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9호(혁신호) 중 ‘특집 · 한국 디자인 생태계 1 ― 1950~1960년대 영화 타이포그래피’ 섹션의 좌담 내용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the T』 제9호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950~1960년대 한국의 영화 타이틀,
한글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시작
참석
정병규(정디자인 대표), 유정숙(타이포그래피 연구가), 최지웅(프로파간다 대표)
진행
정재완(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정리
임재훈(『타이포그래피 서울』, 『the T』 편집팀 에디터)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 〈황야의 결투〉가 된 까닭
정재완
1950~1960년대 한국 영화 포스터에 보이는 타이틀은 우리의 지난 시각 문화와 오늘과 내일의 문자문화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활자 내지는 문자의 이미지성을 논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제인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의 장, 담론의 장이 디자인 생태계, 즉 한글 타이포그래피 생태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정숙
50~60년대에 국내 개봉한 영화 중에는 일본에서 먼저 선을 보였던 것들이 많았어요.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거죠. 영화 잡지, 포스터의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에도 이런 영향이 미쳤을 것이라 봅니다. 영화 포스터뿐 아니라 영화 잡지에 나타난 제호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한국 영화 잡지의 계보를 살펴보면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지웅
아무래도 그랬을 겁니다. 유정숙 선생님께서 짚어주신 것처럼, 일본에서 먼저 수입 개봉한 외화들이 한국으로 많이 넘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일본어로 번역됐던 포스터들이 다시 우리말로 번안되는 경우가 있었죠. 한자로 된 타이틀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많았는데요.
예를 들어 ‘~의’가 쓰인 한글 외화 포스터들을 보면, 특히 한자 타이틀에서 우리말의 ‘의’에 해당하는 일본어의 ‘の(노)’를 그대로 ‘의’로 바꾼 흔적이 남아 있어요. 〈制服の處女〉에서 〈制服의 處女〉(제복의 처녀, 1958년 국내 개봉)로, 〈惡人の土地〉에서 〈惡人의 土地〉(악인의 토지, 1959년 국내 개봉)로 된 것처럼요.
정병규
〈荒野의 決鬪〉(황야의 결투)는 우리나라에서 1956년에 개봉했죠. 원제는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My Darling Clementine)〉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어 제목을 〈荒野의 決鬪〉로 바꾼 것은 일본의 선례를 따른 결과입니다. 일본 상영 당시 제목이 〈荒野の決鬪〉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모방’이라기보다는 ‘영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본 역시 그 시작은 서양에 대한 모방이었지만, 문화 수입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특한 자국 문화를 생성하게 됐죠. 서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의 영화 포스터 디자인과 타이틀 번역, 타이포그래피의 처리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문화의 흐름과 영향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태도를 벗어났으면 합니다. 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죠.
최지웅
그 시절엔 영화관이나 수입사에 도안실이 따로 있었어요. 오늘날의 디자인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포스터를 포함한 온갖 영화 광고를 다 만들었죠. 재미있는 점은, 외화 포스터를 만들 때 만약 오리지널 자료가 부족하면 한국의 화가들이 직접 이런저런 요소들을 창작해 그려 넣기도 했다는 거예요.
정재완
아, 그러고 보니 최지웅 실장님이 오늘 커다란 가방을 가져오셨던데요. 무거우셨겠습니다.(웃음)
최지웅
제가 그동안 수집했던 영화 포스터 자료들이에요. 특히 오늘 주제인 영화 타이틀 타이포그래피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 재미있는 것이 ‘ㅈㅇ’이라는 표시입니다. 이건 당시에 포스터를 인쇄하던 회사 이름이에요. ‘ㅈㅇ’은 ‘중앙’이라는 사명입니다. 이 시기에 고려인쇄소와 중앙인쇄소에서 포스터가 가장 많이 인쇄됐다고 합니다.
정재완
타이틀들을 살펴보니, 활자를 사용한 것보다는 ‘그린’ 것과 ‘쓴’ 것이 많이 보이는 점이 먼저 눈에 띕니다.
최지웅
그리고 시대가 변하면서 한글 맞춤법이 조금씩 달라지는 점도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유정숙
수입된 외화의 경우, 일본에서 먼저 상영된 영화는 당연히 우리가 참고를 했겠죠. 영화의 제목, 포스터 디자인, 영화 타이틀 타이포그래피 처리에 있어서, 이미 상영됐던 일본 영화가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사정을 전달해주는 번역자가 일본어 정보를 잘못 옮길 경우 그 오역과 탈자가 그대로 한국어 번안에 반영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에요.
최지웅
저는 지금도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할 때 50~60년대 작업을 적극적으로 참고하는 편이에요. 당시 포스터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이때 영화 포스터 제작에 참여했던 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한국 영화에 디자이너 크레딧이 생긴 게 80년대 후반이거든요. 그 전까지는 익명이었죠. 누가 작업했는지 몰라요.
또 아까 잠깐 말씀드렸던 것처럼 당시에는 지방 극장마다 도안실이 따로 있었어요. 지방별로 영화 포스터 디자인이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영화 타이틀이라는 용어를 영화판에서는 ‘영화 로고’ 혹은 ‘영화 로고타입’이라고 부르는데요. 지금은 영화 로고타입과 포스터 비주얼이 한 가지로 통일돼 있지만, 초창기에는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기도 했어요. 지방 극장의 도안실과 그때 작업자들과 관련한 자료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생깁니다.
유정숙
영화 포스터와 함께 극장간판은 당시 중요한 영화 홍보 수단이었죠. 극장 입구와 그 주변에 웅장하게 그려진 극장간판은 영화의 흥행을 위한 매우 직접적인 홍보 수단이었습니다. 간판화가들 중에서는 백춘태라는 분이 그나마 구체적으로 소개됐던 것 같은데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발행한 『의성 성광성냥공업사와 극장 간판화가 백춘태』라는 책에 이분의 이야기가 실려 있더라고요. 대한극장, 단성사 등 당시 유명한 극장의 간판은 이 백춘태 선생님이 모두 그리셨다고 해요.
정재완
영화 포스터 타이틀 쪽은 아니지만, 그런 숨은 작업자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잠깐 말씀드리고 싶네요. 얼마 전 아파트 글자와 관련한 책 『아파트 글자』(사월의눈, 2016)를 낸 적이 있습니다.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서 글자를 쓰신 분의 이야기도 실었는데요. 그분이 말씀해주신 작업 과정이 참 재미있었어요. 만약 아파트 이름이 ‘광명’이면, 그냥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올라가서 직감을 바탕으로 ‘광명’이라고 큼지막하게 썼다는 거예요. 전적으로 작업자의 경험을 토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죠.
브랜드 아파트의 경우엔 로고타입이 정해져 있잖아요. 이럴 때는 일단 샘플을 참고해서 외벽에 글자를 쓰는데, 그런 와중에도 작업자의 개성이 표현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브랜드 아파트인데 어떤 데 가보면 글자가 직각이고, 옆 동네는 곡선 처리가 돼 있는 식이죠. 글자를 그리는 사람이 그때그때 다르게 한 거예요.
최지웅
그런 작업자들에 대한 관심이 50~60년대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의 외화 수입이 제일 많았던 시기가 1950년대라는 점이에요. 1952년에 66편이던 것이, 한국전쟁이 휴전된 해인 1953년부터 100편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통계 자료를 보면 1952년부터 1959년까지 외화 수입 편수가 1,045편이나 돼요. 그만큼 작업자들의 활동도 활발했을 거예요.
한국전쟁 이후로 영화는 대중문화의 선봉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의 본격적인 보급 이전이었다는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듯해요. 그리고 서양 영화의 경우에는 컬러화, 시네마스코프, 70밀리 필름 등 대형 화면의 등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광고와 홍보물 또한 영화전단, 신문광고, 극장간판, 예고편 상영 등으로 매우 다양해졌죠. 인쇄기술도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작업자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린 글자, 쓴 글자
정재완
1950~1960년대 한국의 영화 포스터에 나타난 타이틀을 지금 살펴보고 있는데요. 그러면 이제, 이 영화 포스터 타이틀을 중심으로 한글의 이미지성과 타이포그래피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최지웅
영화의 얼굴이 포스터라면, 포스터의 핵심은 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도 바로 이 로고예요. 로고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그 영화의 장르나 분위기를 알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런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현장에서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다양한 로고들이 등장했던 1950~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어요. 일본이나 서양의 영화 타이틀에 표현된 특징들을 우리 식으로 재창조해보는 과정이 그 출발점이었던 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정숙
당시 서양의 영화 포스터에 발현된 알파벳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던 한국의 작업자들에게 좋은 레퍼런스 역할을 해주었을 것 같습니다. 서양의 알파벳 레터링을 참고한 한글 레터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었을 거예요. 이것을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계보 정립을 위한 새로운 접근의 한 국면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터링의 역사는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와 상통하기 때문이죠.
정재완
아까 최지웅 실장님 자료들을 보면서 잠깐 말씀드리기도 했는데요. ‘그린’ 글자와 ‘쓴’ 글자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한글 레터링과 캘리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로 연장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서예와 구분되는, 그러니까 하나의 상업화된 붓글씨를 일반적으로 이르는 말이 ‘캘리그래피’죠. ‘손글씨’, ‘손멋글씨’ 같은 용어들도 있고요.
정병규 선생님께서는 『디자인네트』 2003년 9월호 좌담에서 붓글씨와 캘리그래피(손글씨, 손멋글씨)를 통합하는 용어로 ‘솜씨체’를 제시하시기도 했죠. 그렇다면 우리가 한글 레터링을 논할 때, 과연 이 ‘캘리그래피-손글씨-손멋글씨’, 더 광의적으로는 ‘솜씨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유정숙
이번 좌담을 준비하면서 50~60년대, 더 거슬러 올라가 30~40년대 한국의 영화 포스터에 표현된 한글 타이틀을 면밀히 들여다봤습니다. 저 역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입장입니다만, 당시 영화 포스터의 타이틀을 작업했던 분들처럼 무명의 존재로 한글 레터링 작업을 해왔던 분들을 깊이 접해보지는 못했어요.
이 사실은 제게 레터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했습니다. ‘과연 레터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죠.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서양의 용어인 레터링을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이식하려면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레터링의 창작성 혹은 예술성을 긍정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한글 캘리그래피의 경우도 넓게는 레터링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글 캘리그래피는 작업자가 한글을 통해 나름의 개성적인 창작성을 표현한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지웅
방금까지 말씀하셨던 캘리그래피와 레터링이 한국의 영화 포스터 로고에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간 캘리그래피 로고를 사용한 포스터들이 갑자기 우후죽순 쏟아졌었죠. 감성적인 작품이나 거친 액션물에 주로 쓰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캘리그래피 로고는 많았지만, 현대적인 스타일의 캘리그래피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포스터가 그 시작이었다고 봅니다.
1990년대 이전의 캘리그래피가 전통적인 서예를 따르는 형식이라면, 2000년대 이후의 캘리그래피는 좀 더 디자인적인 형식이라고나 할까요. 캘리그래피가 유행하니까 클라이언트들도 영화 내용이나 콘셉트와는 상관없이 일단 로고는 캘리그래피로 작업해달라고 많이 요청했어요. 한 10년쯤 되니까 대중이 피로를 느끼게 됐죠.
그 이후로 다시 레터링으로 작업한 타이틀이 유행하게 되고요. 또 김기조 씨 작업을 계기로 영화 포스터에 복고풍 레터링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캘리그래피 시대가 가고 복고풍 레터링 시대가 온 거죠.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도 인기를 끌었고요. 그런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정재완
이렇게 맥락을 짚고 나니 50~60년대 영화 포스터의 로고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김기조 씨의 레터링 작업은 그 형태적 유전자가 70~80년대부터 이어진 것이겠죠. 그런데 젊은 세대에게는 참신한 트렌드로 읽히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레터링이 한국 디자인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것처럼. 레터링 계보와의 연관성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기를 죽이자는 것은 아니에요. 자신이 시도하는 작업의 원류, 그 끈을 어디에서부터 잡아나가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장을 누군가는 마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들 스스로 현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 역할인 셈이죠.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한국 현대 디자인의 역사를 새롭게 살펴보자는 의도로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의 생태계라는 장에서 얘기하는 가장 큰 이유 아닐까요.
다시 그려보는 한국 디자인의 지도
정병규
‘지도’라는 말이 좋네요. 그러면 지금부터 그 지도를 좀 더 넓혀봅시다. 한국 현대 디자인의 출발을 산업화 시대의 광고로 보는 게 일반적인데, 정말 그럴까요? 생산자 위주의 디자인 프레임, 디자이너 ‘출신’이 만들어낸 것만 디자인이라는 시각을 조금만 비껴가면 한국 디자인의 장이 훨씬 폭넓어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50~60년대가 한국 현대 디자인, 특히 넓은 의미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실질적인 출발 지점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묵묵히 만들어냈던 그 숱한 결과물들. 오늘날 우리 디자이너들에게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한 그 작업들. 그것들이 디자인이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그것들은 당시 민중의 삶이자 에너지였죠. 이런 기틀 잡기야말로 ‘디자인 생태계’를 말하는 이유입니다.
정재완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관하여 이런 가설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활자 조판을 통한 본문 타이포그래피 영역이 19세기부터 이루어졌다면, 제목체를 활용한 한글의 새로운 이미지성 탐구는 50년대 영화 타이틀, 영화 로고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유정숙
확실히 당시 영화 포스터에 시도됐던 제목체 작업은 한글 타이포그래피 역사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최지웅
일반 광고 분야에서도 레터링과 캘리그래피는 쭉 있었지만, 대중과 좀 더 친숙해지게 된 시작은 역시 영화 포스터가 아닐까 싶어요. 파급력이 큰 매체니까요. 특히 50~60년대 영화 로고 작업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재완
솔직히 당시 영화 포스터 자료들을 보면서 감탄했어요. ‘이때 이런 걸 했다니’ 하는 놀라움이었죠. 저한테는 그 시절이 왠지 아무 것도 없고, 정상 생활이 어려울 것만 같은 이미지였거든요. 아무래도 저는 전후 세대니까요. 우리의 타이포그래피 연구가 이 시기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활자 조판을 통한 본문 타이포그래피 영역이 19세기부터 이루어졌다면,
제목체를 활용한 한글의 새로운 이미지성 탐구는 50년대 영화 타이틀,
영화 로고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최지웅
이런 자료들을 보기 전에는 그 시대가 전쟁 이후, 그저 가난한 시절인 줄로만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통계 수치만 봐도 50년대 외화 수입 편수가 제일 높아요. 당시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다닐 만큼의 문화생활은 누리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영화가 대중오락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음에 따라 포스터나 전단지 같은 홍보 수단 관련 수요가 계속 이어졌을 테니 디자인 작업량도 그에 비례했을 거예요. 이때부터 한국 현대 디자인의 새로운 모습이 구체적으로 소비자,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정숙
저 또한 이 시기 영화 타이틀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시각적 표현 에너지가 의외로 풍부했다고 할까요.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최지웅
일제강점기에도 물론 한자와 한글 로고의 영화 포스터들이 존재했지만, 다양성 측면에선 1950년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돌아봐도 이미 50~60년대에 모든 디자인적인 시도가 다 망라됐던 것 같아요. 활자체 혹은 솜씨체만 봐도 그렇죠.
정병규
1950년대 한국의 문화를 논할 때 전쟁이라는 키워드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에는 아군과 적군 간의 전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전시 중에는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한국전쟁을 예로 들면, 참전국이었던 미국이 미디어 전략가들을 대동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왔어요. 이때 미국인들이 남겨놓은 사진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쟁 치르러 오는 건지 사진 찍으러 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기록’ 과정에는 저절로 디자인이 따라옵니다. 기록물들은 기록과 함께 표현과 전달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죠. 그런 과정에서 디자인이 필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기에 영화 또한 선전, 미디어 도구로 기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미국의 방송 및 영화 기술자들이 한국에 넘어와 활동하기도 했고요. 전시 상황의 민간인들에게 투여하는 일종의 마취제로서 영화가 활용됐다는 정치적·전략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스펙터클 영상 문화가 이 시기에 시작됐다는 가설을 세워보면 어떨까요. 한국 영상 문화의 현대적 유전자라고 할까, 그런 특성을 논할 때 한국전쟁부터 출발해보자는 것이죠.
정재완
50년대를 ‘미국적 대중문화와의 직접적인 만남의 시기’라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선 어떤 기점이 마련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병규
중국과 비교하면 좀 더 차이가 선명해질 겁니다. 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미국 문화를, 나아가서 서양문화를 직접 만났죠. 중국의 경우엔 마오쩌둥이 미국 문화를 차단했어요. 일례로 중국인들은 지금도 ‘디자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잖아요. ‘설계(設計)’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같은 말도 조금 낯설어 합니다. 서양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좌담 참석. 정병규
1946년생.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에콜 에스티엔느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민음사 편집부장 및 아트 디렉터, 홍성사 주간, 서울올림픽 전문위원,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회장, 한국영상문화학회(KAVIC) 회장, 중앙일보 아트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정병규디자인 대표이고 저서로 『정병규 북디자인 1977-1996』, 『정병규 북디자인 1997-2006』 등이 있다.(pedem777@naver.com)
좌담 참석. 유정숙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독일 부퍼탈(Wuppertal) 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디자인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한글공감』(2010)이 있고 현재 윤디자인그룹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typoyoo@empas.com)
좌담 참석. 최지웅
1976년생. 강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전공을 졸업했다. 현재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propaganda.co.kr)를 운영하며 영화 포스터뿐만 아니라 TV 드라마, 공연, 영화제, 기획전, 블루레이 패키지 등 엔터테인먼트디자인의 전방위에서 활동하고 있다.(choijw21@hanmail.net)
좌담 진행. 정재완
1974년생.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 정병규디자인 디자이너, 민음사출판그룹 북디자이너를 지냈다. 현재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이며 출판사 사월의눈(aprilsnow.kr)을 공동운영하고 있다. 공저로 『세계의 북디자이너 10』(2016)과 『섞어짜기』(2016)가 있고 한국디자인학회, 기초조형학회, 한국타이포그래피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jjwank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