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10호(혁신2호) 중
‘문자·활자·타이포그래피’ 코너에 실린 에세이 일부를 옮겨 온 것입니다.
『the T』 제10호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한국의 도시에는 글씨의 욕망이 넘쳐난다. 글씨들은 읽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압도하라고 있는 것이다. 글씨들은 경쟁하고 있다. 빌딩들과 경쟁하고 탁한 공기와 경쟁하고 요란한 도시의 소음과 경쟁한다. 도시라는 빽빽하고 치열한 생태계에서 글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글씨는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도시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 치는 수많은 경쟁자들 중의 하나가 됐다. 경쟁은 글씨의 고유영역인 의미를 지워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버지아버지아버지… 하고 같은 기표를 반복해서 말하면 뜻이 사라지듯이, 수도 없이 중첩되고 악쓰는 글씨들은 의미가 없다. 모두 다 노이즈가 돼버린다. 글씨들은 야수처럼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린다. 그 야수들은 길들이기 힘들다. 글씨의 뒤에는 글씨를 써붙인 자들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고 그 욕망의 뒤에는 자본주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야수를 길들이겠다고 청계천변의 가게 간판들을 같은 글씨체로 통일하고 크기는 줄였지만 야수는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다른 데로 숨어버렸다. 야수가 길들여진 자리에 남은 것은 야수의 가죽이 아니라 획일화되고 생명력이 없는 죽은 글씨들이었다. 차라리 요란했던 정글 속의 진짜 야수들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도시는 야수가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지만 글씨라는 야수에게는 예외다. 글씨 야수는 컴퓨터 출력이나 LED 같은 기술적 표현수단에 힘을 입어 더 광폭해지고 있다. 야수가 날뛰는 곳은 길거리만이 아니다. 글씨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는 다 야수들이 날뛰고 있다. 야구장에 가보면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글씨들에 공을 던지고 있다. 티비를 켜면 글씨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느 글씨가 지금 보고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인지 알기가 힘들다. 다음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는 안 보여줘도 그만일 텐데 말이다.
이런 현상을 공지강박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제대로 공지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은 강박증 말이다. 대형 마트에 가면 지금 1층에서 떡갈비 한 세트를 딱 15분 동안만 싸게 팔고 있다는 공지가 15분 간격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런 공지는 반드시 두 번 반복된다. 아파트에 달린 스피커에서 나오는 공지도 꼭 두 번 반복한다. 다들 하찮은 내용인 걸 생각해보면, 공지는 듣는 사람이 제대로 들었나 확인하기 위해 두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가 제대로 듣는 사람의 귀에 강제로 메시지를 쑤셔 박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반복하는 것 같다.
아마도 원시적 인간이 가지고 있던 야수의 본능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억압해 있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글씨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 같다. 현대문명의 역설은 문명의 수단이 야만의 표현물이 된다는 것이다. 감성에 호소하는 이미지에 비하면 논리적인 기호로 메시지를 전하는 글씨가 야수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천재들이 고안해낸 물리학의 산물이 원자폭탄이 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아이러니에 비하면 글씨가 야수가 되어 뜻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소소한 일인 걸까? 그렇지 않다. 원자폭탄은 1945년에 두 번 터지고 그 후로 안 터졌지만 야수가 된 글씨들은 오늘도 한국의 도시 모든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 이영준
기계비평가. 계원예술대학교 아트계열 융합예술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저서로 『기계비평』, 『초조한 도시』, 『페가서스 10000마일』, 『기계산책자』가 있다.(imagecriti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