 해도 활판 인쇄 시대였지요. 그때는 전부 손으로 그리고 제작을 해야 했고 책의 타이틀마저 손으로 써야 했습니다. 인쇄를 하는데 3색만 가능했기 때문에 2개의 색을 겹쳐 3개의 색, 또는 4개의 색을 만들려고 계속 실험해야 했지요. 그 시절 저는 자전거를 타고 공장을 자주 방문하여 일하시는 분들과 잉크를 섞어 보곤 했는데요, 아주 짜릿했죠. 그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경험도 많이 쌓았습니다. <중국민간미술전집>은 1990년 초반에 디자인했어요. 그때는 이미 옵셋 인쇄 시기였어요. 4색 인쇄가 가능했고 이미지를 충분히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됐으며 활판 인쇄가 실현할 수 없는 디자인도 가능하게 되었지요. 이 책은 비교적 좋게 인쇄되었으며 전국 북 아트 시합에서도 디자인 금상을 받았습니다. <서희>는 2006년에 디자인한 작품입니다. 이 책은 북 디자인 개념을 관통한 자편(자편집), 자독(자감독), 자연(자연출)한 책입니다. 중국 현대 북 디자이너 40인의 작품이 수록된 작품집인데요, 당시 아주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고 공급이 수요에 따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외국에서도 잘 팔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3권의 책, 3개의 10년, 3가지의 디자인 언어와 이념, 이런 경험은 지금 젊은 분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입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북 디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좋
은 북 디자인은, 독자에게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동시에 디자인의 미적 감각과 텍스트의 유희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돌이켜 음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잡한 디자인이든 추상적인 디자인이든 독자들을 생각해 내용과 주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북 디자인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개성이 생명입니다. ‘스타일’은 예술에서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디자인적 추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디자인할 때 항상 새로운 태도로 임해야 합니다. 동양의 디자인은 서양의 디자인과 다른 점이 있는데요, 스타일로 보았을 때 함축적이면서 간결하고 온화, 선량, 공경, 절검(節儉), 겸손의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만의 특별한 작업 프로세스가 궁금합니다.
우선 텍스트를 이해하고, 잘 읽히는 디자인 개념을 넣어 책 만드는 본질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편집 디자인이야말로 텍스트를 전달하는 데 가장 유리한 수단이지요.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잘 읽히게 하며, 사람, 의미, 표현을 창조하여 의미심장하고 시각이 독특한 내용 구조와 리듬, 질서가 있는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잘 읽히게 해야 할뿐더러 자신도 잘 읽고 이해하여 책의 생명력을 유지해야 하는 거죠. 즉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작품에 ‘내적인 힘’을 가져다줄 수 있고 독자들의 마음에 친근함을 주어 책으로부터 미에 이르기까지 잘 안내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즐기는 태도도 꼭 필요합니다.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사실 자신을 귀찮게 하지만 ‘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심리 상태와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힘든 과정에서 일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스승인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님께는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스기우라 선생님은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학자인 동시에 정보를 전파하는 건축가입니다. 음악, 연극, 영화, 도표학, 건축학, 만다라학을 섭렵하고, 한자와 동방 이미지학 연구를 하셨지요. 선생님의 생각과 넓은 학문 세계는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기우라라는 자석이 있는 것처럼, 그 자성에 계속 끌리게 되고 그의 전념하는 정신이 그의 높이를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이 일생에 한 가지 일을 열심히 해 나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생님으로부터 깨닫게 되었지요. 선생님께 배운 그 시절은 영원히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경력이자 도야, 수련입니다. 디자인 이념과 방법론만 가르치신 게 아니라 다른 예술도 함께 탐색하게 하셨지요. 북 디자인은 단순한 한 가지의 기교가 아니라 디자인 실천 중 하나이며, 더 나아가 중국 미래 북 디자인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인생의 길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자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사실 인생목표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큰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지막 귀착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제 나이는 지금 고희(70세)에 가깝고 생명의 끝은 도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남은 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이 시들기 전, 누구나 ‘활짝 피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거죠. 저는 사랑하는 일이 있고, 같은 길을 걷는 이들도 있고, 친구, 제자들도 있습니다. 96세 아버님께서 저에게 주신 좌우명 “믿음으로 일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업을 존경하고, 새로운 것으로 학문을 존경하고, 친구처럼 타인을 존경하라.”라는 가르침이 저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활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