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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 9호 미리 보기 #5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타이포그래피 매거진 『the T』 9호 미리 보기 ―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글. 박상순

    발행일. 2017년 07월 24일

    『the T』 9호 미리 보기 #5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9호(혁신호) 중 
    ‘문자 · 활자 · 타이포그래피’ 섹션에 수록된 에세이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the T』 제9호에서 전문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가을 저녁, 린다와 나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이제 막 출발하고 있는 열차를 아쉽게 떠나보냈다. 린다는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는 시인이다. 그녀와 나는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 승강장 안전문 옆에 있는 15행 분량의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린다에게 나는 그것이 한 편의 시라는 것을 알려줬고, 지하철역 곳곳에 일반 시민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가 설치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혹시 누군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들보다는 더 문학적인 작품들로 바꿔야 한다는 비판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린다는 미소를 지었고, “어떤 나라에는 오직 한 가지 메시지만이 도시 전체에 가득하다”라고 내 말을 받았다. 그녀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청소년기 이후 프랑스에 정착했다. 과거의 루마니아는 북한을 자신들의 발전 모델로 삼았던 나라였다. 린다의 표정은 그 시절의 여진이 루마니아에, 또는 어떤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때로는 한 사회의 인식이나 지향 가치, 또는 일정한 수준의 대중적 취향이 문학성보다 강하게 힘을 발휘한다. 이런 현실은 수용자 중심의 행위로 보이지만, 어떤 세력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지배력과 피지배력 사이의 힘, 바로 헤게모니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 시와 관련한 비판이 또 하나 있었다. 원로 시인들이 젊은 시인들의 시를 비판한 일이다.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공유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이것은 지배력과 피지배력 사이의 문제이면서도, 한 시대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학이나 예술에 관한 심층적 해독의 문제다. 어떻게 합의하고 조정하여 한 줄의 문장, 한 편의 작품 속에 내재한 문학적·사회적 가치를 정의하고 표현하고 해독할 것인가? 이것은 문학에 관한 논의를 넘어 표면적인 문자 기호 속에 자리 잡은 한 시대나 사회 인식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문학적·문화적 논제를 가지고 문자와 활자라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00년대 중반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불과 한 세대 이전까지 세계의 매스미디어와 사회교육 정책은 사회통합과 문맹률 감소를 위해 매진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사회교육과 사회통합 정책 수행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고, 신문이나 잡지, 서적 등의 활자 매체는 보다 분석적이거나 심층적인 목표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들 매체의 기반은 언어나 문자 해독 능력이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인구 중 상당수는 중등교육 이상을 받지 못했고, 문자 교육조차 못 받은 이들도 많았다. 이제 그런 시대를 넘어 국민 대다수가 문맹을 극복했다. 문자 해독 능력은, 일차적으로는 기본 정보의 습득을 통한 생활 개선에 기여하지만, 인간 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시대적·국가적 목표의 기틀 아래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문자로서의 문화는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향상시켰고, 더 나은 인간적 가치의 실현에 기여했다.

    프랑스 시인 린다가 떠난 며칠 후, 나는 마치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던 방식으로 거리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공사 중’, ‘금연’, ‘4번 출구’, ‘우측통행’, ‘CCTV 촬영 중’, ‘화장실 30미터’ 등 수많은 문자 표지판이 내게 편의를 제공했다. 아울러 그런 문자와 정보들이 나의 행위를 조정하거나 통제했다.

    나는 그런 정보 속에 있으며, 그런 정보를 문자화하고 활자화하는 사회 속에 있다. 동시에 어떤 방식의 정보를 선별적으로 유통하는 하나의 체제 안에 있다. 우리말에 전라도식이나 경상도식처럼 프랑스어로 프로방스식(Provençale)이라는 말이 붙은 요리 역시 타 지방에 비해 재료나 향신료의 사용 방식이 다르다. 이처럼 문자나 활자로 드러난 정보는 그 속에 문화적·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고기 패티를 올린 간편식 빵을 지칭하는 미국의 ‘햄버거(Hamburger)’는 19세기 국제무역항이었던 독일 함부르크(Hamburg) 사람들 방식의 고기 요리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우리말의 ‘흥청망청(興淸亡淸)’이나 ‘어영부영’처럼, 낱말들은 저마다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과거의 시간은 뒤로 물러서고 새 시대가 등장하면서 언어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동시에 한 줄의 문장은, 낱말은 한 시대의 정신적 표상이 된다. 어떤 말들은 사라지고 어떤 말들이 새로 태어나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사회 또는 지배력, 또는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에 따라 언어와 문자는 한 시대의 인식을 담아낸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다른 선진 국가들과 나란히 문맹의 시대를 극복했고, 활자 배치 방식을 유럽이나 미국 방식인 가로쓰기로 바꾸었고, 다양한 디지털 폰트의 개발 등으로 정보 유통의 기계적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개성 넘치는 글자꼴들이 등장해 새로운 세대의 감각을 표현하는 데도 선택의 폭을 넓혔다.

    그동안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것은 유럽이나 미국식 사회 발전 지향과 문맹률 감소 시대의 과제에 불과했다. 문자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을 위한 것이었다. 읽기와 쓰기,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였다. 한때 단순한 수준의 서예 교습이나 펜글씨 교습이 대중화됐던 시절에는 제대로 잘 쓰는 기술이 필요했다. 양식이나 서식을 작성하는 서기 또는 필경의 시대였다. 사람의 손을 통한 기술이 타자기나 컴퓨터 자판으로 옮겨졌다고 해도 이것은 모두 ‘쓰기’라는 동일한 과정이다.

    활판이나 전산사식기 시절의 이런저런 소소한 역사를 관통하는 명제 역시 ‘사회적으로 바로 쓰기’였다. 크게 보면 모두 문맹 극복 시대의 과제였다. 이 시절의 핵심은 ‘명확하게, 그리고 읽기 쉽게 만드는 것’, 바로 가독성(Readability)이다. 디지털 폰트가 나타나고 타자기와 컴퓨터 자판이 등장했다 해도 손가락을 무려 열 개쯤이나 사용해야 하는 쓰기 기술에 불과하며, 디지털 복제와 저장 기술이 더해졌다 해도 이것 역시 원형적 기호(기본 문자형)에 관한 운용 기술로서의 ‘쓰기와 읽기’인 것이다. 다양한 서체 개발을 통한 어떤 가치의 향상이라는 측면도, 거시적 관점으로 보자면 원형의 문자형에 관한 ‘쓰기’ 기술이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의사 표현은 물론 사상과 감정을 기호로 옮기는 것을 쓰기라고 보는 까닭에, 문맹 극복 시대를 넘겼는데 오히려 논술이 강조되고 최근에는 한국의 모든 대학에서 글쓰기라는 과목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중등교육 국어 과정은 논리적 읽기를 강조하고 있다. 문자 운용에 관해 과거와는 조금 다른 관점이 등장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맹을 벗어났고, 온갖 정보를 담은 문자들이 소통되고 있음에도 다시 ‘쓰기’라는 문제가 등장했다. 과거에는 다하지 못했던 다른 관점으로서의 쓰기, 즉 ‘글쓰기’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본래의 기능 가운데 문자의 일차적 운용에 머물렀던 문맹 극복 시대의 과제에서 문자 운용의 심층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한 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제 문자는 문맹 극복의 시대를 넘어 심층적인 읽기와 쓰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라보고 있다. 아날로그 활자나 디지털 폰트가 과거 문맹 극복 시대의 과제를 대변한 것이었다면, 우리의 타이포그래피는 이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전망은 가능한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 시대가 문맹 극복을 달성했지만 여전히 또 다른 문맹적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읽기’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하철 승강장에 설치된 시편들과 현대시의 불가독성에 관한 일부 의견을 다시 떠올려보자. 하나의 체제가 일정한 수준과 방향을 가지고 지배적인 힘에 의해 어떤 정보나 가치의 유통에 관계할 때, ‘읽기’는 이해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것이 된다.  


    글. 박상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시인 겸 북디자이너, 출판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음사 대표이사, 펭귄클래식 한국어판 대표 편집인,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보르헤스 전집』, 『천 개의 고원』 등 국내외 문학 및 인문학 서적을 디자인했으며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2009),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 등을 출간했다.(silk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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