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타이포그래피의 상관관계
우리가 어떤 그래픽물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분리해낸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미지와 글자(텍스트)’일 것이다. 이미지는 사진이 될 수도 있고 일러스트레이션 혹은 기본적인 도형이 될 수도 있다. 텍스트는 숫자, 영문, 한글, 한자 등 문자들이 가지는 기호적인 형태와 그 문자가 가지는 의미로 이루어진다. 이들의 집합과 해체를 통해 우리는 그래픽 디자인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그림책의 가장 기본적인 그래픽 요소에 대해 따져본다면 위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에 대한 부분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책과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은 매우 상충되어 보이지만, 그래픽의 기본 요소를 텍스트와 이미지라고 보았을 때 서체들을 그림과 같은 맥락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계로 생각된다.
그런데 우선 우리나라의 대중들이 느끼는 그림책의 범위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림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게 그림책이란 아직 유아를 위한 학습용이나 교육적인 동화(童畵-아이들 그림)의 도서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또 아동문학의 하위 장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시각들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림책의 범위를 좀 더 넓게 본다면 예술창작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편이 바람직할 듯 하다.
단순히 아이들이 보는 매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작가가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유희하고 그것을 그림이란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매개체로 본다면, 아마도 그림책의 범위는 세대와 시대, 국경을 넘어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 의해 그림책과 타이포그래피와의 관계를 본다면 예술성이 매우 높은 작품들까지 그림책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위 작품들을 텍스트의 의미를 알기 전에 그림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멋진 타이포그래피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나 기호의 역할이 이들 작품 같은 범주까지 가는 그림책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문자에 대한 설명을 그림책으로 표현한 몇몇의 단행본을 보면, 대개 그림를 설명하는 보조적인 수단이거나 그림과 되도록 잘 융화되어 어울리게 하는 역할 정도에 머무르는 듯하다.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옛이야기 그림책은 대부분 동양화적인 기법 때문에 서예 느낌이 나는 옛 서체를 많이 쓰는 편이다. 옛스러운 그림에 굵고 딱딱한 고딕체 같은 서체를 쓴다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좀 더 현대적인 그림책에 쓰인 서체들의 경우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외국의 저작물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경우 타이포그래피의 문제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즉 원서의 타이포그래피가 주는 느낌과 비율, 그리고 어울림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오히려 전혀 엉뚱하게 처리되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을 크게 손상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특히 그림 문자의 형태로 그려진 작품들은 번역하면서 그 느낌이 매우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심스 태백의 <요셉의 작고 낡은 코트가…?>를 원서와 비교해 보면, 타이틀에서부터 그림 이미지로 시작함으로써 다른 책들에 비해 비교적 원서와 가깝게 연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질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우리 그림책들
그림책의 질적인 성장은 그래픽적인 관점에서만 논해야 할 일은 아니다. 아동책 관련 시장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은 해마다 볼로냐 라가치상을 시상한다. 세계 각국에서 최근 2년 내에 출간된 새로운 작품을 주최측에 출품하고 세계적인 아트디렉터들의 심사를 통해 픽션과 논픽션 분야를 나누어 선정된다.
심사의 기준으로는 작품성도 중요하지만 인쇄술과 제본술도 본다. 즉 그림이나 글 등 작가의 수려한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책으로 귀결되어 독자들에게 펼쳐 보여지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과정인 제작의 수준도 그 못지 않게 중요시하는 것이다.
종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형태, 판형, 제본술 등 여러 가지 제작에 관련된 기술이 작품과 얼마나 잘 어울려져 있는가를 종합해서 심사위원의 기준을 통과해야만 상을 받을 수 있다.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상은 작가에게만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에 참여한 출판사에게도 영광이 주어진다.
해외의 그림책과 우리나라의 그림책에 쓰인 서체를 어떤 기준을 세워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좋은 그림책일수록 좋은 서체와 타이포그래픽의 연출력이 수반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해외와 국내에서 연출되고 있는 타이포그래픽의 차이는 아마도 그림책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의 소양과 연출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작가의 창작 마인드를 이해하고 그 메시지를 가장 잘 연출해줄 수 있는 표현방식을 찾아나가는 노력이 국내의 그림책 작업자들에게서도 많이 보여진다.
일례로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의 경우는 목판체를 썼는데, 사실은 목판체라는 서체가 출시되기 이전에 발행된 책이다. 그럼 이 책의 글자는 어떻게 썼을까? 옛 고서본을 찾아 가장 잘 어울리는 글자를 일일이 집자해서 작업했다고 한다. 내지를 보면 지금의 디지털 서체보다 더 자연스럽고 그림의 이미지와 일체감을 줄 정도로 잘 연출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도깨비와 범벅장수>의 경우 길쭉한 판형이 주는 느낌과 세로쓰기에 대한 고민을 통해 아이들에게 새로운 읽기방식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그에 맞는 서체의 선택과 그 운용의 방법을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 IBM 로고의 개발로 유명해진 전설적인 디자이너 폴랜드가 작업한 <외로운 꼬마1>의 경우 원서의 타이프라이트 서체를 한글의 타이프라이트 서체로 이어서 표현했으며 원서처럼 모든 본문의 서체를 한 가지 서체로만 통일해서 진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본 서체의 선택 방식과 달리 작가가 자기 작품에 맞는 고유의 글자체를 만들고 연출한 작품들은 훨씬 다양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부분 그림의 느낌에 맞춘 것들이다.
창작 그림책과 번역 그림책 속 한글꼴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그림책 시장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진국이 이루어놓은 질 좋은 그림책들을 많이 수입해서 번역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이들과 부모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예전의 교훈적이고 교육적인 동화책 뿐 아니라 예술성을 겸비한 해외의 창작그림책에까지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국내의 창작그림책 시장은 외국의 선진적인 느낌이나 기법을 따라가기 바빴으며 그 중심에 놓여있는 서체나 글꼴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책 속 한글꼴들은 많은 부분 일반적인 서체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내 창작물의 경우 오히려 작가나 디자이너가 서체의 선택과 마무리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작은 차이로 작품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림책을 다루는 디자이너라면 서체의 선정은 물론 그 책에서 중요하게 쓰일 서체의 목록을 매우 신중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데, 되도록 작가와 함께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스토리 작가에게나 그림 작가에게나 그림책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서체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생각 이상으로 크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논의가 없이 디자이너나 편집자에게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그 그림책은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좋은 작품으로 남지 않게 될 확률이 커질 것이다. 따라서 혹 그림 작가가 별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하거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더라도 그 부분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꾸준히 설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지만 해외의 그림책을 한국어판으로 낼 때에는 텍스트적인 부분 이외에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기호나 문자를 다시 표현하려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들 언어상의 특유의 표현을 모두 한글화할 필요가 있느냐에 대한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알파벳권에 대해서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 그대로 살리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어 같이 한자문화권일 경우에는 되도록 그들의 색채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기호나 문자들을 애써 한글서체로 바꾸어 어색하게 만드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어른이나 아이들은 책을 한두 번만 보고 끝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쉽게 찾아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미지와의 합일로 어필하는 그림책 글꼴
그림책을 꼭 어린이들만 보는 것은 아니겠지만 소구하려는 대상이 어린이임이 분명하다면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서체와 크기 등을 고려해야 한다. 어린이 대상 책들의 서체 선택의 폭이 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귀여운 서체나 모양이 많이 들어간 꾸밈서체 등을 쓰면 아이들에게 쉽게 어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책을 제작하는 어른들의 관점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일수록 오히려 바른 서체나 읽기에 분명한 서체를 쓰는 것이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번역된 그림책에서도 한글서체를 잘 선택하고 신중하게 운용해야 겠지만 창작 그림책일 경우 특히 표제의 글꼴은 작가의 그림에 맞게 연출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서체를 그대로 쓰기 보다는 되도록 시간을 많이 들여 다듬으면서 그림의 느낌에 맞게 앉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헤어드레서 민지>의 경우 기존의 디지털 서체를 선형화해서 디자이너가 작품의 느낌에 맞게 다시 연출했다. 이처럼 기존의 디지털 서체를 쓰더라도 작품의 성향과 내용 그리고 컨셉에 맞게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면 작품의 이미지를 배가시킬 것이다.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그 책의 독자인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림책의 이미지와 텍스트 요소를 따로 분리하지 못한다. 대략 글을 읽기 시작하는 나이에서야 서체를 인지하기 마련인데 표지의 타이틀은 그림책의 이미지와 하나로 기억되는 특성 탓에 ‘좋은 그림책’으로 기억하게 되는 조건으로서 타이틀에 쓰인 서체의 느낌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표지의 이미지로 쓰인 그림의 그래픽적 특성과 글자의 집합체가 더 큰 합일적인 이미지로 변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책에 있어 서체를 잘 고르고 제대로 쓰는 일이란 그만큼 중요한 작업이며 그림 작가가 그림을 완성하는 일 못지 않게 오랜 고민을 수반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 이 글은 2009년 3월 『온한글』에 게재된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