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직업을 막론하고 새로이 진행하거나 기획되는 일이 있다면 자연스레 레퍼런스라는 것을 모으게 된다. 폰트 디자인에서는 당연히 다종다양한 ‘글자의 형태’가 가장 첫 번째 레퍼런스 수집 대상이 될 것이다. 핀터레스트나 비핸스, 노트폴리오 등 많은 레퍼런스 사이트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구닥다리라 그런지, 여전히 직접 걸어 다니면서 모은 자료가 주는 현장감을 좋아한다.
골판지 박스를 북북 찢은 후 그 위에 멋지게 쓴 시장 과일가게의 손 글씨, 셔터 문 위에 스텐실 기법을 통해 표현한 글자, 기존에 출시된 상용 폰트를 거칠게 또는 알맞게 활용하여 표현한 모습 모두를 내 카메라나 스마트폰에 차곡차곡 담는 재미로 시간이 날 때마다 골목과 거리를 누비고는 한다.
일상 속 글자를 수집하는 행위를 지속하던 어느 날,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사람들도 나처럼 자기 일상에서 마주하는 글자를 궁금해하지 않을까? 그 글자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지금, 폰트 퀴즈 웹 사이트를 만들고 이용자 수를 보고 난 뒤에서야 이 생각이 너무 안일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전적으로 나의 착각에서부터 출발했다. 현재는 폰트를 다루는 업을 가진 이들, 혹은 폰트에 관심이 있는 소수에게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이트를 유지 중임을 밝힌다.
폰트 퀴즈 웹 사이트 프로젝트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하여튼 내가 진행하고싶은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2부작 콘텐츠로 연재해보려 한다. 무식하게 진행한 개인 프로젝트를 글로 정리하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일단은 시작해본다. 사실 ‘어디서나 폰트 퀴즈’도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무작정⋯.
글자(폰트)가 그저 좋은 이들, 글자가 본인의 자기 표현 수단인 이들, 지금 이 시간에도 글자를 짓는 이들, 개인 사이트 제작과 이른바 퍼스널 브랜딩의 시작을 고민 중인 이들, ⋯⋯. 이 모두에게 [서체 디자이너의 ‘폰트 퀴즈’ 사이트 제작기] 2부작이 유용한 레퍼런스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왜 ‘퀴즈’인가
레퍼런스를 모은답시고 온 동네를 은밀하게 돌아다니던 나는, 사람들(불특정 다수의 SNS 이용자들)이 ‘글자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로워 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퀴즈 형식을 고안했다. 폰트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디자이너들, 타 직종의 사람들이 퀴즈를 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폰트 디자인 업계에 대한 인식 제고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또한, 내 입장에서는 서체 디자이너로서 대중의 미감(글자에 대한 미적 감각)을 향상시켜드릴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아주 거창하면서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하여튼 나의 이런 포부와는 달리 시작은 아주 심플했다. 내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24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스토리 게시물’을 통해 폰트 퀴즈를 시작한 것이다.
잠깐 폰트 퀴즈. 우리나라의 글꼴은 몇 개나 될까? 2015년 국립한글박물관의 「글꼴 산업의 현황 조사와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글꼴 디자인 개발사가 보유하고 있는 총 글꼴의 종수는 5,941종이다. 조사에 응한 글꼴 개발사 45개 업체 중 24개 업체의 개수만 확인된 결과다. 개인 폰트 디자이너 및 소규모 폰트 제작 스튜디오까지 합치면 그 수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게시물의 퀴즈 템플릿을 이용해 만든 첫 번째 퀴즈. 아쉽게도 지금은 과거 콘텐츠(발행 후 24시간이 경과한 게시물)에 대해 추가 정보(퀴즈 참여 인원, 문항별 응답률, 정답률과 오답률 등)를 얻을 수가 없다. 첫 퀴즈 이후로 2~3일에 한 번씩 퀴즈를 출제하며 꾸준히 이어 나갔다. 많지는 않아도 점차 참여자들이 늘어났다. 나는 판을 조금 더 키워보기로 했다.
‘폰트 퀴즈 책’ 만들기 도전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넉 달간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으로 선보이던 폰트 퀴즈를 그해 11월부터는 작업 계정(@hangeul_ee)로 옮겼다. 퀴즈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참여자들도 제법 늘었다.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50여 명이 폰트 퀴즈를 풀었다. 이 축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책을 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역시나 이번에도 시작은 ‘무작정’. 나는 곧장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한 종이책 출간 준비에 돌입했다.
‘폰트의 이름을 안다는 것, 다양한 어투를 디지털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 문장을 대표 문구로 선정하여 무작정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51퍼센트 달성. 실패 요인이 뭘까 고민하다가 내린 나의 결론은 이랬다. 내용의 빈약함, 주목성 부족. 한마디로 관심을 크게 받을 만한 책으로 만들지 못했다, 라는 것. 나는 다시 기존의 폰트 퀴즈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도 플랫폼이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 문득, 이전에 올린 폰트 퀴즈를 확인하기 위해 옛 게시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사지선다’로 출제한 문항이 ‘삼지선다’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레이아웃이 바뀌고 문항이 하나 사라지는 것 정도는 그냥 그러려니 넘길 수도 있었겠으나, 퀴즈의 정답 문항까지 다르게 표시되어 있는 걸 확인했다. 큰 문제였다.
각 날짜별로 [좌] 업로드 시 모습, [우] 현재 모습
위의 첫 번째 이미지 속 글자인 ‘까스명수’는 정답이 [Sandoll 시네마극장]이다. 모종의 이유로 변해버린 문항에 의해 [타이포_쌍문동]이 정답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인스타그램 고객 센터에 문의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답변을 얻지 못했다. 손을 써볼 방도가 없어서 지금은 저렇게 오답이 정답인 채로 방치된 상태다.
위와 같은 상황은 드문드문 계속 발생했다. 딱 한 번의 오류도 치명적인데, 계속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다 보니 아주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절감했다. ‘나도 플랫폼이 있으면 좋겠다⋯.’ 게시물을 직접 수정하고, 사용자들에게 공지도 올릴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말이다. 내가 웹 사이트를 (이번에도 역시 무작정) 만들게 된 배경이다.
첫 글에서는 ‘어디서나 폰트 퀴즈’ 사이트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해보았다. 이런 구구절절한 내용을 어딘가에 기록하고 싶어, 내가 소속된 『타이포그래피 서울』 편집팀에게 2부작 연재를 제안한 것이었다. 콘텐츠로서의 가치가 보장되기까지 글의 구성과 문장 등을 꽤 여러 차례 손질 당했⋯ 아니 받았다. 다음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웹 사이트 제작 과정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