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든 사람이다. 본인도 굳이 자신이 어떤 일을 한다고 특정하게 한정짓거나 구분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현대적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 김범준 작가를 만났다.
최근 어떻게 보내셨어요?
전주랑 서울이랑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전주 팔복동 일대에 공장단지가 있는데 팔복 문화단지로 조성하면서 팔복 예술 공장을 만들고 있거든요. 이번에 파일럿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어서 일대를 주제로 작업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고향이 전주이고 미술 작업한 지 10년째인데 작업을 시작한지 꽤 되었는데 전주에서 작업하게 된 건 처음이네요. 기대도 되고 설렘도 있어요. 거의 마무리 단계에요. 그리고 전시회가 얼마 전에 끝났고 예술인파견지원사업도 하고 있고 10월까지는 많이 바쁘네요.
다매체 작업을 하고 계신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자연스럽게 관심이 그쪽으로 흘러간 것 같아요. 대학도 매체 예술학과로 들어갔는데 커리큘럼이 사진, 비디오, 회화, 조각 등 두루두루 배우는 과정으로 짜여 있거든요. 그래서 이것저것 넓고 얕게 알지만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요(웃음). 보통 작가들 만나서 얘기하면 매체를 얘기하잖아요. 저는 회화 작가에요, 라든가. 그런데 다매체는 어떤 특별한 매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사실 개념이 더 중요해요. 자신이 생각한 개념에 맞는 매체를 갖다 쓰는 거죠.
개념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주제에 접근하세요?
일단 그냥 제가 작업하는 스타일은 이래요. 가만히 있거나 뭘 하다가도 문득 뭔가 생각이 나요. 그럼 작업노트에 적어요. 시간 날 때마다 작업노트를 들춰보며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라고 보다가 흥미가 느껴지는 것을 중점적으로 리서치를 해요. 리서치 한 것에 생각을 덧붙여 살을 붙여두고 그냥 보내요. 그러다 시간이 나면 또 보고, 거기에 다른 생각들이 또 나면 리서치를 하고, 다시 살을 붙이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무르익으면 작업으로 끌어내요. 제가 좀 게을러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놓은 게 작업노트에 빼곡히 쌓여 있어요(웃음).
얼마 전에 끝난 전시회는 어떠셨어요?
인도네시아 작가들과의 교류전이었는데 첫 번째로는 인도네시아 작가들과 공통점을 찾고 싶었어요. 길고양이가 생각나더라고요. 길고양이는 세계 도처 어디에나 있잖아요.
두 번째로는 문래동이라는 지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어서 지역과 연계를 하고 싶었죠. 그래서 <문래동 길냥이 그리기 대회>를 작업으로 잡았어요. 주변 상인들이나 주민들이 길고양이를 그리거나 영상으로 찍거나 소리, 문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콘테스트를 열려고 했죠. 동네 길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지역과 친해질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 전에 사전작업으로 내가 먼저 동네 길고양이랑 친해져야 되겠다, 싶어서 길고양이들이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간식을 준비하고 길고양이 분장까지 했는데 처음엔 얘들이 도망가더라고요(웃음).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장난도 하고 친해졌어요. 그 과정을 영상작업으로 만들었어요.
그는 일상과 작업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 일상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작업에 녹이고 작업은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채 작업 자체가 삶이 된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작업이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어떤 건가요?
가족에게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는 기획이었는데 가족을 모이게 해서 현대미술이란 무엇이며, 제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얘기를 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나를 환영한다는 플랜카드도 만들어서 걸어두고. 미술사조 전체를 쭉 둘러보고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에 주목했죠. 마지막엔 제 작업도 보여드리고요.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더라고요. 그러시더니 마지막엔 이걸로 밥 먹긴 힘들지 않겠냐고…(웃음). 2차 작업은 내년에 하려고 하는데 제 개인전 때 아버지를 도슨트로 모실 생각이에요. 아버지를 설득하는 과정부터 영상작업을 해서 실제 전시회에서 오신 분들께 제 작업을 설명하시게 하려고요.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계획을 아직 모르고 계세요.
일상과 작업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점이 재미있네요.
작업에서도 그렇고 삶에서도 그렇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경험이에요. 내가 경험하지 않을 걸 상상해 볼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면, 외계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잘 보면 다 어디서 본 것들이거든요. 전혀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건 힘들다고 봐요. 그래서 새로운 작업도 상상력도 우선적으로는 경험이 중요하죠.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업 키워드가 있으신가요?
대학원 다닐 때 과제 중에 자기 작업에 대한 키워드를 나열하라는 게 있었어요. 그 때 나왔던 것들이 시스템, 근대, 반항하기, 경험을 공유하기였어요. 지금도 이 키워드는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아요. 가족들 앞에서 설명회를 연 것을 작업화 했던 것도 근대와 가족이라는 시스템과 연관되고요. 그러다 보니 시스템에 반항하는 면이 작업에도 녹아나는 것 같은데 거대한 반항이라기보다는 소소한 반항이에요.
시스템에 대한 반항 자체를 작업으로 하진 적은요?
지방에서 올라와서 이사를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일 년이나 이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더라고요. 구역을 많이 옮겨 다녔는데 짐을 다 싸고 나면 종량제 봉투가 항상 남는 거예요. 사회적 편의라는 명목 하에 시스템을 만들고, 거기에 돈을 지불하고, 이게 다시 쓰레기가 되는 점에 교란을 한 번 초래해봐야겠다 싶어서 집 앞에 있는 쓰레기를 들고 나갔죠. 다른 구역에 가서 쓰레기를 버리고 그곳에 있는 쓰레기는 다른 구역에 가서 버리는 과정을 영상작업으로 남기고.
예술가의 운명은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면이 있을 터, 그의 삶-작업은 스스로 환영받는 존재가 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어떤 위로를 준다. 이것은 이대로 괜찮다고. 당신은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나 또한 그렇다고.
삶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것 같아요. 개념을 어떻게 실행가능하게 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고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울 때도 생각은 24시간 돌아가니까 머리가 아파요(웃음). 사실 그런 게 꽤 오래 걸려요. 작업 그 자체는 오히려 쉬운데 생각을 구현하는 방법들은 찾고 또 찾아야 하니까요.
생각이 계속 어떻게 발전해서 방법으로 구현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그런 점에선 한 작품에서 쓴 것이 다음 작품과 연결되기도 해요. 지금 하고 있는 전주 작업도 작년 당인리 발전소에서 했던 작업과 이어지거든요. 작년에 당인리 발전소를 문화공원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5일 동안 터빈을 멈추고 예술가들을 불러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외부인에게 공개된 것은 40년 만에 처음이라 하더라고요.
40년의 역사와 새로운 만남과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비닐봉지 안에 로봇 청소기를 넣어서 발전소 안을 굴러다니게 했어요. 비닐봉지에는 풀로 성장과 발전이라는 글씨를 써넣어서 먼지를 묻게 했죠. 소비사회의 상징인 검은 봉지 안에 모든 것을 흡입해서 섞어버리는 로봇청소기를 탑재해서 먼지를 아카이빙 하는 방식이었는데 과거와 미래의 교차하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거죠.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은 어떤 건가요?
엄청나게 많아요. 그래도 주제나 방향은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죠. 내년 개인전 준비가 당장 큰일이네요.
작가로 살아가고 싶은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냥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하는 거. 예전에 선생님들이 우스갯소리로 해주신 말씀 중에 진짜 작가가 되려면 마흔까지는 가야 된다. 그 전에는 다른 일로 전향을 할 수 있는데 마흔 넘으면 전향을 하고 싶어도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 다른 일을 못한다고(웃음). 오글거리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가로 태어났고 작가가 운명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까 싶어요.
설령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뇌 구조는 작가일 거예요. 세상에 예술가는 꼭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저를 포함해서 꼭 자신일 필요는 없는 거죠.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작업 충실히 하면서 오래 버티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