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는 2009년 정진열, 김보일 두 디자이너에 의해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주로 문화예술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을 진행해온 소규모 스튜디오이다. 플랫폼2009, 광주비엔날레 2010, 디자인코리아 2010, 미디어시티서울 2014,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2016 등의 국내 문화계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와 사무소,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극장, 국립현대무용단 등 다양한 문화예술기관과 같이 작업을 해오고 있다. 벌써 8년이 되어간다는, 소규모 스튜디오로서는 짧지 않은 시간을 견뎌온 TEXT(홈페이지)의 이야기를 정진열, 이진우, 최세진 디자이너와 함께 나눠보았다.
지나온 8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아쉬움이 많죠. 처음에 시작할 때는 어떤 목적성, 또는 전략이 있었다기보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고 그래서 원래 스튜디오 이름을 TEST라고 지을 생각이었어요. 타입을 배열해봐도 예쁘고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여러모로 실험해보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이름이면 누가 일을 주겠냐고 주변에서 워낙 말려서 TEXT로 선회했어요. 글을 다룬다는 의미보다는 디자인을 통해서 의미를 발화시킨다는 점에서 생각한 이름입니다. 지난 8년간 그 이름에 걸맞게 잘해왔다기보다는 원래 생각했던 이름(TEST)처럼 뭔가 좌충우돌 부딪히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현장성을 늘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좋겠네요(웃음). 어느 스튜디오나 어려운 점은 있겠지만, 저희 같은 경우에는 작업 영역에 대한 고민이 꽤 많았어요. 스튜디오를 시작할 초기에는 환경정보그래픽 쪽(Wayfinding, Signage)으로 일을 종래의 인쇄 매체만이 아니라 보다 다양하게 해보고 싶었어요. 공간 안에서 그래픽적인 정보와 메시지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어우러지는 그런 작업이요. 몇 번 시도하긴 했는데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런 작업이 시공사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소규모 스튜디오가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지금도 조금씩 접근해보고는 있어요. 디자인이 자기의 방향, 입장,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도 디자인의 주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사이 어떤 지점에서 균형을 맞춰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업할 때 클라이언트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면서 진행하세요?
일단 저희는 마술사가 아니니까 내 마음을 맞춰봐 이러면 곤란하고요(웃음). 서로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보를 나누고 설명하면서 대화하는 게 중요하죠. 예를 들자면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는 저희와 꽤 여러 번 작업을 해왔는데, 일을 단지 맡기는 게 아니라 사전 리서치부터 같이 해나가곤 합니다. 담당자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긴 한데, 저희는 그래픽이고 담당자는 인테리어를 맡고 있어서 사실 따로 그냥 진행해도 무방하지만,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같이 고민하고 자료를 찾고 의논을 해왔어요. 논쟁도 같이(웃음). 즉 양쪽 다 작업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그게 가능한 것 같은데, 그래서 서로 많이 배우고 새로운 시도도 무리 없이 고민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진행 과정에서 팁이 있을까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은 온라인 환경이 워낙 좋아서, 그리고 작업 프로세스가 좀 더 간편해지다 보니 서로 바쁠 때는 온라인으로 시안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 꽤 많은 확률로 문제가 생겨요.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혹은 미흡하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죠. 아니면 뭔가 다른 가능성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내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게 되고 그걸 보호하거나 혹은 선택되지 않거나 하는 문제로 가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만나서 이야기하면 선택의 문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부분을 같이 고민할 수도 있거든요. 이해하려는 여유, 혹은 더 나은 고민을 하려는 여유가 증발해버리는 게 아쉬워요.
텍스트는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되고 때로는 컨테이너나 컨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콘텐츠는 컨테이너에 담기고 컨텍스트에 따라 의미가 변한다. 콘텐츠가 음식이라면 컨테이너는 그것을 담는 그릇이며 컨텍스트는 음식이 나오는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스튜디오 텍스트는 그 양쪽을 같이 고민하려는 노력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재미있게 하신 작업 얘기 좀 해 주세요.
작년 말부터 국립현대무용단과 작업을 진행해왔는데 상당히 흥미롭게 일을 진행해오고 있어요. 첫 작업이 <어린 왕자>였는데 좀 많이 어려운 프로젝트였어요. <어린 왕자>는 워낙 유명한 동화이고 생텍쥐페리의 일러스트를 통해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콘텐츠죠. 이 콘텐츠를 가지고 <조용한 가족>, <장화, 홍련> 등의 영화로 유명한 김지운 감독이 시각 연출을 맡았어요. (이진우 디자이너가 김지운 감독의 열혈 팬이라고 한다.) 기존의 동화 이미지에 기대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개념적으로 다루어서 어렵게 만들어도 안되고, 이런 어려움들이 깔려있던 작업이었어요. 결과적으로는 모듈을 사용한 픽토그램적인 느낌으로 진행했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았어요. 그리고 이진우 디자이너가 책임으로 진행했는데, 포스터 한 장에서 끝내지 않고 전체 캐릭터도 다 만들고 스티커도 만들고 일이 점점 커져갔죠. 그래서 국립현대무용단도 일을 점점 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웃음).
일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웃음).
좋아하죠. 반응이 좋을 때, 그리고 작은 아이디어가 점점 커지고 자라날 때, 그럴 때는 일이 즐거워집니다. 국립현대무용단 연간 달력을 만들 때도 작업은 진짜 힘들었어요. 원래 예산이라면 좀 더 단순하게 끝냈어야 하는데, 재미있게 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일이 커졌어요. 일력과 플립북을 합친 형태의 아이디어이다 보니 촬영을 별도로 진행해야 했고 촬영된 이미지를 시퀀스로 작업하다 보니 컷을 따서 한 장 한 장 그래픽 작업하고. 그런데 하다보니 욕심도 나고, 단원 분들 기대치도 높아지고,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노동력도 어마어마했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던 인쇄소 기장님이 처음으로 역정을 내시더라고요. 죄송해서 그 인쇄소에 한동안 못 갔어요(웃음). 그래도 결과가 좋아서 다들 많이 뿌듯해했죠.
재미있게 하면 일들이 단절되지 않고 앞뒤로 이어질 것 같은데요.
재미있게 해서 단절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재미있게 할 때는 결과가 좋은 편이고 결과가 좋으면 또 이어지죠. 다행히도 일을 진행하면서 좋게 평가된 경우가 많아서 계속 일을 맡아가는 경우가 좀 있는 편입니다.
TEXT만의 스타일이 있고 그걸 기대하는 클라이언트도 많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런 기대가 있다면 그건 디자이너로서 즐거운 일이죠. 장단점도 있을 거예요. 어떤 작업을 보고 아, 이건 텍스트가 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는 건 개성이 분명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만큼 한계를 정하게 될 위험도 있으니까요. 부담이 클 땐 일부러 힘을 뺄 때도 있어요. 그게 반응이 더 좋은 경우도 있었고요. 그런데 힘을 빼도 TEXT스럽게 나오더라고요(웃음).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어느 정도 공유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일견 스타일적인 유사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이전 작업을 답습하는 것은 피하려고 노력해요. 다행스러운 것은 주로 문화예술기관 쪽 작업이 많다 보니 그런 시도를 격려해주고 믿어주는 클라이언트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셨다고 했는데, 상대를 좋은 클라이언트로 만들어 가시는 건 아니에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웃음), 사실 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스터디 형태의 프레젠테이션도 해본 적 있어요. 당시의 반응은 좋았지만, 결과론적으로 담당자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그렇게 성공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웃음). 저희가 일을 해가는 과정에서 저희가 주는 영향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정적 요소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결국은 전체적인 문화의 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죠.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 폭이 예전과는 달리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문화 지체 현상 없이 곧장 국내외 변화하는 문화적 현상을 볼 수 있게 되잖아요. 이런 것들이 디자인에 대한 판단, 요구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10년 사이 한국에서 그래픽 쪽 활동이 활발해진 것의 배경에는 문화예술기관에서 디자인에 대한 필요성이나 중요도를 인식한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봅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자질이랄까,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뭔가 더 나은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고 할까요. 디자인한다는 것은 문제점을 찾아 계획하고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좀 더 낫게, 좀 더 좋게 바꾸고 싶어 하죠. 그 욕망의 크기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잘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스튜디오 TEXT, 두 번째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