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기자협회보에 실린 어느 중견 기자의 글 한 편. 작은 출판사에 관한 내용이었다.(2015년 10월 14일자,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좋아하는’ 일과 ‘작은’ 성공>) 기자는 국내 지역 출판사들의 우수 기획 사례를 소개하며 ‘작은’과 ‘좋아하는’이라는 형용사를 열쇳말로 썼다. 이 둘은 각각 ‘전문성’과 ‘엄선’이라는 명사로 대치될 수 있을 것이다. 넓게(wide) 확장하는 대신 깊게(deep) 집중하고, 그러한 깊이의 결과물을 가리어 선보인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독일의 소규모 독립출판사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Trademark Publishing) 또한, 전문성을 바탕에 둔 양서들을 가리어 간행하고 있다. 이곳의 프로젝트 매니저 르모 바이스(Remo Weiss)와 책 이야기, 출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출판인으로서 스스로를 “눈과 코와 귀와 손으로 읽는 사람”이라고 수식했다. 작게, 깊이 나아가려면 여러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는 뜻일까. 독일의 한 작은 출판사와, 이곳의 프로젝트 매니저는 어떻게 그 일을 해나가고 있는지 좀 더 들어보자.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과 당신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기본적으로 아트북 전문 출판사이다. 또한, 다양한 기업 출간물도 제작하고 있다. 타입 디렉터스 클럽 도쿄, 타입 디렉터스 클럽 뉴욕, 독일 디자인 위원회(German Design Council), if 디자인 어워드 등에서 수차례 수상한 바 있다. 2007년 칼 W. 헨셀(Karl W. Henschel)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의 딸 안토니아 헨셀(Antonia Henschel)이 현재 우리 출판사의 그래픽 디자인 에이전시인 SIGN의 CEO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에서 제작되는 모든 책과 잡지 들의 디자인 및 편집을 그녀가 직접 담당한다.
나 자신, 르모 바이스에 대해 소개하자면, 몇몇 출판사, 그리고 SIGN에서 인하우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고, 지금은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프로젝트 매니저이다. 고국인 스위스에서 인쇄물 제작 전문가 과정에 대한 견습 생활을 마친 뒤 2005년 독일로 왔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책들에서는 어떤 ‘물성’ 같은 것이 느껴진다. 출판사로서 어떤 철학과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출판물들은 SIGN의 CEO 안토니아 헨셀과 그녀의 팀이 작업한다. 각 권마다 독특한 스타일과 테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진 작업물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고, 종이의 재질과 메테리얼에 신경을 많이 쓴다. 출판사 일원 모두 비즈니스맨이기보다는 ‘아티스트’의 태도를 고수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아티스트를 구분하는 경계 같은 건 없다고 본다. 아마도 이런 의식이 강해서일 거라 생각하는데, 주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주제의 책들도 지속적으로 출간해왔다. 판매 방침이 견고한 어떤 서점들은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책들을 취급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한 번은 이런 상황도 있었다. 어느 북셀러가 내게 당부하기를,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쉬운 패션 서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 몇몇 바이어들이 요즘의 패션 동향을 알 수 있는 책들을 요청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트렌디한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가능한 한 모든 범위의 독자들에게 우리 출판사의 책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은 매 호마다 특정 테마를 정해 관련 사진 작품들로만 지면을 채우고 있다. 구성과 주제성이 인상적이다.
연간 4회 출간되는 은 평균 64페이지 분량이고, 지금까지 총 14개 호가 발행되었다. 잡지 자체의 아이덴티티는 미니멀한 타이포그래피, 일정한 포맷 등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각각의 이슈들을 모아놓고 보면 사용된 종이, 인쇄 테크닉 등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ICNIC>의 매 호는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디자인 및 편집 총괄인 안토니아 헨셀이 선정 또는 초빙한 게스트 에디터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다. 각 호마다 특정 테마 한 가지를 표방한다. 과월호를 예로 들면 ‘헬로 키티’, ‘아이슬란드’, ‘차(tea)’ 등이 있었고, 2009년 창간호의 테마는 ‘벚꽃’이었다. 서문이 간략히 들어가고, 대부분의 페이지는 사진과 일러스트 작업들로 채워지는 구성이다. 애초 기획 의도는 편집진과 주변인들을 위한 일종의 포럼으로써 기능해본다는 것이었다.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갖가지 방식과 실험 등을 이야기해보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랄까. 어쩌다 보니 여러 영역의 아티스트,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들과 인연이 닿게 되어 지금의 형태로 발전했다. 일본의 한 갤러리 운영자인 카나 카와니시(Kana Kawanishi)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의 협업을 통해 일본판 <PICNIC>세 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PICNIC>을 포함하여 현재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에서 다루는 출간물은 여러 종인 듯하다. 출판 영역에 대해 설명해달라.
우선, ‘Objects’, ‘Isola’, ‘Displaying Futures’라는 세 가지 시리즈북을 지속적으로 제작, 출간하고 있다. ‘Object’ 시리즈는 컨템포러리, 인터내셔널콘셉트의 제품 디자인 전문 서적이다. 제품 디자이너와 건축가,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특별판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제품 디자인 분야의 다양한 명인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작업을 담아낸다. 고급스러운 인쇄 공정과 하드 커버가 특징이다. 최신판인 에서는 세계 곳곳의 유리 공예와 도자기 공예를 다루었다. ‘Isola’는 ‘Object’에 비해 시각성에 더 무게를실은 시리즈이다. 비교적 작은 형태이고, 수작업을 적극 활용하며 텍스트의 쓰임은 극히 적다. 이는 독일 출판사 ‘Insel-Bücherei’의 유명 북커버 작업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Displaying Futures’는 독일의 한 대형 화학공업 기업의 기획물이다. 이 회사의 의뢰로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에서 기업 서적 및 잡지 제작, 이벤트 기획을 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다량의 사진집과 카탈로그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고, 여러 가구 디자인 기업들의 의뢰로 연례 보고, 제품 카탈로그 등을 작업하고 있다. 요컨대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기획부터 편집, 디자인, 유통에 이르기까지 출판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다루는 분야가 다양한 만큼 참여 아티스트들의 작업 스펙트럼 또한 넓을 것 같다. 그들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어떻게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가?
여러 전시나 박람회에 참가하다 보면,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출판물에 관심을 갖는 많은 아티스트와 디자이너 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직 미출간된 일련의 사진 작업물들을 가진 상황이다.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기에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이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들이 어필하는 아이디어들은 대단히 강렬하고 다채로운데, 이를 면밀히 검토한 뒤 출판 여부를 정한다. 물론, 최종 결정권은 안토니아 헨셀에게 있다.
<PICNIC>을 또 한 번 설명하고 싶은데, 일종의 ‘갤러리 전시’ 같은 매거진이다. 포토그래퍼 스스로 발표하고 싶은 작업들을 모두 우리 쪽으로 보내면, 총책임자인 안토니아 헨셀이 어떤 사진들로 매거진을 구성할지 직접 선별한다. 그런 다음 전체적인 레이아웃을 잡고, 때에 따라서는 제목이나 본문 내용에 관한 아이디어를 포토그래퍼에게 제안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한 추가적인 의견 교류가 이루어지는데,안토니아의 작업 스타일을 좋아하는 포토그래퍼들은 사진 셀렉션에 대한 작업 일체를 그녀에게 일임하기도 한다.
어려우면서도 쉬운 질문일 수 있겠다. ‘좋은 출판물’이란 어떤 것인가?
처음 딱 봤을 때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군!” 하고 단박에 느낄 수 있는 것. 사실, 출판이야 값싼 제본사에서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판물의 표면적 아름다움이나 소재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디어’이다. 아이디어와 미적 요소가 조화를 이룬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공감한다. 아이디어, 아이디어, 아이디어.. 역시나 아이디어가 모든 것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팀원들은 어떻게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발전시키는지 궁금하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여러 아티스트, 포토그래퍼, 편집자 등과 광범위하고 견고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그들이 먼저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도 있고, 우리 쪽에서 먼저 협업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그들의 기존 프로젝트에 대한 출간 제의, 혹은 새로운 작업 제안의 형태로서 말이다. 신진 작가들의 선제안 역시 언제나 환영이다. 사진 작업과 함께 간명한 콘셉트 설명이 첨부된 PDF 파일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만의 ‘기획력’이란 어떤 것인가
발행인 칼 W. 헨셀은 출판과 디자인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그에게는 어떤 프로젝트에 대하여 ‘될지, 안 될지’ 신중하고도 신속히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내 경우에는 우리 출판사와 좋은 협업이 가능한 사람들을 알아보는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그동안 같이 일했던 수많은 포토그래퍼와 편집자 들 모두 지금껏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뢰가 구축된, 오랫동안 교류해온 전문가들과 작업하는 것은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성향이기도 하다.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지난해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 Book Fair)’에 참여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한 여성 관람객이 우연히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 부스를 보고 퍽 흥미로워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지금 뉴질랜드에 거주 중이며, 보여주고 싶은 사진 작업물들이 꽤 많다고 말하더라. 이튿날 그녀가 다시 전시장에 나타났다. 자신의 사진들을 가지고 말이다. 집 안이 아닌 집 밖에 내놓인 낡은 가구들만을 촬영한 작업이었다. 사진 자체도 좋았지만,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일주일 뒤 그녀가 내게 따로 연락을 취해왔고, 그렇게 13번째 호의 참여 작가로 정해지게 되었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 사무실로 찾아온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사진 작업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선뜻 건네주었다. 이후의 작업, 즉 사진 셀렉션 및 레이아웃, 종이 선택 등 일체의 과정은 우리 쪽에서 진행했다. 결과물이 나왔을 때 우리도 그녀도 상당히 만족스러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자신의 첫 출간물이기도 했으니까. 그녀의 이름은 안젤라 클레멘스(Angela Clemens)로, 뉴질랜드 키위(Kiwi) 지역에서 소파나 침대 같은 집 안 가구들을 현관, 길가, 도로변 등지에 내놓는 관례를 사진에 담았다. 그녀의 작업을 테마로 한 13호는 인기가 대단했다. 독자들도 좋아했고, 여러 언론에 소개되었다. 심지어 뉴질랜드 대사가 그녀의 사진에 대한 찬사를 나에게 보내 오기도 했다.
출판 시장의 불황은 더 이상 뉴스라 할 수 없을 만큼 일반적인 사실이 되었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이런 환경을 어떻게 관통하고 있나.
기업들의 사내 출간물, 여러 그래픽 디자인 직종과 관련된 전문 도서 제작을 통해 수익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 매출의 일부가 예술 서적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순수히 책 판매만으로는 출판사 운영이 충분하지 않겠지만, 우리로서는 종이책, 그중에서도 예술 분야의 책들은 언제나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어떤 출판사로 기억되고 싶은가?
훌륭한 타이포그래피와 근사한 디자인, 뛰어난 기획력으로 상징되는 독립 출판사로 회자되고 싶다.
‘프로젝트 매니저’의 일이란 이를테면 어떤 것들인가? 당신과 같은 커리어를 쌓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설명을 부탁한다.
나의 경우, 그래픽 디자인과 인쇄 제작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므로 아무래도 경영에 대한 지식은 미흡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 뒤부터는 날마다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비즈니스에 관한 것들을 익혀야 했다. 알다시피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은 아주 작은 규모의 출판사이다. 많은 부서와 직급으로 구성된 대형 출판 하우스와는 비교될 수 없다. 그만큼 여러 영역의 일을 경험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회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주어진다. 이것이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프로젝트 매니저의 주요 업무는 여러 저자,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저널리스트, 번역자, 유통업체, 서점 관계자, 숍 매니저 등과 소통하는 일이다. 이 밖에도 아트북 페어에 참가하여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책들을 전시하고, 인쇄업자나 우리 쪽 클라이언트와 사업적인 대화를 나눈다. 때때로 문화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든 프로젝트의 기획 단계에 관여한다. 발행인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랄까.
당신이 생각하는 출판인의 자질은 무엇인가?
출판인들은 다종다양한 문화 영역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호기심과 탐구력을 지녀야 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기본 성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나는, 즉 출판인은 눈과 코와 귀와 손으로 읽는 사람이다.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이라는 출판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르모 바이스라는 개인의 커리어 골은 무엇인가?
트레이드마크 퍼블리싱의 모든 작업들이 국제적으로 널리 출판되어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래도록 양서의 출판사로서 남기를 바란다. 나는 세계 곳곳의 다채로운 시각문화(visual culture)와, 이와 관련한 좋은 아이디어들을 고민하고 퍼트리는 일이 좋다. 이 일을 통해 여러 영역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선사하고 싶다. *파이팅!
*현지 사무실에 근무하는 한국인 디자이너에게 ‘파이팅’이라는 말을 배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