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지전>을 봤다.
이제는 연기의 물꼬가 트인 듯한 미남 배우 고수보다
<고지전> 타이틀과 오프닝 크레딧의 글자들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포스터에 쓰인 고, 지, 전 세 글자의 타이틀 웍스는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한국 영화들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Extra Bold 굵기 정도의 고딕을 포토샵 브러쉬로 긁어 낡은 느낌을 가미한 글자들.
그럼에도 <고지전>의 타이틀과 오프닝이 재미있게 느껴졌던 이유는
특유의 글자체가 제목 세 글자뿐만 아니라
주연 배우나 주요 스태프들의 이름이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 하나.
<고지전>은 티저 포스터와 메인 포스터의 타이틀 글자가 약간 다르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글씨 모양이다.
오프닝 크레딧에는 티저 포스터의 글자체가 사용되었다.
종이에 구멍을 뚫어 페인트로 칠하는 스텐실 기법의 느낌이
전쟁영화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리고, 글
자의 형태 자체도 꽉 찬 네모틀에 복고적인 느낌을 물씬 풍겨 흥미를 끌었다.
저렇게 많은 글자들이 일괄적으로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디지털 폰트인 것 같기도 한데….
음, 그동안 저런 느낌의 한글 폰트는 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가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만든 것 같기도 하고…. 만약 그렇다면 어떤 업체의 누가 만든 것인지도 알고 싶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튿날 인터넷 검색창에
‘고지전 타이틀’, ‘고지전 서체’, ‘고지전 오프닝 크레딧’, ‘밀리터리 한글 서체’ 등
갖가지 검색어를 입력하며 이 글자의 정체를 밝혀 보려고 했지만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친구는 한번 알아봐주겠다고 하더니 금세 답변을 보내왔다.
역시, 가장 빠른 길은 바로 관계자에게 물어보는 것!
영화 <고지전>의 글자는 박시영 실장님의 작품이란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디자이너라고.
또 다시 폭풍 검색으로 박시영 실장님의 다른 그래픽 작업들을 찾아보니
<추격자>, <마더>, <의형제>, <전우치>, <하녀>, <짝패> 등 영화 포스터들이 수두룩히 등장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활동 초기에 작업하셨던 인디포럼과 서울 디지털 영화제 포스터들이었다.
박시영 실장님이 한 매체와 가졌던 인터뷰를 읽다가 가슴에 콕 박힌 인상적인 말.
“디자이너는 추한 것이라도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디자인적으로 유려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사람이지, 이미지에 포박되는 소비자여서는 곤란하죠. 디자인이 ‘이미지’ 혹은 ‘스타일’로만 존재할 때 디자인은 사라지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고지전>의 타이틀 작업을 한 회사는 어디일까? 혹은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은
기어이 박시영 실장님이라는 분을 알아내고, 그분의 작품을 감상하게 했다.
박 실장님 작업실이 우리 회사 근처던데….
언젠가 술 한잔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