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나하나는 지금 쉬고 있다고 말한다. 이 인터뷰는 그가 쉬는 동안에 남긴 말들의 모음이다. 나하나는 조심껏 말하는 편이다. 상대의 말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자신의 언어를 고른다. 에디터는 그와 얘기하는 내내 에스프레소 머신을 상상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커피 맛의 책임자가 아니다. 원두를 고르고 그라인딩을 하고 적절한 진하기를 선택하는 등의 과정을 조용히 받아들일 뿐이다. 이 과정은 에스프레소 머신 입장에서 볼 때 ‘상대방의 일’이다. 이 일이 알맞아야만 에스프레소 머신 쪽에서도 성의를 보인다. off일 때나 on일 때나 이것의 입장과 태도는 한결같다. 상대의 행위를 가만히 기다리고, 그걸 침착하게 흡수한 다음 추출해 내놓는다. 나하나와의 대화도 그렇다. 누구나와의 대화도 이래야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커피를 내리듯 서로가 듣고 말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이 차별 없이 조명 받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한 디자이너의 말들을 잘 내려보려 했다. 시간을 들여 마셔볼 만한 좋은 인터뷰로 추출되었기를 바라며.
이번 인터뷰는 총 일곱 가지 물음과 답으로 전개됩니다. 음반으로 치면 트랙 리스트가 일곱 개인 셈입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과는 첫 만남이라, 우선은 인트로가 필요할 것 같아요. 1번 트랙으로 수록하고 싶은 작업, 그러니까 ‘2021년 3월의 디자이너 나하나’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업들과 함께 자기소개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브랜드 디자이너 나하나입니다. 최근에 퇴사한 핀테크 기업을 비롯해 여러 회사를 거쳤고, 지금은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쉬면서도 다음은 뭘 할까, 어떤 재밌는 사람들과 일을 해볼까 하는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는 저를 보며 웃음이 지어지네요.
사이드 프로젝트로는 여성 아티스트 플랫폼인 ‘Heavy Magazine’을 멤버들과 같이 운영하고 있어요. 작년에 프린트 이슈 『Heavy Magazine Vol. 1』을 출판하고 전시까지 성황리에 마치면서 짧은 휴식기를 가졌는데, 올해 다시 새로운 프로젝트로 부스팅을 해보려고 해요.
회사에 있을 때 진행했던 ‘Minimum Features’ 캠페인 브랜딩을 이번 인터뷰의 ‘1번 트랙’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회사가 서비스(제품)를 만드는 12개 원칙 중 Minimum Features라는 한 원칙을 극대화해서 팀원들에게 새롭게 알리는 인터널 캠페인이었어요.
메이커들은 12개 원칙이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지만, 익숙해진 탓인지 어느새 간과하는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일 지켜지지 않고 있는 ‘Minimum Features’ 원칙을 파격적으로 전달하자는 목적으로 볼륨을 크게 진행했어요.
3개 건물에 시트지, 포스터 10종, 월페이퍼, 현수막, 굿즈 등을 만들어 설치했고 사내 카페 바리스타 분들과 협의해서 캠페인 음료를 한 달 동안 출시하기도 했죠. 사내에서 인터널 브랜딩으로 이 정도 볼륨까지 시도해본 적은 없어서 기대가 컸었고, 임팩트 있는 메세지를 던지기 위해 프로파간다적인 표현 방법들을 고민했어요.
그리고 단순히 비주얼 파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캠페인이 정말 잘 워킹이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커뮤니티 팀과 함께 사후 설문을 만들어 배포하는 과정도 거쳤어요. 캠페인은 한 달 동안 진행했는데 내부 반응이 좋았던 것 같고(아마도요), 외부에서는 ‘금융 회사가 이런 비주얼과 임팩트를 뽑아낼 수도 있네?’라는 뉘앙스의 반응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소개’라는 키워드를 좀더 가져가보겠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나하나 사이트의 소개문 얘기를 해보려고요. I tend to / I don’t like to. 이렇게 두 갈래로 자신을 표현하셨어요. 저는 ‘tend to’보다 ‘do not like’의 문장들에 끌렸습니다. 제가 클라이언트라면 후자 때문에 작업 의뢰를 할 것 같아요.(웃음) 스스로 언급한 싫어하는 것들 중 첫 번째가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이던데요. 디자이너로서 누군가를 상처 받게 하지 않는다, 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사이트의 소개문을 보셨다니! 사실 업데이트를 못 하고 있어서 부끄러운 점이 많은 사이트예요. 소개문은 3년 전쯤 적은 것 같은데, 저도 다시 보니 새롭네요. 하지만 여전히 저 생각에 변함은 없어요. “I don’t like to hurt others”라고 적은 것은 디자이너로서의 입장보다는 사람 나하나로서 적은 생각이에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하고 저 또한 그런 존중을 받길 원하거든요.
나의 행동, 말, 습관 등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자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배려 없이 행동하는 분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경우들이 종종 있어서 저 또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디자이너로서의 입장도 비슷할 것 같아요.
디자이너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 예컨대 마감 기간이나 기본적인 퀄리티, 사회적 메시지, 환경, 비용, 사람들의 경험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죠. 물론 제가 이 모든 걸 완벽히 지키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각도에서 이해하며 바라볼 수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어요.
‘do not like’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내 작업에 책임감 없이 임하는 것’. 학부 시절을 비롯해 그동안 이런저런 매체들과 인터뷰를 하셨잖아요. 퍽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모습과 이야기를 노출해 온 셈입니다. 이런 경험은 ‘나는 타인에게 보여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일찍부터 심어줬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 결과로 ‘책임감 강한’ 태도를 갖게 됐을 것도 같고요. 책임져야 할 ‘내 얼굴’과 ‘내 발언’이 웹 공간에 계속 남아 있으니까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웃음) 디자이너 나하나가 지키고 싶은 ‘책임감’이란 어떤 것인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정확한 진단이에요. 뾰족한 질문을 받으니 갑자기 식은땀이 나네요. 사실 좋은 기회들이 있으면 무조건 잡고 보는 스타일이라, 이런저런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하지 않고 응해왔던 것들이 뒤돌아보니 꽤 많이 쌓여 있더라고요. 처음 몇 번은 ‘재밌으니까 해보자’라는 식의 설레는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두려운 감정이 더 크게 들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시간이 흐르고 보면 부끄러워 질 때도 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이 인터뷰 제안도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이제는 ‘재밌으니까 해보자’라는 것보다는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공유하는 게 더 조심스러워지고 그게 저와 제 주변인들을 다치게 하는 일은 아닌지를 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지키고 싶은 책임감은 그런 것 같아요.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 제가 지키고 싶은 존재들을 지키는 것.
2018년부터 아트 플랫폼 Heavy Magazine의 비주얼 디렉터로 활동 중이시죠. 인쇄물과 굿즈 제작, 여러 분야 아티스트들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Heavy Magazine을 시작한 계기와 목표, 그리고 아이덴티티가 ‘뱀’인 이유가 궁금해요.
Heavy Magazine은 포토그래퍼 금시원, 에디터 허지인, 그리고 디자이너인 제가 함께 시작한 플랫폼이에요. 저희는 각자의 본업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차별들을 느꼈고, 각종 혐오와 차별로 인해 더이상 소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어요.
소비와 생산 등을 모두 아울러서 안전한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고, 언더그라운드 아트 씬을 배경으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실력 있는 여성 작가들을 조명하기 위해 Heavy Magazine 플랫폼을 만들었어요.
Heavy는 ‘무겁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일본어 ‘뱀’을 읽을 때의 발음이기도 해요.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뱀처럼 한 모습으로만 머무르지 않는 형태를 상징하고 싶었죠. 자유롭고, 유연하고, 서로 모이고 무거워지는. 그로 인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We gradually become heavy and free.’라는 Heavy Magazine의 슬로건처럼요.
궁극적으로 저희는 Heavy Magazine이 없어도 되는 세상을 맞이하고 싶어요. Heavy Magazine이 더이상 특별한 게 아닌, 이런 플랫폼 자체가 당연하게 되어버리는. 더 많은 연대와 더 많은 응원, 그리고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이 차별 없이 조명 받는 시대가 오는 것을 꿈꿔요.
첫 번째 프린트 이슈 『Heavy Magazine Vol. 1』
매거진 디자인: 유현선·나하나
지난해 Heavy Magazine 플랫폼에서 ‘인스피레이션 클럽’이라는 일종의 디자인 토크쇼를 마련했었어요. 비주얼 디렉터로서 연사로도 참여하셨죠. 주제는 ‘디자이너가 목소리를 내는 방법’. 제 경우에는 목소리 내는 방법 못잖게 ‘어떤 목소리를 내야/찾아야 할까’도 늘 고민이거든요. 디자이너 나하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찾았고, 어떻게 내고 있나요?
제 목소리를 ‘찾았다’라기보다는 ‘내고 있는’ 중에 가까워요. 디자이너인 제가 제일 잘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디자인이거든요. 그래서 제 작업들로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Heavy Magazine의 디자인도 그런 맥락이죠. 회사나 개인 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사회적인 맥락과 본질적인 메시지에 크고 작은 혐오가 없는지 다각도로 관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상하게도 목소리를 내면서 더 조심스러워지고 무거운 책임감이 들더라고요. 전파되는 영향력에 대한 책임은 발언자에게 있고, 혹시라도 실수를 하면 어쩌지, 잘못된 생각과 발언을 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운 감정도 같이 들어요. 혹시 그런 일이 있더라도 문제를 객관적으로 꼬집어줄 수 있는 현명한 친구들이 곁에 많아요. 감사한 일이죠.
무거운 무게를 느끼면서도 제가 지키고 싶은 것, 그리고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키우고 싶어요. 어려운 일이고 아직 제 스스로가 떳떳하지 않지만요.
요즘 ‘찐’이라는 표현 많이들 쓰잖아요. 찐 스타, 찐 맛집, 찐 행복, 찐 찬스, ··· 아마도 ‘진정한’, ‘진짜스러운 게 아니라 진짜로 진짜인’, 대략 이런 의미일 텐데요. 그렇다면 디자이너 나하나가 생각하는 ‘찐 디자인’, ‘찐 디자이너’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제일 어려운 질문이네요. ‘찐 디자이너’라는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교과서적인 답을 하자면 폭넓은 시각과 견해를 갖고 문제를 꼬집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퀄리티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맥락과 ‘~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나하나적인 답을 하자면 ‘디자인을 사랑하고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를 알고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될 것 같네요.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인터뷰/애프터뷰」라는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수 년 전의 인터뷰이 분들을 다시 만나 그간의 변화와 현재 근황을 묻는 코너입니다. 만약 5년 후 「인터뷰/애프터뷰」로 저희와 다시 만난다면, 그때의 디자이너 나하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기를 바라세요?
이 인터뷰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부끄러워지지 않는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말뿐인 허울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상태였으면 좋겠고요. 5년 후에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타이포그래피 서울』 인터뷰어님과 독자 여러분이 그대로 모두 안녕한 상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