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10호(혁신2호) 중 ‘특집 · 한국 디자인 생태계 2 - 문자의 이미지성’ 섹션의 좌담 내용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the T』 제10호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문자의 이미지성 ― 한글·서(書)·기술
참석
김남시(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부장),
이지원(국민대 디자인대학원 교수), 전가경(디자인저술가)
진행
정재완(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정리
임재훈(『타이포그래피 서울』, 『the T』 편집팀 에디터)
글자를 ‘드로잉’한다는 말
정재완
아마 보통의 사람들에게 ‘문자의 이미지성’ 아니면 ‘한글의 이미지성’이라는 것을 얘기한다면, 설명이나 이론에 의탁하지 않더라도 캘리그래피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 같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뭔가 형태가 있는 것 같고, 독특한 느낌이 들 테니까요. 캘리그래피의 대중화 현상을 달리 표현하면, 붓을 쥐고 싶어하는 대중이 늘어났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동국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서(書)라는 가치가 회귀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이 생각을 좀 더 확장해본다면, 붓 외의 다른 도구들로 자신만의 개성을 글자에 담아보려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표현욕구가 요즘의 다채로운 한글 레터링 작업으로 발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지원
캘리그래피는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죠. 글자가 어떤 식으로든 ‘형태’로 드러나면 이미지로서의 성격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캘리그래피는 그렸다기보다는 썼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여기에도 당연히 이미지성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동국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서書 개념을 들으면서 좀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서書는 전통이 깊죠. 오랜 전통은 안 좋은 방식을 걸러내고, 전승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 남김으로써 그 분야의 경지를 높입니다. 탁월함에 점점 다가가서 궁극의 핵심만이 남는다고 표현해도 될까요. 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 오랜 민족의 요리에는 깊은 맛이 있죠.
이런 맥락에서 최근 꽃피기 시작한 캘리그래피는 앞으로 비평적인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레터링, 나아가서 폰트만 해도 그래픽디자이너와 타이포그래퍼는 매우 까다롭게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캘리그래피라 하면 그 까다로움은 간데없고, 단편적인 감상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전가경
저도 이동국 선생님 말씀을 좀 이어보겠습니다. 붓이라는 것은 컴퓨터보다 훨씬 더 신체에 밀착되어 있는 도구이고, 가장 원초적인 도구라고 볼 수 있는데요. 몸의 흘림과 강도에 따라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면에서는 가장 신체에 밀접한 도구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이동국
서가(書家)들은 붓을 내 몸의 확장으로 생각해요. 따로가 아니고. 더 나아가서는 그 연장선상에서 만이 글씨가 ‘살아 있다’, ‘기운생동(氣韻生動)한다’는 서론(書論)의 핵심도 이해 가능합니다. 소동파는 살아있는 글씨를 사람의 신(神)·기(氣)·골(骨)·육(肉)·혈(血)로 봤죠.
전가경
4차 산업혁명, AI 등이 이제는 피부에 와 닿는 시대가 된 상황에서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도 충분히 신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몇몇 디자이너들은 ‘글자를 드로잉(drawing)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흥미로웠습니다. 디지털 도구 자체가 하나의 붓이 된 것이죠.
‘그리기’라는 이 신체적인 행위가 디지털 기기와 만나 새롭게 수용되면서 그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캘리그래피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월간 『미술세계』 글에서 이동국 선생님도 도구가 꼭 붓일 필요는 없다고 쓰셨더라고요. 그렇다면 그 이후의 도구와 그로부터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서書의 정신은 무엇일지 궁금해지더군요.
이동국
제 글을 세심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붓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쓴 것은, 서書라는 개념 혹은 가치의 본질을 먼저 알자는 제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문자의 이미지성 측면에서, 서구의 펜글씨와 동양의 붓글씨인 서書의 가장 큰 차이는 선(線, line)과 획(劃, stroke)의 구분입니다. 이 획이 서書의 핵심입니다.
볼펜과 붓이 있다면, 볼펜은 라인에 최적화된 도구입니다. 다섯 명이 볼펜으로 한 줄을 그으면 다섯 줄 모두 획일화된 라인입니다. 그런데 붓은 다섯 명에 따라 다섯 가지의 전혀 다른 획이 그어지죠. 이 차이가 성립할 수 있다면 붓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맥락에서 ‘도구가 꼭 붓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선, 라인의 특징은 익명성입니다. 볼펜으로 그은 한 줄에서, 그 볼펜을 쓴 사람을 읽기란 어렵죠. 즉 ‘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표준화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나’가 ‘나’임을 보여주고 확인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書로서의 쓰기일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에크리튀르 개념과도 이어지리라 봅니다. ‘나’를 담아 힘들여 쓴 한 획이 모여 문자라는 전체 구성을 이루게 되니까요.
정재완
선과 획의 구분은 문자의 이미지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가치척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서양에서의 쓰기 전통은 어떤지 궁금해지는데요.
김남시
이집트 문자나 중국 문자 같은 비서양 문자들을 서양인들이 수용하면서 어떤 이론들을 생성해냈는지를 연구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중국 문자의 경우는 11~12세기부터 서양에 알려졌는데요. 재미있는 점이, 당시 서양인들이 중국 문자를 바라봤던 시선 속에는 알파벳에 대한 자기이해가 전제돼 있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스스로 알파벳 문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가 변화함에 따라 중국 문자에 대한 서구적 시선도 바뀌게 됩니다.
이교도 문화에 대한 초기의 신학적 의심(iconoclasm)이 순수 표음문자라는 알파벳 이해와 결합되어 있었다면, 서구 문명에 대한 자기비판의 시기에는 알파벳의 빈곤함과 추상성의 담론이 중국 문자의 형상성에 대한 엑조티즘(exotisme)적 찬미와 결합되지요.
문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문자는 단순히 기호일 뿐이라는 시각과 문자는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후자 쪽의 사례가 더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알파벳 단어는, 단어 자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사이에 엄밀한 연관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이 둘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관계가 있죠. 이걸 문자 자체가 그런 형태와 모양이 될 만한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연성’, 독일어로는 ‘Motiviertheit(모티비어트하이트)’라고 합니다.
동양문자, 특히 한자가 더 직접적으로 세계와 관련돼 있고, 알파벳 같은 다른 문자들은 노미널(nominal)하다는 관점인 셈인데, 이런 서양인들의 생각은 18~19세기 아시아에 대한 엑조티즘이 부활하면서 더 크게 일어났어요.
근원적 오류, 동서양 문자의 이분법적 이해
이동국
상형문자가 갖는 특징이군요. 지금부터 3500여 년 전 은허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나 종정문(鐘鼎文) 자체가 신화시대 정치행위를 복점(卜占)한 기록물이죠. 다시 말하면 근본 제사장(祭司長)이 하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잖아요. 신성문자(神聖文字)죠.
김남시
그렇죠. 상형문자를 연구할 때 저는 뭔가 신학적, 철학적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을 하곤 했어요. 한자를 들여다보면 세계의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 같은 거요. 제 개인적으로는 그런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문자이건 간에, 문자라는 것은 하나의 기호 시스템이고, 따라서 그것이 대상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문자의 이미지성 차원에서 동양 문자가 알파벳보다 훨씬 열려 있고 풍성하다는 이분법적 관점은 어쩌면, 예전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슷한 사고방식이 역으로 우리에게 들어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메이지 정부의 초청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강의했던 에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 1853~1908)가 쓴 『The Chinese Written Character as a Medium for Poetry』(19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미지적이고 시적 풍부함을 지녔다는 한자를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따라서 시적으로는 빈곤한 알파벳과 대비시키는데, 이런 식의 대비는 이후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에까지 이어집니다. 문제는, 한때는 동양 문화에 대한 칭송과 결부되어 있던 이런 이분법이 순식간에 동양, 나아가 비서구 문화의 원시성과 낙후성의 담론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두 태도 모두 문화적 타자화의 소산인 것이죠.
전가경
동양 문자와 알파벳, 한글과 로마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말자는 의견에 저도 동의를 하는데요. 마생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최초에 모든 문자는 이미지였다’라고 했죠. 이를 증명하려고 어마어마한 자료를 수집하고, 실제로 보여줬습니다. 요즘 독일의 매체학 같은 분야에서 논의되는 것을 보면, 그동안의 문자에 대한 관점이 상당히 음성중심적으로서 문자를 등한시했다고 하는데, 막상 실제 자료를 보면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서양의 자료를 보면, 분명 중세 혹은 그 이전부터 문자를 이미지로 봤던 흔적이 남아 있고, 알파벳도 최초에는 상형성을 띠었다는 기록도 있죠. 그것이 그리스 시대로 넘어가면서 효율적인 무역을 위해 문자화되었다는 말도 적혀 있고요. 문명의 전개 과정에서 동양 문화권이든 서양 문화권이든, 애초의 태고적 고유한 세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의 간체가 그런 사례가 아닐까요.
요즘 세대는 로마자와 한글을 같이 습득하면서 성장하잖아요. 이런 환경에서 자란 디자이너들 입장에서는 ‘무엇이 더 우월하다’ 같은 맥락이 아니라, ‘취사 선택’으로 문자를 대한다고 봅니다. 국내에서는 로마자 일변도인 타이포그래피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마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글 연구와 실험 때문인 것이죠. 로마자와 한글을 공유할 수 있는 혼성적인 환경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이동국
어떤 문자이든지 간에 이분법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시에 동등하게 보자는 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전자는 특정 문화에 대한 우월주의 아니면 패배주의 산물이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어요. 후자 또한 이 세상 모든 문자의 출신배경이나 지역·시대·민족 등 다 다르다는 입장에서 보면 동등할 수만은 없다고 봐요.
모든 문자가 가진 독자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소리를 시각화한 훈민정음, 즉 한글만 봐도 자음자모와 모음자모는 상형(象形)원리에서 나왔고, 그 결합방식, 즉 음절의 형태(Gestalt)는 역리(易理)가 작동해서 만들어졌잖아요. 글자의 점획은 옛날 전서를 모방(字倣古篆)하였죠.
요컨대 한글에는 표음(表音)과 표의(表意)는 물론 상형과 같은 모든 문자제작 원리가 녹아 있어요. 우월주의(?) 입장에서 한글을 보면 이 세상 모든 말은 물론 소리까지 다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문자보다 더 정교하게 써낼 수 있다는 점에서 영어보다 한 차원 위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재완
저는 도구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볼펜, 연필, 붓 등은 쓰기 시대의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코딩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서 뭔가를 생성시키는 규칙들로 문자건 이미지건 만들어내는 시도들이 있잖아요. 이런 것도 일종의 도구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문자를 쓰고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이지원
보통 ‘도구’라고 하면 신체 행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도구를 흔히 떠올리죠. 그런데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인식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컴퓨터 모니터에 활성화된 어도비 어플리케이션의 화면이 종이 위 잉크로 물성화되는 체험을 했던 지점이 도구의 개념을 다르게 인식하는 전환기이지 않았나 싶은데요.
다시 말해, 신체 행위뿐만 아니라 추상적 사고를 구현해주는 도구로 인식이 확장된 셈이죠. 몸의 반영에서 생각의 반영으로의 전환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준 도구들, 이것을 최대한 사용해봐야겠다는 욕구가 발생한 바는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코딩에 관한 관심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남시
방금 말씀하신 ‘추상적 개념을 형상화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지원
추상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추상적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상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쉽게 말해 ‘추상회화(abstraction painting)’라고 부르는 예술이죠. 캔버스에 추상화를 그리는 것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추상적 그래픽을 나타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고 봐요. 물감과 컴퓨터 픽셀 정도의 차이가 있겠죠.
개념을 형태로 치환하는 것은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디자이너가 컴퓨터의 논리를 이해하고 코딩하는 행위는 오직 조형적 표현만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그 표현을 이룩하는 어떤 개념, 구조, 시스템, 알고리즘 등을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하는 과정으로 봐야겠죠.
좌담 참석. 김남시
프베를린 훔볼트대학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예술학 전공 조교수이다. 로이 해리스(Roy Harris)의 『Signs of Writing』을 번역(『문자의 기호들』,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했고, 문자/텍스트와 그림/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발표하였다.(namseekim@ewha.ac.kr)
좌담 참석. 이동국
경북대학교에서 경영학 전공 후 성균관대학교에서 「퇴계 이황 서예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로 재직하고 있다. 27년간 〈위창 오세창〉, 〈한국서예 2000년〉, 〈퇴계 이황〉, 〈표암 강세황의 시(詩)서(書)화(畵)평(評)〉 등 서예사 특별전 30여 회 및 서예 문자예술을 테마로 한 현대작가 전시를 20여 회 기획하였다.(ldk@sac.or.kr)
좌담 참석. 이지원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교수, 온라인 교육 채널 ‘디자인학교’ 주임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디자이너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있고, 번역서로는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그래픽디자인 들여다보기3』, 『그래픽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이 있다.(jiwonlee@kookmin.ac.kr)
좌담 참석. 전가경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을 공동 운영하며 사진·텍스트·디자인의 삼각관계를 연구하고 실천한다. 그래픽디자인 관련 글을 쓰고 강의한다. 저서로 『세계의 아트디렉터 10』, 공저로 『세계의 북디자이너 10』 외, 공역으로 『그래픽 디자인 사용 설명서』 등이 있다.(honeyshy@gmail.com)
좌담 진행. 정재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정병규출판디자인 디자이너, 민음사 출판그룹 북디자이너를 지냈다. 현재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이며 출판사 ‘사월의눈’을 공동운영하고 있다. 공저로 『세계의 북디자이너 10』, 『섞어짜기』가 있고 한국디자인학회, 기초조형학회, 한국타이포그래피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jjwank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