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스티븐 킹의 작품 「해리건 씨의 전화기」(2020년 발표한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에 수록)는 2007년, 그러니까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한 해를 기점으로 전개되는 중편소설이다. 늙은 백만장자 해리건 씨와 가난한 소년이 아이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교감한다. 노부가 세상을 떠나자 소년은 관 속 해리건 씨의 정장 상의 주머니에 유품인 아이폰을 껴묻거리로 넣는다. 장례 이후 소년의 아이폰에 기기묘묘한 문자 메시지와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발신자는 바로 해리건 씨…….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믹서기 안을 들여다보듯 2007년을 바라본다. 초창기 스마트폰 유저들의 당혹감과 황홀경이 빠르고 거칠게 뒤섞이고 갈려서 전에 없던 새로운 혼합물(mixed form)이 생성된다. 그것의 이름은 ‘스마트 시대’다. 짓궂게도 소설은 스마트 시대의 땅에 해리건 씨를 묻어 균열을 낸 뒤, 그 지하로부터 유령을 소환해 스마트 세대인 소년의 일상을 아날로그적으로(?) 해코지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현존 스마트폰의 최초 모델에다 아날로그 시대의 지박령을 묶어놓은 것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TS) 에디터의 첫 스마트폰은 2011년 모델인 LG 옵티머스였다. 이걸 가지고 제일 많이 했던 일이 영화 포스터 이미지를 다운로드하여 기기 내 사진첩에 저장해두는 것이었다. 이게 그렇게도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기기(아이폰 13 미니를 쓰고 있다)도 똑같이 가지고 논다. 웹 서핑, 아니 웹 서밍(thumbing)을 하다가 눈에 띄는 그래픽 디자인 포스터를 발견하면 저장부터 하고 본다. 몇 년 전 이사를 하다 박살내기 전까지는 LG 옵티머스를 고이 소장하며 이따금 켜보고는 했다. 분명 스마트폰인데, 이상하게도 아날로그 시대의 물품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중고등학생 때 쓰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나 소니 CD 플레이어, 대학 시절 사용한 모토로라 레이저(일명 ‘베컴폰’) 등속과 한 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실사용하던 시절엔 ‘스마트하다’라고 느꼈던 행위의 결과물들, 즉 기기 안에 저장된 영화 포스터들도 왠지 바래진 듯 보였다. 디지털 파일이 빛바랠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감각이 되는 게 기묘했다. 디스플레이 기술력에 대한 이른바 역체감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10년 전 이미지 파일은 10년 후 유저에게 ‘빛바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디지털을 아날로그로 혼동하는 우발적 감각, 디지털을 자꾸만 아날로그로 대하게 되는 불수의적 태도. 이를 상징하는 표어로서 ‘해리건 씨의 전화기’, ‘유령의 아이폰’은 제법 그럴싸하다. 모든 디지털 기기에는 언젠가 아날로그의 지박령이 깃들 것이다, 라는 TS 에디터의 결론이다. 이번 [에디터의 북마크]는 TS 에디터가 ‘스마트폰에 소장 중인’ 포스터 다섯 종과, 그것들의 연관 페이지들을 소개한다. 포스터들을 소개해보자면, 어쩐지 ‘해리건 씨의 유령’이 어른거리는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물이자, TS 에디터의 스마트폰 안에서 바래져 가는 중인 기묘한 소장품들이다.
북마크 ❶
좌담회 〈OTT 플랫폼 그리고 장르문학의 현재와 미래: 넷플릭스와 장르문학〉 포스터
디자인: 5unday 양재민·윤희대, 2021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월간 문학 웹진 『비유』의 특집 좌담회를 위한 포스터다. 『비유』 편집위원인 소설가 이종산이 사회를 맡았고, 소설가 이서영·박현주, 장르문학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김용언이 패널로 참여했다. 행사는 2021년 10월 8일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열렸다. 『비유』 2021년 12월호와 2022년 1월호에 좌담 기사가 2부작으로 연재되었다.
포스터 속 책장이 위치한 공간 어딘가, 잘생긴 귀족 남성의 초상화가 암막으로 덮인 채 비스듬히 세워져 있을 것 같다. 이 초상화는 어둠 속에서 남자를 대신해 나이를 먹는다. 암막을 걷어내면 주술이 풀려 남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해골이 되고 만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 한 권은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일 것이다. 한밤중 TV가 저절로 켜지면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치켜세운다. 초상화를 가린 검은 천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북마크 ❷
전시 〈컴백홈(Come Back Home)〉 포스터
디자인: 둘셋 방정인, 2020
아티스트 그룹 콜렉티브9229의 첫 전시를 위한 포스터다. ‘9229’란 1992년생 예술인들이 스물아홉 살 되던 해에 결성한 모임이라는 의미다. 〈컴백홈〉은 콜렉티브9229 결성 해인 2020년 12월에 열렸다. 작가들이 20대의 마지막 해 연말에 연 전시인 것이다. 유년기인 1990년대의 기억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로 전시장을 채웠다. 전시 공간인 램레이드 하우스(Ram Raid House) 또한 9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포스터가 2종이다. 각각 VHS(Video Home System) 플레이어와 현관문 우유 투입구를 포착했다. 90년대를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라면 아마도 이 두 가지 모티프가 몹시 낯설 것 같다. 포스터 디자인을 위해 실물을 촬영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공수했을지 궁금하다. VHS 플레이어와 현관문 우유 투입구는 결코 한 카테고리로 묶일 수 없는 오브제들이다. 하지만 〈컴백홈〉 전시와 연계되면 둘 다 ‘보는 수단’이 된다. 비디오를 재생하고 우유 투입구 마개를 들어 올리면, 저편의 기억들이 보이는 것이다. 공간 디자이너 홍윤희와 함께 스튜디오 ‘둘셋(twothree)’을 운영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방정인이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북마크 ❸
온라인 전시 〈도도도둑: 도둑의 발자국〉 포스터
디자인: 개미그래픽스 김은지, 2022
전시명의 ‘도둑’은 ‘첨단기술’을 가리킨다. 다종다양한 첨단기술들이 인간의 몸짓과 감각을 빼앗아갔다, 라는 것이 〈도도도둑: 도둑의 발자국〉의 시선이다. 전시 소개문이 인상적이다. “(…) ‘발전’ 혹은 ‘더 나은 미래’라는 목적으로 도둑질은 하나의 방향을 향해 가지만, 도둑질의 흔적들―도둑맞은 몸과 파편화된 감각들―은 여러 갈래로 퍼지고, 또 주변의 환경과 합쳐지기도 하면서 예기치 못한 여러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서두에 언급한 소설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이 전시의 세계관이 서로 조응한다. ‘해리건 씨의 유령’이 어른거릴 때, 우리는 도둑맞은 신체/감각의 자리에서 환상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전시의 고유한 메시지나 정서와는 별개로 포스터의 꾸밈새가 눈을 붙든다. 상단의 ‘도도도둑 도도도둑’ 타이포그래피가 그 자체로 발자국처럼 보인다. 텍스트도 큼직하고 놓임새 또한 가지런한데, ‘도도도둑 도도도둑’으로 대번에 읽히지가 않는다. ‘도’와 ‘둑’이 반복되니 읽기가 힘들다. ‘둑’이 ‘독’으로 보이기도 한다. 디자이너의 의도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형사가 족흔을 감식하듯, 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북마크 ❹
전시 〈허그: 부유하는 세계를 껴안다〉 포스터
디자인: 체조스튜디오 강아름·이정은, 2022
제주현대미술관은 ‘지역네트워크교류전’이라는 연례전을 연다. 제주 거주 예술인과 타 지역의 예술인을 초청하여 꾸미는 현대미술 전시다. ‘2022 지역네트워크교류전’인 〈허그: 부유하는 세계를 껴안다〉는 올해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열렸다.
제주·서울·베를린·상하이·광저우에서 활동하는 참여 작가 5인의 존재가 포스터에 표현되어 있다. 직경과 높이가 상이한 원기둥 다섯 개가 공중에 떠 있고, 그 밑으로 동그란 그림자 다섯 개가 놓인 구도다. 원기둥은 서로 포개질 수 없지만 그림자는 아무 저항도 없이 한 원으로 겹쳐질 수 있다, 라는 인지가 퍼뜩 머릿속에 생긴다. 이 전시는 제주현대미술관의 기획전이므로 포스터 속 그림자들의 영역은 당연히 제주 땅일 것이다. 국경과 국경은 서로 선을 긋고 부유하나, 예술인들은 경계 두지 않음으로써 ‘한 그림자’로 화합한다. 제주는 그러한 무경계의 예술세계다. 전시 고유의 색채를 흑백 드로잉만으로 충실히 표현한 포스터다.
북마크 ❺
연극 〈순교〉 포스터
디자인: 파이카 이수향·하지훈, 2022
연극 〈순교〉는 SF 작가 호시 신이치의 단편소설 「순교」를 각색한 작품이다. 극단 돌파구가 2021년 10월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초연을 했고, 이듬해 4월 같은 무대에서 두 번째 막을 올렸다. 〈순교〉의 배경은 죽은 자들과 언제든 기계 장치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다. 더이상 죽음이나 유령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생의 투닥거림이 없는 사후 세계로 옮겨 가길 택한다. 〈순교〉는 남겨진 이들, 즉 계속 살아가기로 결정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에게서 생사의 감흥을 앗아간 〈순교〉의 기계 장치는, 앞서 소개한 전시 〈도도도둑: 도둑의 발자국〉이 말하는 ‘도둑’ 그 자체다.
포스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순교’라는 제목글자다. 멀리서 봐야 ‘순교’로 읽힌다. 가까이에서는 글자보다는 형상에 가깝게 보인다.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TS 에디터는 성당의 회중석을 떠올렸다. 회중석이 놓인 공간을 평면도로 표현한 형상처럼 보였던 것이다. ‘순교’라는 단어의 종교적 느낌 때문인 듯하다. 포스터 하단에 원형으로 배치된 빈 의자들은 실제 〈순교〉의 무대와 객석을 재연한 것이다. 포스터 상단의 빛줄기가 공간 전체를 노랗게 밝히는 듯하지만, 이상하게 ‘밝다’보다는 ‘어둡다’라는 정서가 더 짙게 든다. 암흑을 노랗게 칠해놓은 인상이다. 비어 있는 의자들의 음침함이 배경색을 압도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