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는 가끔 어깨를 들썩이며 파르르 떨기도 한다." -봄로야, <선인장 크래커> 중에서- 한 사람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전시를 기획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작업을 하는 봄로야(홈페이지)를 만났다.
봄로야라는 이름이 참 독특해요.
대학 때 로야라는 이름을 먼저 썼는데 동생이 만든 만화 주인공 이름이에요. 봄로야는 스물다섯인가 여섯때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봄은 계절로서의 봄도 있고 보다라는 의미도 있어요. 지금은 가족들도 로야라고 불러서 본명이 불리면 오히려 낯설어요(웃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이름이 된 것 같아요.
최근에 하는 작업은 어떠세요?
다음(Daum)에서 연재 중인 <연애 못 하는 남자, 연애 잘하는 여자>에 그림을 그리는 일인데 주 2회 마감이어서 바빴어요. 개인 작업으로는 드로잉을 꾸준히 하고 있고요. 어떤 식으로 마무리할지 정하진 않아서 명확하게 말씀드리긴 어려운데 인터뷰를 하면 지키게 되니까(웃음). 말해보자면 건설 중인 공사 현장이나 완성되기 전의 도시에 관심을 갖고 작업 중이에요. 정답을 찾진 못했는데 답을 정해두지 않는 게 지금 저의 키워드이기도 해요. 다리, 원룸, 빌딩에서 철골구조나 초반 작업 단계가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시각적으로도 재미있는 요소도 많지만 어떻게 완성될지 상상하는 것도 흥미로워요.
하나로 규정하기보다는 상상력을 키우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계신가요?
집 앞에 원룸을 짓는 곳이 있어서 매일 공사현장을 봤는데 본다는 행위를 통해 나와의 관계성 같은 게 있었어요. 제게 어떤 답을 해주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설명하긴 어렵네요. 많은 분이 건물이나 도시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아직은 뭐가 될지 모르겠는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제 경험이 상상과 함께 녹아날 것 같아요.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이 되는 순간 무엇인가로 규정되는데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 그래서 더 불안하면서도 재미있는 요즘입니다.
일러스트 작업에서 물의 이미지가 많이 느껴져서 그런가. 촉촉하면서도 애잔하고 애달픈 감성이 들어요. 작업할 때 업 앤 다운도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견디죠(웃음). 저는 작업할 때 예민해지는 걸 빼고는 제가 제법 무던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애를 하거나 가족 등 더 가까운 사람들에겐 못되게 굴었더라고요. 괜히 괴롭히고(웃음). 작업한 지 10년쯤 되고 보니 돈을 벌고 생활을 유지하고 이런 것들이 책임으로 다가오면서 자신에 대한 컨트롤이 되더라고요. 이제는 강하고 힘 있는 물이 되어 보려 합니다. 작업에 내 애달픔을 토로하기엔 지금의 전 그 시기를 지나 누군가의 애달픔을 품어 내야 하는 위치인 것 같아요.
"나무가 자라면서 나이테가 생기듯이 책을 통해 켜켜이 삶의 테가 생기고 있다."(봄로야의 <0페이지의 책> 중)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빛이 참 깊다. 작품 속 인물을 닮았다. 봄빛 아롱아롱한 아스라한 봄날 오후에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게 한다. 어떤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 그래서일까. 봄로야의 작업은 아픈 마음을 토닥이듯, 치유적이다.
꾸준히 작업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느 순간 선택을 한 것 같아요. 작가로서 살려면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데 스스로 좀 비겁한 부분이 있었어요. 큐레이터를 하고 노래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어떤 의미로는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도피의 수단이었던 때가 있었거든요.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겠구나 싶으면서 초기화가 된 느낌?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정리해보면 책을 세 권 냈는데 나름대로 청춘 삼부작을 끝냈다고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혹은 더 개인적인데 그 해석과 표현을 다르게 하는 도모 중인 것 같기도 하네요.
음악과 그림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데 어떠세요?
음악은 작년에 마음껏 했는데 요즘은 실컷 하진 못했어요. <사라의 짐>이라는 앨범(일러스트와 글이 함께 있는 책이기도 하다)에 실은 곡들이 절반은 미리 만들어두었던 것이고 나머지는 새로 만든 건데 확실히 달라진 부분이 있어요. 눈물이 점점 없어지는 것도 같고요. 첫 번째 책이었던 <선인장 크래커>는 굉장히 강렬한 울음들이 있었는데 점점 나를 드러내는 게 줄어드네요. 그래서 노래나 글, 그림이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업하실 때 나만이 가진 개성이랄까 지향하는 바가 있으신가요?
한 가지로 고정시키지 말자는 생각이 있어요. 초반에 로야일 때와 봄로야일 때의 작업을 봐도 많이 다르거든요. 스타일보다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만드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래도 자기 스타일이 나오겠죠. 주변에서도 네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네 것 같다는 얘길 해요(웃음). 30년쯤 뒤에 누군가 제 작품을 봤을 때 봄로야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참 좋다, 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변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작업할수록 생기는 걸 보면 그런 걸 지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작업이 있으신지요?
최근에 했던 곽정은 씨 북 작업이에요. 스타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도 같고 지금까지 해온 작업과는 다르기도 했고요. 편집자와의 의견 교환 자체가 도움이 많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는 처음 냈던 <선인장 크래커>가 아닐까 싶어요. 말할 수 없었던 자전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부터 독자이신 분이 계시는데 가끔 피드백을 받으면 굉장히 기뻐요.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인 것 같아서요.
“그만 나는 소리 없이 잠이 드네. 꿈을 꾸네.”
-봄로야 <사라의 짐> 중에서-
음악과 글과 그림이 담긴 음반 드로잉 북 <사라의 짐>은 사라-짐이 주제다. 주인공 ‘사라’를 가만히 부르면 ‘살아’로 들린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삶의 짐을 지고 언젠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은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다. 우리 모두는 ‘사라’가 아니겠는가. 버리기 힘든 짐을 지고 사는 아픈 사람에게 봄로야는 속삭이는 것 같다. 이렇게. "괜찮아요. 인생은 살아볼 만한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사라의 짐>을 이야기하고 푸는 작업이 참 치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쎄요. 아직은 모난 구석도 많고 이중적으로 사는 게 아닌가 싶은데. 생각해보면 저는 일상을 깨알같이 재미있게 잘 풀어내는 작가는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타인의 무언가를 계속 갖고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짐 같은 여러 사연이 궁금했던 저의 호기심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치유가 되나 봅니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요.
본격적으로 작업하신 지 올해로 10년째인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강의를 나가는 학교가 있는데 얼마 전에 학생에게 장문의 메일이 왔어요. 어떻게 하면 일러스트도 하고 글도 쓰고 노래도 쓸 수 있는지,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내용인데 아직 답 메일을 보내지 못했어요.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레임을 주고 싶지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좌절을 시키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열심히 가능성을 쓰고 저도 그렇게 행동하려고요. 다만, 돈에 관한 현실적인 질문이 있었는데 작가로 살고 싶다면 그것에 대해 각오는 하라고(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세요?
개인적으로는 좀 더 깊어지고 싶어요. 다음 결과물도 책으로 내고 싶은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고요. 형태는 비슷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달라지려는 노력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요. 최근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고 있는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기록이에요. 우연히 바타이유의 <불가능>도 읽게 됐는데 작가가 그 책을 쓰고 3개월 지나서 죽었거든요. 공통점이 ‘죽음’인데…. 제 마음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답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어요. 앞서 말했듯 답이 없는 것에 관한 두려움을 다뤄보고 싶어요.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작업으로 먹고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걱정을 많이 하는데 이제 제게는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작업하는 주변 사람들을 봐도 작업을 하지 않으면 너무 힘든, 절박함이 있어요. 당시 내 작품의 결이 가벼워 보일지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야만 하는 것이 있거든요. 작업하고 그 결과로 먹고살겠다는 결심은 정말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인 것 같아요.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뭐에 치여서 작업을 못 하게 됐을 때가 진짜 힘드니까요.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아주 막막한 것만도 아니에요. 지원을 받을 방법도 다양하게 있고요. 나에게 일단 작업이 있다면 길은 어느 방향이든 있다고 생각해요. 긴 시간, 먼 길을 떠날 각오를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