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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 10호 미리 보기 #4 말라르메는 어떻게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을 실험했는가

    타이포그래피 매거진 『the T』 10호 미리 보기 ― 「말라르메는 어떻게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을 실험했는가」


    글. 도윤정

    발행일. 2017년 06월 26일

    『the T』 10호 미리 보기 #4 말라르메는 어떻게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을 실험했는가

    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10호(혁신2호) 중 
    ‘특집 · 한국 디자인 생태계 2 - 문자의 이미지성’ 코너에 실린 본문 일부를 옮겨 온 것입니다.
    『the T』 제10호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이다. 현대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보들레르가 상징주의를 예고했다면 그는 랭보, 베를렌과 함께 본격적으로 상징주의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시 언어 탐구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난해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에 있어 서구 알파벳 역사와 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서구 알파벳은 오랫동안 문자로서의 시각성과 공간성을 잃어버리고 음성의 전달 기호로 취급되었다. 페니키아에서 그리스로 오면서 알파벳에 모음이 보충되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알파벳을 음성 전달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서구 알파벳은 ‘들리는’ 기호였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역사 속에서도 중세시대에 아름다운 책들이 탄생되기는 하였다. 아름답게 장식된 문자들은 문자의 시각성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문자의 물질성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신문이든 책이든 문자가 같은 바탕면에서 이미지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이 서서히 재인식되기 시작했다.

    1830년부터 판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지가 삽화의 형태로 책의 영역 안으로 밀려들었다. 삽화책(livre illustr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잡지나 연재물 등 대량생산된 이미지가 실린 저렴한 책들과 한정된 독자층을 겨냥하여 이미지를 풍부하게 싣고 고급 종이로 정성을 기울여 만든 비싼 책들, 즉 예술가책(livre d’artiste)이나 화가책(livre de peintre)으로도 불리는 고급책(livre de luxe)이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후자는 주로 동판화와 석판화를 활용하여 유명 화가의 삽화를 실었는데 책의 물질성과 문자의 시각성 및 공간성을 재발견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말라르메 역시 1873년 화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두 권의 예술가책, 『까마귀(Le Corbeau)』(1875)와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1876)를 펴내면서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탐구는 교정쇄 형태로 남겨져 사후에 사위의 손에 의해 출간되는 『주사위 던지기(Un Coup de Dés)』(1914)에서 문자와 책 역사에 있어 일대 혁신으로 발전한다.

    고갱이 그린 말라르메 초상화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까마귀』

    이 책은 말라르메가 마네와 함께 만든 첫 예술가책이다. 말라르메는 젊은 시절부터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를 좋아했는데 그의 시를 읽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말라르메가 포의 장시 「까마귀(The Raven)」를 프랑스어로 옮겨 그것을 영어 원문과 함께 싣고 마네가 판화를 삽입하였다. 예술가책답게 이 책은 가장 큰 판형인 인-폴리오(infolio), 즉 53×34cm의 크기로 크고 얇게 만들어졌고 본문은 네덜란드 종이에, 표지와 장서표 낱장화(ex-libris)는 양피지에 인쇄되었으며 다른 삽화들은 구매자가 선택할 수 있게 중국 종이와 네덜란드 종이 두 종류로 제작되었다.

    이 책에서 문자의 시각성과 관련하여 눈여겨봐야 할 것은 로만체/이탤릭체라는 서로 대비되는 활자체의 교차 사용이다. 왼쪽 페이지에 놓여 있는 영어 원문은 로만체로 인쇄하였고 오른쪽 페이지에 놓여 있는 프랑스어 번역문은 이탤릭체로 인쇄하였다. 이 책 이전에는 본문은 둘 중 하나를 기본 서체로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는 강조의 용도로 썼으며 책 표지나 책 광고 포스터에나 둘을 비슷한 비중으로 사용했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말라르메가 이들의 교차 사용을 본격적으로 본문에 도입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음으로는 문자의 공간성과 관련하여 한 페이지 내 시행 배치를 살펴보자. 시라는 장르는 원래 산문과는 달리 문자의 공간성을 활용하는 장르이다. 시행과 연이라는 단위를 기준으로 공간적 배열을 통해 독자의 호흡을 안내한다. 예술가책에서 시화집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그 때문이다. 『까마귀』 역시 시행 배열에 있어 문자의 공간성을 십분 활용하였다. 영어 본문의 경우 각 연을 이루고 있는 여섯 행 중 마지막 행은 다른 행 길이의 1/2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일관되게 들여쓰기하여 앞 행의 중간 지점부터 텍스트가 시작되게 하였다. 프랑스어 번역본은 여섯 행의 길이를 거의 비슷하게 맞췄지만 첫 행에 약간 들여쓰기를 함으로써 역시 각 연이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게 하였다.

    『까마귀』 본문: 삽화가 빠져 있을 때 규칙적 시행 배열이 더 눈에 띈다 
    『까마귀』 본문: 삽화가 끼워져 있을 때 텍스트와 이미지가 한눈에 보인다

    사실 이것은 시 번역을 두고 말라르메가 깊게 고민한 결과이다. 영어 원문의 경우 당시 대개의 서구 시가 그랬듯 행의 마지막 음절에 동일한 모음과 자음을 놓는 각운을 사용함으로써 시의 청각적 리듬을 살리고 있는데 프랑스어 번역본은 그 청각적 운rime을 재현할 수 없었다. 특히 각 연의 마지막 행에 반복되는 ‘nevermore(다시는)’라는 단어의 어두운 울림을 프랑스어의 ‘jamais plus(다시는)’가 만들어낼 수 없음을 말라르메는 무척 아쉬워했는데, 결국 청각적 리듬 대신 시각적, 공간적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것이 이와 같은 시행 배열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또, 연과 연 사이에 일반적인 여백보다 더 많은 여백을 삽입하여 독자에게 시각적 휴식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백의 확대는 예술가책의 공통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후일 말라르메가 『주사위 던지기』에서 실험하는 더 획기적인 시도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여백의 활용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어서 페이지 구성을 살펴보자면, 총 18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연을 영어본, 프랑스어본 모두 페이지마다 4연이나 5연씩 배치했는데 전체 4페이지에 걸쳐 흰 바탕면 대비 검은 글자의 양, 즉 페이지 밀도에 있어 거의 균일성을 보인다.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각 4연을 배치하고 중간 두 페이지에 각 5연을 배치한 것 역시 신경을 쓴 조치인데 다시 각운 규칙에 비교해보자면 포함운(a-b-b-a)에 해당되는 형태로 각 페이지에 연을 배분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독자가 책을 펼치고 읽는 움직임에 주목해보자. 위에서 언급했듯이 왼쪽 페이지에 영어 원문이, 오른쪽 페이지에 프랑스어 번역문이 있는데 그 사이에 낱장으로 마네의 그림이 삽입돼 있다. 총 4장인 삽화는 오른쪽 페이지를 가리는 방식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왼쪽 페이지의 영어본을 보면서 오른쪽 페이지의 삽화를 보거나 삽화를 빼고 양쪽에 각기 다른 언어로 된 텍스트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또, 독자가 삽화의 위치를 왼쪽으로 옮긴다면 왼쪽의 삽화와 오른쪽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한눈에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구조적이면서 동시에 유동적이게 페이지 구성을 한 점은 장차 『주사위 던지기』에서 행할 책의 페이지 구성 실험의 첫걸음으로 보인다.

    글. 도윤정
    프랑스 파리7대학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역사·기호학을 전공, 「동양미학에 비춰 본 말라르메의 여백의 가치」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에 사무국이 있는 ‘문자와 이미지 학회’ 회원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 학부대학 조교수이다.(anged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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