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퍼 이상현. 이름 석 자만으로 인상적인 작업들이 떠오른다. 대중들에게 가장 깊이 각인이 된 것은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표제일 것이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도 그의 작업을 만날 수 있다.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는 것은 물론 수많은 컬래버레이션과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캘리그래피의 가치를 높이면서도 대중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 바람결처럼 섬세한 감성과 장작불처럼 옹골찬 열정을 품은 사람, 이상현 작가를 만났다.
요즘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캘리그래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까요?
일단 관심이 중요해요.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담아보고 오래 접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배워서 당장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과 디자인의 눈높이를 높여주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 디자이너들에게 요구하는 게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요. 디자인도 잘하고 캘리그래피도 잘하고. 하지만 본업이 뭐냐는 게 중요하죠. 전문 디자이너와 전문 캘리그래퍼가 자신이 잘하는 것을 가지고 협업을 할 때 좀 더 퀄리티 있는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캘리그래피를 독립된 분야가 아니라 디자인 일부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으신 것 같던데요, 작업을 의뢰받으실 때 어떠세요?
난해해요(웃음). 멋있게 써주세요. 예쁘게 써주세요. 가장 난해한 건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써주세요(웃음). 수정작업을 할 때도 글씨를 접해본 분은 디테일하게 의뢰를 할 수 있죠. 막연하게 좀 더 부드럽게 써주세요, 가 아니라 붓이 처음 들어가는 부분에서 좀 더 탄력 있는 모습이 연출되면 좋겠고, 획의 끝마무리는 가볍게 여운이 느껴지도록 동선을 강조해주면 좋겠어요, 라던가 또는 화선지에 먹을 촉촉하게 쓰셨는지 번짐이 있어 획을 확대하다 보니 거칠어요, 매끈한 종이에 써주시면 좋겠어요, 이러면 금방 알죠. 작업속도도 빠르고요.
디자이너분들도 직접 캘리그래피 작업을 해보면 협업을 할 때 훨씬 도움이 되겠네요?
그럼요. 실무적인 부분에서 많이 도움이 되죠. 직접 글씨를 작업해보면 화선지의 한국적인 맛도 느낄 수 있고, 한국적인 선이 무엇이고, 붓끝에서 나오는 탄력이 뭔지 디자인적인 감각도 키울 수 있거든요. 확실히 즉흥적인 요소가 강하죠. 울림도 크고. 디자이너 쪽에서 보면 캘리그래피가 디자인을 위한 하나의 소스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역으로 캘리그래피 작가들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서예라는 전통 예술이 있듯, 현대적으로 대중화되어가는 또 다른 서예 예술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작가가 표현하는 생각이 중요하고요.
캘리그래피는 분명히 독립된 장르인데 디자인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게 좀 아쉽네요.
디자인과 캘리그래피는 분명히 다른 장르예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장르가 만나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거죠. 많은 작업을 여러 개 하기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요. 하나의 작업을 하는데 여러 달이 걸려도 이건 꼭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일이 없어 배가 고프긴 하지만(웃음). 작업할 때마다 스토리가 생겨요. 작품에 담는 스토리와 저자신의 스토리가 하나로 이어지곤 하죠.
글은 각 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한글에 한국인의 영(spirit)이 스며 있다면 글씨엔 쓰는 사람의 혼(soul)이 담겨 있다. 그의 캘리그래피는 단순히 좋은 글, 예쁜 글씨를 넘어서 자신의 몸맘얼을 도구로 삼아 영혼의 울림을 담아내는 작업이고, 전통적인 서예 예술의 정수를 현대에 새롭게 해석해서 이어가는 행위이다.
작가님의 캘리그래피를 보면 단순한 글씨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캘리그래피에는 힐링의 요소가 있어요. 감성이 묻어나죠. 내용적으로도 잘 될 거야, 힘내, 사랑해, 고마워, 마음을 전하는 거죠. 작년 연말에는 분주했던 지난해들과는 달리 혼자 보내는 시간을 보냈어요. 음악도 듣고, 먹도 갈고,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면서 내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뭘까를 생각해봤죠. 흰 종이를 펼쳐놓고 들여다보다가 제 자신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상현, 너 지금까지 참 잘 왔다, 그리고 고생했어.’라고 썼죠. 제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고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있어야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잖아요. 그때 깊게 깨달은 것 같아요. 글씨가 희망이 될 수 있구나. 올해는 주위에 고마웠던 분들께 작은 글씨 한 점이라도 나누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작업하실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가식적인 모습으로 아무리 예쁜 글씨를 쓴들 소용이 없다고 봐요. 눈앞에서 잘했다, 좋다, 이런 말 잠깐 듣는 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우리 것이 좋은 이유도 그거잖아요,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거. 오래 두고 봐야 사랑스럽다고 하잖아요. 보면 볼수록 매력을 느끼는 작품은 잘 쓰고 멋스러운 게 아니고 진정성을 갖춘 작품이에요. 이런 게 우리 서예 문화의 정신이고 이 시대에 새롭게 조망될 부분이라고 봐요. 제가 캘리그래피를 통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도 서예정신이었고요.
작품을 보면 선 하나하나가 호흡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아요.
한국적 이미지는 선(line)이라는 개념을 무시할 수 없어요. 저는 붓을 잡을 때마다 선이 되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겨요. 한옥의 기와, 한복, 도자기, 한글 등 우리 문화 전반에 곡선의 미학이 있죠. 제 작업은 대부분 곡선이고, 곡선엔 호흡의 리듬이 있어야 해요. 호흡은 또 춤사위이기도 하고 우리 음악의 소리이기도 하죠. 몇 년 전 아리랑을 시각예술로 바꾸는 개인전을 한 적이 있어요. 아리랑이 정말 좋아서 자문도 많이 받고 몇 년 동안 준비한 작업이었는데 끝나고 나니 국악이 미치게 좋아지더라고요. 그 후론 거의 국악과 퍼포먼스를 해요. 글을 써내려가며 소리의 선을 타는 게 정말 기가 막혀요.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발렌타인 스카파 에디션이라는 위스키의 신상품 출시를 하는데 한국에서 처음 런칭을 했어요. 그와 관련해서 한국의 작가와 컬래버레이션을 하고 싶다는 제조사의 발표가 있었어요. 한국의 여러 작가가 포트폴리오를 제출했고 저한테도 의뢰가 왔어요. 대부분 많이 알려진 커머셜 작품들을 제출하는 분위기였지만 저는 커머셜 관련 작품보다는 평면, 미디어, 설치에서 도전했던 파인아트 포트폴리오만 냈죠. ‘진짜 내 새끼만 보여주자’라는 생각을 했죠. 원래는 미디어, 설치, 평면, 세 개의 방에 한 작가씩 선정할 예정이었는데 저 혼자 단독선정이 됐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죠,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지?(웃음) 그 작업을 하면서 배운 게 많았어요. 캘리그래피가 커머셜에만 치우치지 않고 파인아트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는 도전하길 즐긴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라는 타이틀도 많이 갖고 있다. 한국캘리그래피 시장의 개척자, 최초의 캘리그래피 교육 전문강사, 최초의 캘리그래피 퍼포먼스 공연연출 작가, 전 세계에서 제일 큰 LED 캠버스인 서울스퀘어미디어 파사드 캘리그래피 부문 최초 미디어 전시, 최초의 캘리그래피 프리랜서 작가, 최초의 아리랑 캘리그래피 작가, 최초로 캘리그래피 단독으로 컬래버레이션을 해낸 작가 등 많은 후배가 그의 도전과 성공을 보면서 용기를 갖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갖고 있는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캘리그래피 교육도 오랫동안 해오셨죠?
13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강의 노하우가 있어 저한테 배우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웃음). 요즘 추세가 수료증을 갖고 있으면 회사 취직도 잘 된다고 하더라고요. 공부하다 보면 부업도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본업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나를 위해, 자신으로 존재하면 좋겠어요. 수업시간엔 항상 음악을 같이 들어요. 감성을 키우고, 디자인적인 안목과 테크닉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수업이 되도록 노력하죠. 이번에 윤디자인연구소에서 하는 캘리그래피 교실 <심통글씨> 커리큘럼도 그런 부분들을 잘 섞으려고 했고요.
첫 번째 강의 기억나세요?
윤디자인연구소 정글 아카데미에서 했던 수업이 처음이었는데 디자이너분들이 많았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강의 시작 5분 만에 잠깐 쉬었다 하겠습니다(웃음). 주차장에 나가서 담배를 얼마나 피웠나 몰라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들어가긴 들어가야겠고.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디자인에 대해선 당신들이 나의 스승이지만 글씨는 내가 더 많이 안다. 아는 척 잘난 척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고뇌했던 시간이 있듯, 나에게도 붓을 들고 가슴앓이를 했던 시간이 있다. 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모르는 건 모른다 하고 아는 것은 당당히 얘기하자.’ 그때부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잘 될 거야, 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들어가서 그냥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니까 풀리더라고요(웃음).
캘리그래피 작업은 자신과의 교감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하면서 많은 분을 만나는데 그분들과의 교감이 저를 많이 성장시켰어요. 정말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겸손함을 지키는, 훌륭하신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을 볼 때마다 저도 마음가짐이 새로워지죠. 배우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단순히 글씨를 잘 쓰거나 주문받은 대로 로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협업하는 자세를 갖게 되고요. 그렇기에 더욱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작가의 정신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봐요. 궁극적으로 캘리그래피가 뭐냐고 묻는다면 ‘마음’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캘리그래퍼가 되고 싶은 분들께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캘리그래피를 업으로 삼아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당장 밥벌이를 목적으로 붓을 잡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스스로 행복해야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거든요. 눈앞의 취직이나 돈벌이에 연연하면 조바심이 생겨서 글씨를 쓸 수 없어요. 손맛에 의지한 테크닉으로 버티는 건 생명력이 짧아요. 몇 년 못 가서 힘들어서 포기하게 돼요.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죠. 방법을 모르면 배우면 되고요. 붓 가지고 즐겁게 놀 줄 아는 게 첫 번째고, 다음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가 몸에 배면 그 내공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