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다시 듣기’로 비교적 챙겨 청취하는 라디오 프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성시경의 ‘음악도시’ 토요일 코너였던 ‘김혜리의 영화, 사람을 만나다’이다(이젠 금요일로 옮겨갔다). 영화 잡지 <씨네21> 편집위원인 김혜리 기자님이 1주일에 한 시간씩 출연해 영화 속 특정 캐릭터를 소개하는 시간으로, 몇 달 전에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배두나가 연기한 태희 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고양이를 부탁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영화. 갑자기 십 년 전의 먼 기억이 나를 ‘퉁-‘ 하고 건드는 것 같았다. 누군가 “살면서 네게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이라고 물으면 몇 년간은 요지부동 “고양이를 부탁해!”라고 대답하던 시절이었다. (10년도 더 넘은 지금 봐도, 역시 그 영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기억된다. 하지만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그간 새롭고 좋은 영화를 너무 많이 접해버렸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대학을 휴학했던 시절, 그러니까 내 시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일주일에 3일쯤은 극장에서 살았던 바로 그 시기에 개봉했다. 당시 극장가는 신은경 주연의 <조폭마누라>가 롱런을 하며 스크린을 휩쓸고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감독도 신인이고, 톱스타도 출연하지 않는 작은 영화를 관람할 만한 상영관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어렵게 강남 시티극장의 제일 작은 상영관(정말 비디오방만큼 작았던)에서 극소수의 인원들과 무료로 주는 팝콘을 먹으며 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영화 시작 20분 뒤부터, 그러니까 남들은 멀쩡히 잘 보고 있는 그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내리 줄줄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는 인천의 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 친구 5명의 ‘스무 살’ 이야기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난생 처음 제대로 접한 그들. 스무 살 이전의 그들은 안전한 그늘 아래 보살핌을 ‘받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고양이라는 매개가 그랬듯, 이제는 보살핌을 받는 대상에서 누군가에게 관심을 ‘주고’ 홀로 일어서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렇게 갓 스무살이 된 여상 졸업생들의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혼자 있기 좋아하고, 자기 마음을 잘 내보이지 않는 스무 살 주인공들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비록 흥행은 못 했지만 미술•음악•연출 모든 것이 훌륭하다. 특히 50군데가 넘는 장소를 헌팅하며 보여준 사실감 넘치고 밀도 있는 배경, 텍스타일 디자이너를 꿈꾸는 지영의 그림들과 풍성한 디테일이 살아 있는 그녀의 다락방. 거기에 몽환적으로 잘 어우러진 인디밴드 ‘별’의 음악까지.
극 초반부터 감정이 복받쳤던 이유는 이 영화가 너무나 공감되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친한 친구 중에는 여상을 졸업해서 사회생활을 일찍 경험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들려준 학교 이야기에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 혜주, 지영 등이 모두 있다.
사담으로, 3년 전쯤인가 우연히 김혜리 기자님과 홍대 근처의 유명한 꼬치집에서 이치코(ichiko)라는 일본 소주를 마신 적이 있다. 그 모임에는 당시 내 남자친구(지금의 남편), <씨네21> 이성욱 편집장님과 김혜리 기자님이 함께했다. 사실 나는 남편과 <씨네21> 두 분이 만나는 모임에 꼽사리를 낀 것이었다.
그때 내가 서체 디자이너라고 하자, 김혜리 기자님이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비트맵 폰트와 벡터 폰트의 차이점, 환경에 따른 글자 폭(width)의 차이 등에 대해 물으셨다. (디자이너가 아닌 분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 분이 라디오에 나오니 뭔가 신기해서 더 찾아 듣게 되는 것 같다. 김혜리 기자님, 그 때 그 술자리를 기억 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