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In Limbo’, 부제가 ‘식물의 방’이다. 조명의 수도 밝기도 어중된 전시장 한쪽 벽면엔 『신곡』의 글귀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얼마간 몽롱함을 느끼는 건 조명 때문만은 아니다. 축축한 라운지 음악까지 낮게 깔려 있으므로. 시야를 부옇게 만드는 안개 같은 소리가 반복 재생되고 있다. 벽과 바닥엔 알파벳과 식물의 중간쯤인 듯 생긴 그래픽 작업과 조형물이 걸려 있거나 놓여 있다. 그리 넓은 편이라 할 수 없는 공간이다. 주의를 기울여 둘러보아야 한다. 무심코 뒷걸음을 쳤다가 조형물을 밟을지도 모른다.(실은 몇 번이나 밟았다. 풀 몇 포기라도 밟은 기분이 들어버렸다.)
〈In Limbo – 식물의 방〉(2017.08.11. ~ 24.)이 열리고 있는 마포디자인·출판지원센터(구 DPPA) 안에서, 이 전시를 만든 송민호와 윤민구를 만났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글꼴 디자이너는 이따금 관객 몇몇과 동행하며 작품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곡』의 단테처럼 이 전시를 감상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도 했는데, 그렇다면 둘은 단테를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를 자처하려는 셈일까. 인터뷰가 자칫 림보로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송민호와 윤민구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림보, 식물, 방. 이 셋이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죠?
송민호
지난해부터 신시가지에서 살기 시작했거든요. 고층건물도 많고 엄청 건조한 환경이에요. 집 바로 앞에는 공사 현장도 노출돼 있어요. 창 너머로 건물이 점점 쌓아 올려지는 게 보이죠. 건물이 높아지면 해를 가리게 되잖아요. 제 방 창틀에 식물들이 많은데, 얘네가 햇빛을 받아야 하니까 자꾸 위로 길게 자라더라고요. 건물도 자라고 식물도 자라는 거죠. 그런데 이 둘의 자람이 창 하나를 경계로 묘하게 다른 거잖아요. 이쪽은 해를, 저쪽은 완공을 향해서.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나라는 사람은 과연 이 식물이랑 어떤 차이가 있나’라는 데까지 들어간 거예요. 처음엔 식물이 불쌍했어요. 나에 의해서 이 방(내 방)에 강제 정착을 하게 된 건데, 심지어 해까지 안 보여버리니까. 왠지 내 모습, 우리의 모습 같잖아요. 출생과 성장 환경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그리고, 나만의 환경을 쟁취하려고 투쟁하듯 살아가는.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림보’가 떠오른 거죠. 지옥의 첫 번째 관문이면서, 신의 존재는 인지하지만 그 현현을 목격할 수는 곳. 우리도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위해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다다를 수는 없는.
창밖에 해가 있지만 창틀의 식물은 다다를 수 없다.
송민호
다음 문장은 ‘그럼에도 계속 자란다.’ 우리도 어떤 이상향에 도달하려고 성장을 하다가 결국 끝을 맞게 되잖아요. 죽음이 될 수도 있고, 꿈을 버리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약간, 이런 정서로 식물이라는 소재에 접근을 했고 윤민구 씨랑 얘기를 많이 했어요.
윤민구
원래는 ‘식물의 방’이 제목이고 ‘림보’가 부제였어요. 그런데 요즘 ‘식물’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하더라고요. 제목에 ‘식물’을 붙인 전시도 많고요. 그래서 순서를 바꾼 거예요.(웃음)
영화 〈인셉션〉에서도 ‘림보’가 나오잖아요. 꿈에서 깨어나지 못 하는 상태. 전시장에 들어오니까 좀 몽롱해지더라고요. 계속 흐르는 음악도 그런 느낌이고. 스툴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진짜로 림보에 빠진 기분이었어요.
윤민구
그래서 스툴을 놓아둔 겁니다.(웃음)
송민호
조명도 어둡게 하고.
아, 어쩐지. 어두워서 더 비몽사몽 같았나봐요.
윤민구
작업을 하나하나 보여주려던 건 아니어서요. 만약 그랬다면 전시작마다 조명을 쐈을 거예요.
관객들이 각각의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공간 자체의 분위기에 젖어들기를 바랐어요.
송민호
『신곡』의 단테 같은 느낌으로. 숲에 와 있듯이.
전시장 벽면에 ‘forest’가 들어간 영어 문장이 크게 붙어 있더라고요.
송민호
『신곡』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전체 문장은 이렇죠. “Midway upon the journey of our life I found myself within a forest dark.”
윤민구
“우리네 삶의 가운데에서,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내가 어두운 숲 속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전시 준비하면서 식물과 관련한 자료들을 많이 찾아봤거든요. 『신곡』의 이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제 개인적으로도 많이 와 닿았고요. 어쩌면 나도 숲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송민호
베르길리우스를 만나기 전의 단테가 자기 위치―현실을 불현듯 깨닫는 장면이죠. 우리 삶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지난해가 참 다사다난했잖아요. 여러 사건들이 막 터져나왔는데, 그런 속에서 제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반응이 단테의 저 독백과 통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 현실에 이렇게 서 있구나’라는 걸 알았을 때의 반응인 거죠.
작년 같은 경우는 분노보다는 절망이 더 컸던 것 같은데요. ‘식물의 방’이라고 제목을 정할 때는(지금은 부제가 됐지만), 지난해의 상황과 단테를 내내 떠올렸어요. 어쩌면 사람이든 세상이든 어떤 변화의 시발점이 되는 건 ‘절망’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고요. ‘forest dark’라는 절망을 인식했기 때문에,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지옥-연옥-천국 순례길의 안내자로서 따를 수 있었던 거겠죠. 식물도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에 적응하거나 진화하는 식으로 바뀌어가잖아요. 모든 변화는 외부의 자극을 인지할 때만 촉발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식물은 안 보이네요?
윤민구
주제는 식물이지만 식물이 없는 전시죠.(웃음) 식물에서 파생된 이미지, 형태, 글자, 이런 것들이 유기적으로 숨 쉬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시작들에 타이틀도 없고요.
송민호
원래는 타이틀이 다 있었어요.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 타이틀도 있었고, 제가 식물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습득한 것을 타이틀로 잡은 것도 있었고.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다 뺐어요. 왠지 타이틀이 관객들의 발목을 잡을 것 같아서요. ‘이 작품은 OOO라는 식물로부터 영감을 얻은 거구나’, ‘이 식물의 이름이 OOO구나’, 이런 거 말고, 오로지 형태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랐거든요. 사실,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라든지 분위기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저희 둘이 텍스트로 정리를 해두기는 했어요. 리플릿에 넣어볼까도 했는데, 오히려 관객들의 감상을 방해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윤민구
관객들이 ‘디자인 전시인가? 아니면 글꼴디자인 전시인가? 그냥 식물에 관한 전시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부제가 ‘식물의 방’이기는 한데 실제 식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전시라는 것 자체가, 작업자가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들로 채워진 결과물이잖아요. 그런데 전시작들은 관객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거나 이야기되고 싶어 할 수도 있죠. 작업자의 의도와 상관없이요.
제가 글꼴 디자이너라서 그런지 글자를 살아 있는 것, 그러니까 주체적인 것으로 계속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대문자 S가, 자기 모습이 단지 알파벳의 한 형태로만 보여지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구불구불하게 자라난 어떤 식물처럼 봐줬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죠.
인스타그램에서 본 전시 후기 하나가 인상적이었는데요. 대문자 X가 힘 있는 알로에처럼 생겼다는 내용이었어요. ‘알로에’라는 타이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관객은 알로에 형태를 떠올렸던 거죠. X 입장에서는 참 감사한 일이죠. 관객의 자유롭고 주관적인 감상이 작품의 주체성을 숨 쉬게 한달까요? 작업자가 애초에 규정 지어놓은 타이틀이나 기획의도에 묶이지 않을 때 가능해지는 거죠. 이런 게 저는 관객과 작품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 아닐까 해요. 이 가능성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식물’이 될 수도 있겠고요.
송민호
디자인 자체도 이를테면 식물 같아요. 디자인은 이미지, 형태, 글자 같은 요소들을 따로 떼어놓는 게 아니라 한데 배열하는 과정이잖아요. 이번 전시를 예로 들면, 어떤 식물 하나를 매개체 삼아서 이미지와 형태와 글자를 파생시켜보는 방식으로 각각의 전시작들을 완성해나간 거예요. 식물이라는 소재가 발화점이 돼서 이미지, 형태, 글자가 나온 건데, 이것들이 다 식물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죠. 저희는 이것들을 입체적이고 비어 있는 전시 공간 안에 배열을 한 것이고요. 편집 디자인처럼요.
두 분이 언급하는 ‘식물’은 그러니까 ‘연결돼 있는 것’의 표상이군요.
윤민구
그래서 ‘유기체’라는 단어가 이번 전시의 중요한 키워드예요. 유기체라는 게, 각각의 부분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움직이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거니까. 저는 아무래도 글꼴디자이너라서 식물을 보면서 글자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우리가 바깥에서 식물 하나하나를 신경 쓰면서 보지는 않잖아요. 이건 무슨 나무이고, 이건 무슨 풀이고, ··· 이런 것들을 따지기보다는 다 뭉뚱그려서 하나의 풍경으로 인식하죠. 책 안에 있는 글자도 그래요. ‘가’는 이렇게 생겼고, ‘나’는 이런 모양이고, ‘A’는 요렇고, 하면서 글자 형태를 하나씩 보지는 않아요. 그런 각각의 모양새들을 한 문장, 한 문단으로 뭉뚱그려서 읽죠. 그런데 세밀히 관찰하면 ‘가’가 이렇게 생긴 이유, ‘나’가 이런 모양인 이유, ‘A’가 요런 이유가 다 있어요. 제각기 다 바르게 생긴 글자들이 책이라는 숲 속에 심긴 거죠.
송민호
우리가 보기엔 제멋대로 자라는 것 같아도, 식물마다 나름의 규칙이 있어요. 생존의 법칙이기도 하고. 잎살 안의 잎맥도 다 규칙대로 뻗어나가는 거거든요. 식물 관찰이 재미있는 이유이기도 해요. 자세히 보면 그런 규칙들이 보이거든요. 똑같은 환경에 놓여도 식물들은 각자도생해요. 각자의 규칙에 따라서. 비슷하게 생긴 애들도 아종(亞種)으로 세분화시켜서 관찰해보면 그 생존 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디자인이라는 행위도 규칙, 질서, 오더(order)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들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이 제각각이잖아요. 그 제각각이 깊어지면 철학이 되고 스타일이 되는 거죠. 식물이 자기 규칙에 따라 아종의 차이를 갖듯이.
전시장 입구에서는 〈In Limbo – 식물의 방〉을 소개하는 유일한 공식 텍스트를 읽어볼 수 있다.(어쩌면 이 인터뷰는 그것의 각주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윤민구와 송민호는 “수동적이고 정지된 존재라고 여겨지는 식물이 사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한다”라고 썼다. “무작위성으로 대변되는 자연 속 식물을 끈질기게 관찰”함으로써 “질서와 규칙을 찾아내 도식화한 과정이자 결과”가 이번 전시임을 부연해놓기도 했다. 전시장 입구와 가까운 바닥에 대문자 M이 세워져 있다. 조명을 등지고 선 M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대문자 X를 “힘 있는 알로에”라고 표현했다는 어느 관객의 후기에 기대며, 이 M이 꼭 거미처럼 보였다는 사족을 덧대본다. 내친김에, 거미를 사유한 어느 미술가의 문장까지 인용해본다. “오직 ‘우발적’으로 걸려든 먹이만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선택지가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 (자발성이 차단된) 신세. 그러나/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미는 모든 우발성(침입)을 받아들이는 데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요.” 홍명섭,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아트북스, 2017), 97쪽 그러고 보니 『신곡』에도 거미로 변해버린 아라크네가 등장했던가. 그래픽 디자이너와 글꼴 디자이너가 부려놓은 공간은 역시 림보가 맞았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