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리즈 [꼴과 결]
꼴은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이고 결은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다. 꼴값은 있어도 결값은 없다. 겉과 속을 대할 때의 우리 태도가 낱말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여긴다면 그것의 보관소는 그 사람의 안-마음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누군가의 마음 안에 보관되고 보호되고 있다면 그것에는 더는 값이 매겨지지 못한다.
글꼴은 글자의 꼴이다. 영어로도 글꼴은 typeface다. 그렇다면 글자의 결은 어디에 있을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기로 한다. 글자의 결은 누구의 안에 있을까. 글자가 지닌 고유한 성품은 누군가에 의하여 이종된 것일 테고 그 모종이 본래 자리했던 곳은 누군가의 안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 그 밭의 근거지는 역시 글자를 만든 이의 마음이다.
글자의 결을 궁금해한다는 것은 글자 디자이너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얘기다. 값이 매겨지는 글꼴의 이면, 결의 바탕을 주목해보려는 호기심이다. 누가 이 글자를 지었나, 그 누구는 어떤 인물인가, 글자를 짓는 동안 어떤 마음이었나, 하는 것들에 우리의 눈과 귀를 잠깐 내줘보면 어떻겠나 하는 제안이다. 꼴에 값이 붙듯 결에는 숨이 잇대진다. 꼴값의 뒷면에 숨결이 있다. ‘숨결을 불어넣은 제품/작품’이라는 관용구는 ‘이 제품/작품의 값은 매우 높이 매겨졌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값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품성과 시장성 평가를 잠시 뒤로 물리고 제작자의 존재를 앞세우려는 형용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발행사 윤디자인그룹은 공식 채널 『윤디자인 M』을 통해 자사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채널에서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회사 소속 글자 디자이너를 인터뷰하여 매달 한 인물씩 소개하는 시리즈다. 글자 보기집이 아니라 글자-마음 보기집이다. 윤디자인그룹 안에는 어떤 결을 지닌 디자이너들이 글자를 짓고 있는지 알리는 것이 기획 의도다.
『윤디자인 M』의 [글자-마음 보기집]을 『타이포그래피 서울』에서 [꼴과 결]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하여 다달이 한 편씩 옮겨보려 한다. 윤디자인그룹 소속 글자 디자이너들의 결은 그들 고유의 결인데,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그러한 결의 개별성을 드러내 보이고 축적할수록 그것들은 포개지고 뭉쳐져 ‘디자이너의 결을 궁금해 하는 마음 또는 문화’로 굳어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비단 글자 디자이너의 결만이 아니라 모든 디자이너의 결, 모든 타인의 결을 감각해보려 마음 쓰는 문화가 다져진다면 자연히 모든 분야의 꼴과 값 또한 비옥해지지 않을까.
‘덕업일치’는 폰트 디자인에서도 통한다
대학 시절에 산학 협동으로 라틴 알파벳 디자인도 했었고, 모터쇼 엠블럼을 만드는 회사에서 인턴십 생활도 했었어요. 폰트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꽤 쌓인 상태로 구직 활동을 했습니다. 입사 후에는 ‘싸이월드’ 웹 폰트 디자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설로 배울 수 있는 폰트 디자인 교육 기관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되는 대로 책을 읽거나, 선배들에게 도제식으로 배우는 게 전부였죠.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대학과 기업에서 폰트 제작 수업도 많아졌고, 온오프라인 클래스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잖아요.
이런 좋은 환경과 더불어, 제가 폰트 디자인 입문 방법으로 추천해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덕업일치’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나 연예인, 영화 등이 있다면 각 대상에 어울리는 글자를 제작할 때 쉽게 흥미를 느끼거든요. 스케치 또는 완료한 작업이 있다면, 이미 출시된 오픈타입 소스 폰트를 백그라운드에 놓고 그 위에서 글자의 간격이나 구조들에 맞춰서 올려놓는 연습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감에 의존하지 않기
폰트를 제작할 때 정말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받아요. 멋진 라틴 알파벳이나 한자를 발견하면 ‘한글로 제작했을 때 어떻게 해야 잘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스케치를 해보기도 하고, 폰트 사용이 좀 아쉬운 브랜드들이 있다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1960~1970년대 음반 타이틀 그래픽들을 보면서 이름도 안 남기신 선배님들의 작업에 감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실제 일할 때는 영감보다 자형 설계, 그러니까 제가 담당한 브랜드가 원하는 인상을 만드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업, 덕온공주 친필 복원 프로젝트
덕온공주 친필 복원 프로젝트를 꼭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그동안 제가 개발했던 전용서체들은 주로 고딕 형태였거든요. 덕온공주체 같은 ‘궁서체’를 개발할 기회는 많지 않았어요. 게다가 ‘복원 서체’라서 더 욕심났던 프로젝트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궁서 흘림을 연구하다 보니, 흘림체만의 고유한 형태가 있다는 걸 배웠어요. 복원도를 결정하면서 내부적으로 궁서 흘림에 대한 판독성 조사를 진행했었는데, 서예를 전공한 친구도 완전히 판독해내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만큼 궁서 흘림을 폰트로 복원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업이 점차 진척됨에 따라 글자의 형태가 익숙해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문장이 막힘 없이 술술 한눈에 읽힐 때 무척 뿌듯하더라고요. 그리고 세로쓰기 흘림에는 한글의 ‘연결쓰기’도 존재하거든요. 알파벳에 합자(Ligature)가 있듯 세로쓰기용 폰트에서 연결글자를 표현할 수 있도록 개발한 점이 좋았어요.
저는 덕온공주체를 제작하면서 서예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최정호 선생님, 김진평 선생님도 서예 공부를 강조하셨지만, 제 경우는 쉽게 시작하지 못했거든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폰트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텐데, 서예에 대한 조예는 글자를 제작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아, 그리고 서예와 함께,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썬(Python)’도 공부해두면 두고두고 유용할 거예요.
아래 덕온공주 친필 복원 폰트 관련 이미지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덕온공주옛체·덕온공주체 서체활용안내서」
가끔은 마라톤 말고 단거리 경주도 겸하기, 어쨌든 계속 달리기
해가 지날 때마다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2~3년차 때는 일 배우는 것만으로도 바빴어요. ‘이 직업이 과연 나랑 잘 맞을까’ 하는 자아 성찰(?)도 겹쳐 있던 시기라 권태를 느낄 겨를도 없었네요. 5~6년차 되면서부터는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거든요. 그렇다 보니 디자이너로서의 열망에 주의를 기울여볼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폰트 디자인은 굉장히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작업이에요. 그래서인지 레터링 디자인 같은 단기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다행히 당시 뜻이 맞았던 친구들과 ‘슭곰발’이라는 한글 레터링 프로젝트를 하면서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마라톤을 오래 하다 보니, 단거리 경주에 대한 열망이 생긴 셈이랄까요. 어쨌든, 계속 달리고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웃음)
디자인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환갑 때도 맥북 들고 만나서 디자인하는 할머니가 되자고 말하거든요. (그때까지도 일을 해야 하는 거냐며 싫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지만요.) 그러려면 ‘나만의 디자인’이 날이 잘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롯이 내가 기획하고 제작한 폰트를 내놓고 싶어요.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거나, 필요에 의해 만드는 폰트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한 작업이긴 하죠. 하지만 소모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지금 혼자서 만드는 폰트가 있는데, 여유가 생길 때마다 업데이트하고 있어요. 진행은 조금 더디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완성하고 싶어요.
인터뷰이: 이가희 @ganada.type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소속 시니어 디자이너. 넥슨 〈HIT2〉 게임서체, 국립한글박물관 덕온공주옛체 등 다양한 전용서체를 위한 타입을 기획하고 가르친다. 국립한글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했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강의했으며 현재 윤디자인그룹 TDC에서 타입 디자인 및 연구, 워크숍 등을 진행하고 있다. 디자이너 이가희의 더 많은 [글자(꼴)-마음(결) 보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