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r. ‘낯선’이라는 의미가 담긴 ‘strange’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김태헌의 유학용 포트폴리오의 제목이기도 하다. 네덜란드로 유학을 준비하며 외국에선 김태헌 자신도, 한글이라는 글자도 ‘낯선 사람’, ‘낯선 글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단어를 달리 사용해볼까 한다. 공업 디자인에서 시각 디자인으로,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에서 글꼴디자인으로,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디자이너의 성공 행로(시각 디자인 전공 - 유학 - 국제 회원 등록 - 스튜디오 운영)와는 사뭇 다른 김태헌이라는 디자이너의 행보가 낯설다. 솔직히 말하면, 반갑다. 이토록 집요하게 한글을 연구하고, 파헤치고, 궁리하며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자 했던 디자이너가 있었던가.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애증’이라 정의할 만큼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자괴하며 글꼴을 짓는 디자이너가 있었던가. 글자, 그리고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에서 마침내 긍정적인 길을 발견한 그는, 이제 달릴 일만 남았다 말한다.
그는 어떻게 타이포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정식으로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전공 과목인 한글디자인 수업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 만났던, 최초의 타이포그라퍼와의 만남이 큰 계기가 됐다고 한다.
2004년 4월, 『폰트클럽』
“힘들게 다시 들어간 대학이라 1학년 때는 과제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그러다 겨울 방학 때 다시 곰곰히 생각해봤죠. 근데 내가 뭘 배웠는데? 여기에 걸리더라고요. 건방진 말이지만 저는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던 차에 만난 한글이 무척 재미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명조와 고딕도 구별 못했고, 타이포그래피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단지 그림만 봐도 그냥 좋았어요.”
2005년 6월, 『디자인네트』
어릴 적 집안에서 수건 공장을 운영했다고 들었다. 한글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시작된 건지.
그렇다(웃음). 수건 위에 글자를 새겨야 하는데 컴퓨터가 없으니 공판으로 밀어서 글자를 새길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수건 위에 글자를 새기는 형이 있었는데, 그때 경험 많은 타이포그래퍼로부터 살아있는 타이포그래피를 몸으로 배운 셈이다.
김장우, 부창조와 함께 ‘집현전’이라는 팀을 결성해 활동했는데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
대학교 1학년 때 글자를 만드는 수업이 있었다. 조금만 만들어도 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즐거우니 많이 만들게 되고, 그 서체를 윤디자인에 출품했는데 상을 받았다. 얼떨결에 상까지 받으니 글자 짓기가 더욱 즐겁더라. 윤디자인 서체 공모전에서 이장우와 부창조를 만나 집현전을 결성했다. 장우는 에디토리얼, 창조는 일러스트레이션, 나는 타이포 분야를 맡아 즐겁게 작업했다.
변화는 2007년, 유학 대신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1년을 꼬박 매달려 『사각형 연산과 기하학 타이포그라피』라는 책을 쓰고서 찾아왔다. “그후로는 가볍게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색다르고 즉흥적인 요소로 글자를 만드는 대신 이젠 제대로 된 글자를 만들자는 마음이 커진 거죠.”
2011년 2월, 월간 『웹』
포트폴리오까지 준비하고 유학을 포기한 이유가 궁금하다.
2002년 즈음 네덜란드에 가고 싶었다. 이성을 가미한 파격적인 디자인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치 디자인이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그때 식상함과 지루함을 느꼈다. 개인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 디자인은 모두 똑같다. 마치 유행하는 옷(스타일)처럼 진정성이 없게 느껴진다. 그럴 듯한 디자인, 모두가 다 그렇게 하는 디자인은 싫다. 디자이너의 취향, 개성, 관심이 드러나는 디자인이 좋다.
김태헌의 디자인 활동은 『사각형연산과 기하학 타이포그라피』라는 책을 내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걸음이 굉장히 진중해졌다. 제대로 된 글자를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요즘 아인슈타인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물리학자가 연구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 나의 작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자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김태헌은 글자를 이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사람인 거다. 여기서 알파벳은 예외다. 왜냐하면 알파벳은 구조체가 아니라 하나의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글은 어떤 규칙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을’, ‘놀’ 등의 글자는 균형, 안정성에서 완벽하지만 ‘ㄱ’과 ‘ㅏ’와 ‘ㄴ’으로 이뤄진 ‘간’이라는 글자는 구조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 ‘ㅅ’과 ‘ㅏ’로 이뤄진 ‘사’ 역시 그렇고. 하지만 결합되어 있지 않나. 분명히 결합과 독립의 규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 글자가 결합할 때 문제없이 통일성을 가지도록 규칙을 발견하고, 적용된 글자를 만들고 싶다.
지금 만드는 서체는 예전의 서체와 모양과 구조면에서 크게 다를 듯 하다.
예전 서체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완성도다. 최소의 질서를 설명함과 동시에 일반적으로도 인식하고 사용 가능하도록 만들고 싶다. 전위적이라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없거나 너무 평범한 글자는 배재하고 있다.
최소한의 질서?
한글의 구조적인 모듈러를 만들고 싶은 게 목표다. 예를 들어 ‘ㅇ’과 ‘ㅁ’의 유기적인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거다. ‘ㅇ’의 크기가 커지면 ‘ㅁ’의 크기는 작아진다거나 등의 구조적 규칙.
‘완벽주의자’다운 그는 막히면 ‘다시 최정호’를 되뇌며 오로지 한 글꼴에만 3년째 매달리고 있다. 작업하다가 그냥 엎어버린게 50~60번이다. 자괴감 속에 ‘진리를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했다.
2011년 8월, 『스트리트 H』
서체 개발은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 끈기를 요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게다가 오랜 시간 글꼴 작업에 매달려왔는데···.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일이 많아서 혹은 육체적인 문제로 힘이 드는 건 아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오는 자괴감이 가장 크다. 보통 무엇인가 연구를 하는 사람은 ‘가설-실험-증명’의 단계를 거치기 마련이다. 실험에 실패하면 가설을 다시 세워야 한다. 실패할 때면 여기서 그만 둬야 하나… 고민하게 되고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든다. 아무리 좋아하는 ‘글자’에 관한 일이라 해도 전혀 즐겁지가 않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이게 옳은가?’, ‘이 세월이 헛된 게 아닐까?’라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그 마음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나면서 내가 만든 개념이 틀리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고민은 끝났다.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한글이 예쁘고 아름다워서 아껴줘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한글을 재료로 많은 요리를 해봐야 한다.”
2004년 4월, 『폰트클럽』
우리는 한글에 대한 묘한 의무감이 있다. 한글은 어렵지만 혹은 예쁘지 않지만 그래도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한글이라서, 우리 것이라서 활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한글은 당연히 예쁘지 않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 관건은 멋진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만들 수 있는 ‘좋은 재료(글자)’를 만드는 것이다. 음식에 비교하자면 양질의 좋은 재료가 다양한 요리에 활용되듯 글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좋은 글자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 글자를 잘 만들면 글자를 잘 이해하는 누군가 멋진 작품을 만들어줄테니까. 내가 만든 글자로 작업한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보면 정말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