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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 9호 미리 보기 #1 예술 + 기술 =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매거진 『the T』 9호 미리 보기 ― 「예술 + 기술 = 디자인」


    글. 리처드 홀리스
    옮김. 강경탁

    발행일. 2017년 07월 17일

    『the T』 9호 미리 보기 #1 예술 + 기술 = 디자인

    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9호(혁신호) 중 
    ‘번역’ 코너에 수록된 글 「예술 + 기술 = 디자인」 일부를 옮겨 온 것입니다.
    『the T』 제9호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새로운 그래픽 형식  

    현대주의 그래픽디자인 이론과 실천을 다룬 가장 유용하고 동시대적인 기술(記述)은 『시선 포착(Gefesselter Blick)』이라는 책이었다. 하인츠 라슈와 보도 라슈(Heinz and Bodo Rasch)가 편집하고 1930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출간된 이 책의 서문은 그래픽디자인에 대해 가장 일찍, 가장 명쾌하게 언급한 예에 속한다.

    “… 얼마간 촘촘한 이미지들의 그리드, 마치 필름처럼. 필름은 이미지에 의해 해석된 작용이다. 텍스트는 단지 상징적 기호들을 계승한다. 이미지는 근본적이며, 기호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미지에 관해, 카메라는 보는 이의 눈으로 행동해야 하며, 주의를 집중시켜야 한다.”

    라슈 형제는 26명의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작업 및 성명을 수집해 책에 담았다. 사실상 러시아를 제외한 전위예술가 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 수록된 작업은 몇몇 공통점을 지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래픽디자인에서도 살아남은 특징이다. 예상하는 것처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작업은 대칭적이지 않으며, 산세리프체를 사용하고, 삽화는 그림이 아닌 사진이다. 초기 바우하우스 작업의 전형적인 강조선과 띠, 줄이 사용되고 있으며, 인쇄공들이 사용하던 선은 뚜렷한 목적, 특히 표로 이뤄진 목록에서 범주를 구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나중에는 기술 혁신도 이뤄졌는데, 가령 조악했던 이미지 합성은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속으로 녹아드는 몽타주 기법으로 전환되었다. 가장 공통으로 재현된 형식적 특성은 판 두스뷔르흐로부터 영향을 받고, 스하이테마나 츠바르트 같은 네덜란드 디자이너가 자주 사용했던 사선이었다.

    1930년 유럽의 선도적인 전위 디자이너들이 참여한 『시선 포착』의 표지
    바우하우스와 일부 현대주의자들은 소문자로 된 그로테스크 서체 외에, 
    독일어 문자에 불필요한 대체자나 전통적인(흔히 블랙레터나 고딕으로 알려진)
    프락투어와 일반 로마자의 대소문자 등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위예술가들의 작업에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다. 예를 들어 구성주의 기하학 형상들, 특히 사각형이나 원이 고르게 사용되고 있다. 사각형은 종종 중심 요소였다. 전위예술가들은 디자인에 담긴 메시지에 집중하기 위해 장식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추상적 요소들, 선과 점들이 인쇄공이 사용하던 전통적 장식을 대체했다.

    텍스트에 관해서는, 우선 제목은 모두 대문자로 조판됐었다. 바우하우스가 물었다. “우리는 말할 때 대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데 왜 인쇄물에서는 대문자를 사용해야 하는가?” 대문자가 없다면 조판은 간결해질 수 있었다. 타자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대문자가 독서에 일정한 도움을 준다는 점이 알려지기 전의 일이다. 현대주의 교리 가운데 더 오래 지속된 것은 산세리프체만 사용한 조판이었다. 현대주의 디자이너들의 작업에서 세리프체는 좀처럼 보기 어렵지만, 이는 종종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인쇄소에 따라 제약을 받기도 했다. 석판인쇄로 찍은 포스터에서는 일찍이 툴루즈 로트레크(Toulouse-Lautrec) 같은 미술가들이 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레터링을 할 수 있었다. 아방가르드 포스터의 레터링들은 종종 강한 기하학이 요구될 때에만 손으로 그렸고, 그렇지 않은 경우 대개 상업 광고물에 쓰인 형태를 따랐다.

    기술, 사진, 복제  

    치홀트는 추상 미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새로운 형식의 인쇄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진이었다. 모호이너지는 1925년 바우하우스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회화, 사진, 영화(Painting, Photograph, Film)』에서 새로운 시각언어 문법을 제시한 바 있으며, 1929년 독일공작연맹의 기획으로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영화와 사진(Film und Foto)〉에서 중책을 맡았다. 사진은 구상 회화의 회화적 비전을 위한 매개물로서가 아닌, 새로운 보기의 방식이자 객관적인 기록을 위한 기계적 수단으로 제시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포토몽타주 특별전이 마련되었는데,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와 소비에트 디자이너-사진가들의 작업이 여기에 포함됐다. 

    사진은 전위예술 작업을 위한 이미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석판술(Photolithography)이나 그라비어인쇄(Gravure Printing), 망판을 사용한 사진 제판처럼 이미지를 재현하는 기술의 전파에도 영향을 미쳤다. 금속활자의 돌출된 표면에 잉크를 묻혀 찍는 전통적인 활판인쇄 기법은 책과 같은 작은 규격이나 브로슈어와 같은 대부분의 잡다한 인쇄물에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기법이었다. 포스터에는 커다란 나무 활자가 사용되었지만, 이미지의 크기는 제판을 위한 망판의 최대 크기로 제한되었다. 간단한 형태나 단색은 라이노컷(Linocut)으로 인쇄되기도 했다. 

    금속활자가 직사각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활판인쇄로 찍는 디자인물의 기저에는 본질적으로 수직 수평 구조가 자리했다. 인쇄 과정에서, 단락의 글줄은 사각형 틀 안에서 간격을 조정하는 재료들로 고정되었다. 글줄을 사선으로 고정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전위예술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인쇄공들이 사용하는 기성 장식 요소 – 가운뎃점[흔히 총알(Bullet)로 알려진], 사각형, 손가락 표시, 별과 화살표 – 를 만지작거리거나, 선 굵기를 조절하기 위해 기다란 나무 혹은 금속 자를 이용했다. 네덜란드 건축가 헨드리퀴스 베이데펠트(Hendrikus Wijdeveld)는 노골적으로 거의 인쇄공의 재료로만 포스터를 조판했다. 

    19세기에 발달한 석판인쇄는 레터링과 본문을 한 번의 인쇄 공정으로 결합해주었다. 사진은 글과 이미지를 필름으로 결합해 인쇄면으로 옮기는 일을 가능케 했다. 미술가가 석판에 직접 디자인을 그려 넣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디자이너가 만든 작업물을 인쇄소의 전문 도안가가 복제하는 일이 잦았다. 원본 그림을 구현하는 그들의 숙련도는 대단했는데, 종종 포스터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사진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 묘사된 그림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스텐베르크 형제(Stenberg Brothers)가 영화 장면을 발췌해 만든 유명한 포스터들이 그 예다.

    그라비어인쇄는 삽화가 많은 잡지나 포스터 인쇄에 주로 쓰인 공정이다. 석판인쇄에서는 잉크가 평평한 돌이나 아연판 표면에서 흡착되는 반면, 그라비어인쇄에서는오목하게 새겨진 이미지와 글 안으로 잉크를 밀어 넣고, 부분적으로 종이에 잉크가 흡수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잉크를 충분히 머금을 수 있어 흔히 나타나는 망점 없이 사진을 재현할 수 있게 해준다.

    [왼쪽] 세자르 도멜라(César Domela)가 디자인한 전시 카탈로그 표지(1931).
                 도멜라는 화가이자 ‘새로운 광고디자이너들 동우회’ 회원이었고, 『시선 포착』에도 작품을 수록했다.
    [가운데] 스텐베르크 형제(Vladimir Stenberg, Georgii Stenberg)가 디자인한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감독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Man with a Movie Camera)〉 포스터(1929).
                 베르토프가 개척한 필름 몽타주 기법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미지들은 스틸 사진을 다시 그린 것이다.
    [오른쪽] 스위스 인쇄 산업지 『튀포그라피셰 모나츠블래터(Typografische Monatsblätter)』 표지(1933) 

    양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과 오늘날의 그래픽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이미 러시아에서 컬러 사진술 이 개척됐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천연색 인쇄가 부재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작업 중 소수만이 셋 이상의 색상을 사용했고, 많은 경우 검정과 빨강으로만 인쇄됐다. 천연색 효과를 내기 위해 디자이너들은 두 가 지 혹은 세 가지 색상을 기발하게 중첩 인쇄하는 기술을 사용했고, 인쇄 롤러 에 다양한 색의 잉크를 발라 무지개 효 과를 내는 전통적인 인쇄 기법을 활용 하기도 했다. 

    어떤 인쇄 공정을 택하든 작업이 끝난 삽화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거의 차이 가 없었다. 제판을 위해 디자이너들은 사진, 삽화, 글씨와 함께 인쇄 지시사 항을 커다란 백색 보드에 중첩된 시트 위에 붙여야 했다. 대개 불투명한 흰색 페인트를 안료로 쓴 에어브러시는 사 진 가장자리를 흐려 몽타주의 이음매 부분을 감추거나 구름 효과를 주는 ‘비네팅(vignette)’ 효과를 내는 데 사용되었 다. 디자이너들은 잘라낸 이미지에서 배경이 보이지 않게 윤곽선 주위를 페 인트로 마감해야 했다. 

    전위예술가들이 사용한 공통 기법과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래픽 작업은 하나의 양식으로 대변되지 않 는다. 비록 같은 태도를 공유했지만, 작업에 임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 고, 일관되지 않았으며, 다수는 새로운 시대의 매스커뮤니케이션 및 기술과 씨름하면서도 회화 작업을 지속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표현 방법은 모두 국경을 넘나들었다. 예컨대 이미지 사용을 지양하고 기초적인 기하학 형태나 포토몽타주 기법을 실천하는 움직임은 서유럽과 러시아에서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예술가들은 직업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떠돌았다.

    일반 대중들은 전위예술가들의 혁신에 반발했고, 인쇄 산업에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면면이 도입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독일에서는 히틀러 정권이 예술가들을 ‘퇴폐적’이라 핍박함에 따라 전통적인 레이아웃과 가장 국가주의적인 양식인 ‘고딕(프락투어)’ 서체로의 회귀가 발생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리시츠키 같은 예술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먹는 그래픽을 만들도록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주의는 살아남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스위스에서 다시 부상했으며, 많은 실천가(특히 헤르베르트 바이어와 라디슬라프 수트나르)가 미국으로 망명해 이를 발전시켰다. 20세기 전위예술이 남긴 그래픽디자인 유산은 오늘날에도 발견할 수 있다. 신문에서, 광고판에서, 기업이나 기관의 브랜딩에서, 통신판매 카탈로그에서, 심지어 도로 위의 사인에서도 말이다.


    글. 리처드 홀리스(Richard Hollis)
    영국 출신의 그래픽디자이너로 예술 잡지 『New Society』의 아트 에디터를 지냈다. 그의 베스트셀러 『Graphic Design : A Concise History』(1994)는 국내에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2000)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옮김. 강경탁
    성균관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했다. 스튜디오 TEXT와 워크룸 등에서 디자이너로 일했고, 2015년부터는 작은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리처드 홀리스의 저서 『About Graphic Design』의 한국어판 공역에 참여하고 있다.(gyeongtak@a-g-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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