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타자를 두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건 당사자에겐 상당히 실례되는 일이다. 이 코로나 시국,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인터뷰 대부분을 비대면으로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인터뷰이들에게 얼마간 죄의식(?)을 갖고 있다. 인터뷰어로서 성의껏 인터뷰이에 대해 학습하고 상상해 질문지를 전달하는 일이 어떨 때는 ‘누군가를 멋대로 대상화하기’처럼 느껴져서다. 1인 스튜디오 ‘개미그래픽스’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김은지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일말의 죄스러움이 담긴 질문지를 이메일로 전송했다. 에디터는 첫 질문부터 대단한 무리수를 두었는데, 영화 〈앤트맨〉 시리즈의 캐릭터 ‘와스프(Wasp)’를 닮았다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버린 것이다. 개미그래픽스라는 스튜디오의 디자이너에게, 개미가 등장하는 히어로물 캐릭터를 운운하며 인터뷰 운을 뗐다. 다행히, 에디터가 무턱대고 던진 주제어 ‘개미’를 김은지는 잘 받아주었다. “개미그래픽스의 개미는 여왕개미가 아니라 일개미”라는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여주며. 매사 일개미처럼 일한다는(그래서 스튜디오명도 ‘개미’라 지었다는) 그래픽 디자이너는, 싱거운 인터뷰 질문 하나에도 기어이 열의를 다해 살을 붙이고야 만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니죠. ‘뵙는’ 건 아니네요. 코로나 19 때문에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한 거니까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아마 피식 웃으실 것 같은데요··· ‘개미그래픽스’라는 스튜디오명이 하도 기억에 남아서, ‘디자이너 김은지’에 대해 요상한 심상을 떠올렸더랬습니다. 영화 〈앤트맨〉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 ‘와스프’ 같은 인물이 아닐까 하고요.(네, 웃으셔도 괜찮습니다.)
뜬금없이 ‘와스프’ 얘기를 꺼낸 건 단지 스튜디오명에 ‘개미’가 들어가 있어서만은 아니에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각종 웹문서들을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지만요), 디자이너 김은지는 상당한 ‘독립적 주체’ 같았습니다. 이른바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분들 중에 독립적이지 않고 주체적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되겠냐만, 제가 말씀드리는 ‘독립성’과 ‘주체성’은 좀더 글자 그대로의(literally) 의미입니다. 돌려서 표현하려니 말이 계속 빙빙 도네요. 그러니까, 왠지 디자이너 김은지는 ‘혼자서 잘 해내는’ 혹은 ‘혼자서 완전한’ 쪽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클리셰 같은 표현을 굳이 써보자면 ‘강인한 여성’에 속하는 분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했던 민간 여성 파일럿 조직 이름이 와스프(WASP: Women Airforce Service Pilots)였다는데, 그래서 이래저래 〈앤트맨〉 ‘와스프’의 이미지도 오버랩됐던 듯하고요.
개미의 군집생활이 오류 없이 작동하는 이유는 개미들 각각의 독립성과 주체성이 확고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경우도 자존감이 무너지면 회사생활(사회생활)이 어렵잖아요. ‘개미’를 표방한 스튜디오명의 맥락도 그와 비슷하지 않나 추측(이기보다는 차라리 억측)해봅니다. 개미처럼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디자이너, 개미의 군집생활처럼 클라이언트들과 원만한 관계를 다져 나가는 디자이너.
첫 질문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웃음) 2017년부터 스튜디오를 운영해 오신 줄로 압니다. 이제 곧 5년차로 접어드는 셈인데요. 개미그래픽스는 어떤 스튜디오이며, 디자이너 김은지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소개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길게도 늘어놓은 저의 ‘멋대로 상상하기’에 대한 반론을 덧붙여주셔도 좋습니다.
안녕하세요. 개미그래픽스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김은지라고 합니다. 우선 이야기 주신 저에 대한 추측이 너무도 재미있습니다.(웃음) 제가 의도하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부분들이지만, 원하는 이미지를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주셔서 앞으로 에디터님의 이야기를 인용해야 할 것 같아요. 특히 ‘혼자서 잘 해내는’, ‘혼자서 완전한’ 부분이 저와 함께하는,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스튜디오 이름의 시작은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해요. 제 오랜 별명이 개미였습니다(개미처럼 생겨서···). 그리고 김은지라는 이름이 흔해서 제 스스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차라리 ‘개미’라 자칭합니다. 스튜디오 이름을 지으며 가장 쉽게 나를 표현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보니, 직관적으로 ‘개미’가 들어가게 된 거예요.
‘일개미’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스튜디오 운영 초반엔 개인 작업 욕심보다 의뢰받는 일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개미그래픽스는 일개미 같은 스튜디오예요. 일이 영순위인 스튜디오, 독립적 개체지만 집단의 구조 속에서 자기 역할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스튜디오. 그래서 여왕개미 말고 일개미로서 계속 나아가는 중입니다. 저는 잠깐 쉴 틈이 생기면 불안해지더라고요. 이름을 개미라 지어서 이렇게 일이 많은 것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듣는데,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하.
국립현대미술관(MMCA)을 위한 작업들이 꽤 많아 보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오고 있다는 뜻일 텐데요. 디자이너가 한 클라이언트와 장기간 관계를 지속하는 사례가 그리 흔한 건 아니잖아요. 독일에서는 미술관과 디자이너가 수 년 동안의 ‘장기 계약’을 맺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해외의 사정이고, 한국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경우 같아요. 클라이언트의 만족도와 더불어서, 작업자 스스로의 즐거움과 발전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당사자이신 김은지 디자이너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상호 만족하는 과정과 결과의 바탕은 뭐니 뭐니 해도 신뢰죠. 그런 면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제게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큐레이터 님, 코디네이터 님, 디자이너 님과 함께하는 동안 신뢰 관계가 구축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리한 요구가 아닌 합리적인 의논을 하고, 대체로 쌍방향으로 프로세스를 맞춰가니까 결과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흘러온 것 같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필름앤비디오, 레지던시, 전시,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틀어 적어도 1~2년을 함께한 관계자 분들이 많아요. 클라이언트보다는 협업자에 더 가까운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한 프로젝트 끝난 뒤에 또 저를 찾아주신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이전 프로젝트에 대한 또 다른 결과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저한테는 다음 작업을 위해서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나 꼭 필요한, 그리고 감사한 원동력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외에도 1년 이상 합을 맞춰가는 곳들이 많아졌어요. 주홍콩한국문화원과 수원시립미술관이 그런 케이스예요.
올 10월에 열렸던 전시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의 그래픽 작업을 담당하셨지요.(TMI입니다만, 이 전시에 참여하셨던 김용관 작가님을 올 초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이 정말 흥미로웠던 것이, 단순히 반려견 동반 입장이 가능할 뿐 아니라 개를 엄연한 ‘관객’으로 모셨다(!)는 점인데요. 그래픽 작업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디자인적으로 어떻게 ‘개-관객’을 고려하셨는지 알고 싶어요.(웃음)
주제가 워낙 명확해서 작업 풀어내기가 수월해 보였는데, 직접 참여해보니 만만하지 않더군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개를 보여주는 방식의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라는 고민이 가장 컸습니다. 전시가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진 만큼, 전체적인 아이덴티티 통일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리플릿의 안내문, 전시장 레이블 및 픽토그램 등 자칫 지나칠 수 있는 부분들까지 메인 아이덴티티를 적용해 디자인했습니다. 길종상가에서 작업한 사이니지에도 전시 아이덴티티를 접목했고요.
메인 포스터의 경우, 개가 인지할 수 있는 색상인 노랑·파랑으로 주조색을 썼는데요. 이렇게 개의 생태적 특성까지 고려한 부분은, 전시 참여자 모두가 개라는 동물을 연구한 내용들의 일부이기도 해요. 월 텍스트와 레이블을 기존 전시에서 부착하는 높이보다 의도적으로 낮게 잡았는데, 이 또한 개-관객을 고려한, 아니 배려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겐 조금 불편하겠지만, 개-관객들의 관람 경험 만족도를 위해 포기할 수 없었어요.(웃음)
제가 담당한 그래픽 디자인뿐 아니라, 공간 디자인, 가구 디자인, 전시작 모두 반려견의 입장을 헤아린 결과물들이에요. 개가 올라가도 되는 비디오 작품, 마킹이 가능한 작품 등 일정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형식이 아닌, 개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참여자 모두가 함께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이 전시도 앞서 말씀드렸던 탄탄한 협업 구조의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안건들은 항상 담당 큐레이터 님, 디자이너 님과 의논해서 진행했어요. 또 전시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분들과 긴밀하게 협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유의미한 작업이었어요. 외부 요인으로 준비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다행히 관람객과 반려견 동반 방문하는 최초의 기획대로 개최되어서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최근에 모 디자이너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종교인에 관한 디자인 작업을 진행 중인데, 인물 탐구를 너무 깊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매료가 돼버려서 해당 종교에 귀의하고 싶어진다고요. 저로서는 내심 공감했습니다. 비슷한 사례도 찾아보면 적잖을 것 같고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Banksy)를 취재하다가 별안간 그래피티를 시작하게 됐다는 ‘미스터 브레인워시’도 그런 경우일 테죠.
김은지 디자이너님의 경우는 문화 예술 분야의 작업을 많이 진행하셨잖아요. 여러 예술가들의 창작열이나 작가 정신 같은 요소들도 폭넓게 접하셨을 것 같습니다. 혹시 ‘모 디자이너’와 같은 순간을 경험하신 적은 없나요? 디자인이 아닌, 다른 예술 분야에 적을 두고 싶어졌다거나 하는.
아직 타 분야에 적을 두고 싶은 경험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네요.(웃음) 그래도 확실한 건, 예전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긴 했습니다. 그건 어떤 특정 분야이기도 하고, 전시 준비 과정에서 마주치는 많은 분들의 존재 자체이기도 합니다.
질문 주셔서 생각해보니, 그런 경험을 못 해본 데에는 개인전보다 단체전 작업을 더 많이 해서인 듯하네요. 한 인물을 깊게 들여다보기가 아닌, 다양한 인물들을 짧게 요약하기 쪽의 작업들이 다수였어요. 욕심 같아선, 한 인물의 회고록을 꼭 디자인해보고 싶습니다.
코로나 시국은 디자이너의 실무 과업 범위도 얼마간 바꿔놓고 있는 것 같아요. 또 한 번 모 디자이너의 얘기를 인용하면(앞서의 ‘모’와는 다른 분입니다), 본래 계약은 전시장 배너·리플릿·도록 등 인쇄물 작업으로 맺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해당 전시가 온라인으로 대체되면서 갑작스럽게 난생 처음 ‘유튜브 섬네일’이란 걸 제작해봤다고 하더라고요. 김은지 디자이너님도 전시 관련 작업을 다양하게 하셨던 터라, 현 시국을 ‘실무적’으로 체감하실 것 같습니다. 이 어수선한 시절, 어떻게 관통해 나가고 계시는지요.
코로나 19로 시작해 코로나 19로 끝나는 한 해인 것 같습니다. 지난해와 다르게 과업과 스케줄 변동이 많았어요. 전시를 예로 들면, 참여 스태프들의 고민이 ‘이걸 어떻게 완료할까’가 아니라 ‘이게 열릴 수는 있을까’로 대체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1인 스튜디오 운영자라서 일정 관리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편이거든요. 이 부분을 지키는 게 올해는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음··· 이를테면 각기 다른 시기에 의뢰가 들어온 작업들이, 코로나 19 탓에 보류됐다 재개됐다 하면서 마감 시점이 모두 비슷해져버렸어요. 작업량 조절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말씀하신 예처럼 전시가 유튜브 송출로 여럿 이루어지다 보니까, 저 역시 온라인 이미지를 많이 제작한 것 같습니다. 전시 쪽 인쇄 홍보물은 제작 부수도 확연히 줄었어요. 초청장이나 초대권 제작이 아예 취소되는 상황도 있었고요.
다들 이런 시국이 처음이라 서로를 잘 이해해주었다고 할까, 과업과 일정 변동에 대한 대처는 대체로 유연했던 것 같아요. 올해 코로나 19를 겪어낸 문화 예술계는 2021년에 과연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내심 두렵기도 합니다.
개미그래픽스, 그리고 디자이너 김은지의 2021년 계획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울러, 원 모어 퀘스쳔.(웃음) 인스타그램 계정의 프로필 이미지 말입니다. 개미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우선 인스타그램 프로필 이미지는··· 제가 저랑 관련한 것들은 굉장히 직관적으로 선택하는 편이라서요.(웃음) 일개미에 대한 무료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무리 지은 일개미들보다 두 마리가 대화하는 듯한 이미지(현재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시선이 갔습니다.
아까 첫 질문 때 에디터님이 언급한 ‘군집 생활’과 ‘독립적 주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요. 일개미는 다수로 움직이지만 사실은 독립적으로 자기 일을 처리하는 특징을 갖고 있잖아요. 저는 다수의 일개미들보다는 독립된 개미의 모습을 더 선호합니다. 하지만 혼자서 일을 해내는 개념이 아니라, 협업의 관계 속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이미지로 상징화하고 싶었어요.
휘발되지 않기. 새해 목표입니다. 디자이너로서 휘발되지 않고, 작업도 휘발되지 않는 방향을 모색하고 싶어요. 그래픽 디자이너의 많은 일은 한 번의 프로젝트가 지나면 휘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물성이 없는 작업의 경우는 더 그렇죠.
이런 부분이 다른 지점에서 어떻게 상쇄될 수 있고 지속성을 띨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를 겪다 보니 아무래도 ‘자생’을 화두 삼게 되는데요. 그 첫 단계로 내년엔 스스로 휘발되지 않는 지점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