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지현은 5년차 그래픽 디자이너다. 정병규디자인, 오브젝트 생활연구소, 그레이오발(Grayoval) 등 디자인 회사를 거쳐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최근 스튜디오를 열었다. 디자인하는 K와 건축하는 H의 공동 작업 공간이라고, 디자인과 건축의 접점을 모색하며 만들어낸 공간이라고, ‘K’ 곽지현은 신생 스튜디오 ‘어스클라스(Earth-Class)’를 소개한다. “디자인하는 사람과 건축하는 사람의 접점으로써 어스클라스라는 새 공간이 열렸듯, 모든 접점은 무언가의 시작점”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지금 이 인터뷰도 그래픽 디자이너 곽지현과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접점’이 되겠죠? 자기소개를 그 시작점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안녕하세요. 디자인하는 곽지현입니다. 지금은 스튜디오 어스클라스를 운영 중이고, ‘보라보라섬’이라는 작업실의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디자이너로서 끼웠던 첫 단추는 북디자인 분야였고, 그렇게 단추들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다 보니 어느새 브랜딩도 하고 있고 기획 일도 하고 있고, 지금은 건축 영역까지 아우르는 스튜디오까지 운영하고 있고, ···. 그러합니다. 프로젝트에 따라 다른 회사나 전문가들과 협업도 하는데, 그럴 때는 ‘믿고 맡기는 디자인 인력’으로 통한답니다. 하하.
작은 회사와 소상공인을 위한 브랜딩 작업을 주로 하시던데요. 작은 것, 잘 보이지 않는 것, 소박한 것에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취향이나 스타일, 태도에 대해서요.
책과 편집물 위주로 작업을 하다가 몇 년 전 우연한 기회로 어느 닭 농장의 계란 상자 디자인을 의뢰받았어요. 처음 해보는 패키지 작업이라 욕심이 났죠. 농장 상황을 유심히 살펴봤더니 로고나 명함 등이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내친김에 전부 해드렸습니다. 디자이너 곽지현의 첫 브랜딩 작업은 이렇게 우발적(?)으로 시작됐던 것 같아요. 이후에 다른 농부 분들의 의뢰가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브랜딩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 성향이 좀, 뭐랄까, 다른 사람 얘기 듣는 걸 좋아라 하거든요. 타인의 사정에 완전히 푹 빠져드는 성향?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그렇습니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의 문제가 저의 문제가 돼 있더라고요.
디자이너로서 제가 지닌 기술 혹은 능력의 범위 안에서 해결책을 강구해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일을 맡은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저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농반진반 붙여준 수식어가 ‘크리에이티브 솔루셔너’, ‘만능해결사’라는 건데요. 저도 싫지만은 않습니다.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보다 제 자신을 좀더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요.
아, 그리고 꼭 작은 규모의 일들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최근에는 영화 관련 작업(아직 개봉 전이라 구체적으론 말씀드릴 수 없네요), AI 기술 기반의 회사 브랜딩 등을 진행했어요. 앞으로 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어서 브랜딩에 대해 요즘 ‘열공’ 중입니다.
타인의 사정에 그렇게나 공감을 잘 하는 성향이라면, 이런저런 사물과 현상을 봐도 그냥 못 지나칠 것 같은데요.
듣고 보니 그런 편인 것도 같고요. 다만, 사물과 현상이라기보다는 사물과 ‘현장’ 쪽에 관심이 많아요. 아니, 많아졌어요. 특별한 계기 덕분이었는데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에서 진행한 ‘책벽돌’이라는 협업 프로젝트입니다. 아시다시피 파주는 출판도시잖아요. 책 만드는 곳들이 모인 도시요. 조금 과장하면, 오가는 사람들보다 생산되고 폐기되는 책들이 더 많은 곳이랄까요.
‘책벽돌’은 파주출판도시에서 버려지는 책들을 추적하고, 폐지로 변한 책들을, 아니 책의 파편들을 짓찧고 다져서 벽돌로 만드는 프로젝트였어요. 창고와 파쇄장에 놓여 죽음을 기다리던 책들의 이미지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서점이나 학교에서 늘 ‘살아 있는’ 책들만 봐왔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책들을 목격하니까 충격이 컸어요.
‘책벽돌’ 프로젝트를 통해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현장들을 적극적으로 두드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저한테는 큰 전환점이었어요. 어떤 일을 맡게 되든 일단은 관련 현장을 직접 찾아가 감각해보기, 미처 보지 못했던 것에 관심 두기, 이런 태도를 갖게 해준 계기가 돼주었습니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에 관심을 둔다, ···가 지속 가능하려면 생활 환경이 뒷받침돼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러니까, 경제적 여건 말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아무래도 주변을 살필 여유가 부족해지니까요.
작업 잘하는 것만큼 견적서 잘 쓰는 게 중요하다고, 어떤 선생님이 조언해주시더라고요. 저도 동의해요. 제값을 받고 일할 때 그 일의 지속 가능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클라이언트 규모와 관계없이 의뢰받은 일에 대해선 합당한 금액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처음에 서로 동의하는 견적이 확정된 뒤에 일을 시작해야 관계가 잘 유지되더라고요.
이런저런 미팅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이 디자이너로부터 어떤 것을 얻게 될까’라는 게 늘 미지의 영역인 것 같더라고요. 쌀집에 가면 ‘킬로그램당 얼마’, 이렇게 가격이 딱 매겨져 있잖아요. 내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얻게 될 결과물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죠.
하지만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사는 일이 쌀집에서 쌀을 사는 것처럼 계량적일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얻을지 계산이 어려우니 작업료 책정도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제 경우는, 어떤 디자인을 얼마만큼 해드릴 수 있는지 클라이언트 분들에게 최대한 상세히 설명해드려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업료 얘기를 꺼내죠. 초반에 속시원히 예산에 대해 털어놓고, 예산이 적다면 해당 금액 범위 안에서 해드릴 수 있는 일들을 제가 먼저 역제안하기도 해요.
‘정병규디자인’에서 신입 시절을 보냈죠. 정병규 선생님은 ‘대한민국 1세대 북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지닌 분이잖아요. 루키 때 그런 분(말 그대로 ‘선생님’)과 일대일로 일한다는 게 흔한 경우는 아닐 텐데요. 디자이너 곽지현과 아트디렉터 정병규가 함께한 작업들, 그리고 두 분의 시간들이 궁금합니다.
정병규 선생님과 인연 맺은 지도 벌써 5년입니다. 지금은 정병규디자인 소속이 아니지만, 계속 안부를 전하면서 필요할 때 서로 일을 돕기도 하고, 날이 좋으면 괜찮은 전시를 함께 보러 가기도 해요. 그리고··· 선생님과 최근 함께 작업한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에요! 8월쯤 나올 것 같은데, 저도 엄청 기대하고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에서도 꼭 주목해주세요. 깨알 홍보입니다. 하하.
선생님이 까마득히 어려운 분이었던 적은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제게 선생님은 존경하는 디자이너, 위키백과 이상의 지식 사전, 동네 친한 할아버지 같은 존재입니다. 가끔은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선생님이 해맑은 표정으로 간밤에 새로 한 스케치를 보여줄 때나, 새로 산 책들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들에 대해 얘기할 때 특히 그래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선생님과 제 나이를 완전히 잊어버려요. 이따금 제가 너무 심하게 까분다 싶으면 선생님이 이러세요. “내 나이를 잊지 마라!”라고. 하하.
정병규디자인에서 처음 했던 일이,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라는 500페이지 넘는 책의 디자인이었어요. 재킷에 띠지에 케이스까지 있는 책을 처음 작업하다 보니 엄청 고군분투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한자들도 많았고요. 그때는 제가 인디자인 다루는 게 서툴렀거든요.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해서, 선생님한테 어려움을 털어놓고 말았어요. 그래도 선생님은 다 들어주시더라고요. 사진식자 시절에 글자랑 부호를 하나하나 오리고 붙여서 책 만들던 얘기도 들려주셨고요. 뭐랄까, 선생님은 저를 ‘회사 직원’이나 ‘가르칠 게 많은 후배’가 아니라, ‘동료’로 대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늘 그러시는 건 아니지만요. 하하.
정병규디자인에는 꼭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절대로 출근하자마자 일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언젠가 출근하고 곧장 컴퓨터를 켰다가 된통 혼난 적도 있답니다. 딴에는 ‘일하러 온 사람을 왜 일 못하게 하지?’, ‘바빠 죽겠는데 왜 그러시지?’ 하면서 이해를 못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셨어요. 바쁠수록 차분히 상황을 체크해야 한다, 그날의 마음과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일하기보다 더 중요하다, 라고요. 이 규칙은 지금도 제가 습관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공간 디자인: 건축가 황지훈, 사진 촬영: 박기수)
최근에 스튜디오를 열었죠? 이름은 ‘어스클라스’.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디자이너 K와 건축가 H의 공동 운영체더군요. K는 당연히 곽지현의 이니셜일 테죠. H라는 인물과 어스클라스에 대해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H의 정체는 건축가 황지훈 씨입니다. H는 탐험가 기질이 강해요. 자기만의 건축 지향점을 찾고 다듬기 위해 활동 범위를 계속 넓히고 싶어 하거든요. 건축 설계뿐 아니라 인테리어, 전시 공간 기획, 가구 제작 등 여러 영역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저에겐 스튜디오 공동 운영자이면서, 영감을 주는 동료이기도 해요.
H와는 오랜 시간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분야를 접목시킬 방안을 모색했어요. 디자인하는 K, 건축하는 H의 접점을 찾으려고 꽤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스튜디오 어스클라스를 공동 운영하게 된 것이고요. 물론, 고민과 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어스클라스의 작업 분야는 건축물 설계 및 감리, 공간 및 전시 디자인, 콘텐츠 기획과 그래픽 디자인, 출판물 제작과 디자인 등인데요. 차차 건축과 디자인을 아우르는 결과물들을 쌓아갈 계획입니다.
디자이너 곽지현과 스튜디오 어스클라스의 현 상황이 어떤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무슨 작업을 하고 어떤 준비를 하는지, 그런 작업과 준비로 어떤 미래를 끌어오고 싶은지 등등.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보라보라섬’이라는 공유 오피스를 최근에 마련했어요. 덕분에 한곳에 모여서 각자 작업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장점을 지닌 동료들로부터 저도 혜택을 많이 얻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지금은 H와 함께 조립가구 시리즈를 구상 중이에요. 어스클라스의 첫 번째 가구 프로젝트라 할 수 있겠네요. 가구로써 텅 빈 공간에 접점 형성하기, 공간을 채우는 가구가 아닌 새 공간을 여는 가구, 레이아웃보다 아장스망으로서의 가구, ···. 저와 H가 지향하는 가구에 대한 개념들을 계속 정리해가면서 제품을 개발하는 중입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던 K와 H가 한 접점에서 만나고, 그걸 통해 새로운 사건이 생성되듯, 조합 방식에 따라 그 형태와 사용성이 확장될 수 있는 모듈식 가구를 만들고 있어요.
저와 H가 가장 주목하는 주제가 바로 ‘접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접점은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로 비슷해서 접점이 생기는가 하면,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도 어느 순간 접점이 형성되기도 하죠. 일단 접점이 발생하고 나면, 반드시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기존의 것과 다른 디자인 결과물, 참신한 공간 작업 등등도 ‘접점’이라는 걸 통해 가능하리라 믿어요.
H와 K의 접점을 통해 스튜디오 어스클라스가 열린 것처럼, 모든 접점은 무언가의 시작점이에요. 그런 접점들, 시작점들, 가능성의 지점들을 가능한 한 많은 지구인들의 일상 속에 제공해드리고 싶네요.
어스클라스라는 낯선 이름의 스튜디오가, 곽지현이라는 디자이너와 황지훈이라는 건축가가, 이 지구에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이, 세대, 국적, 국경, 시공간 등등의 구분을 초월한 접접을 열어젖히기, 그래서 언제든 서로 만나고 피드백을 나누기. 이렇게 어스클라스는 지구의 평화를 기원하는 스튜디오랍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