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처음 한 벌의 글꼴을 만들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삶에서 글자는 자연스럽게 곁에 있었다. 그렇게 글꼴 디자이너가 되었다. 글꼴 디자인을 한다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과 닮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느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고민하고 포기도 하지만 선택하고 책임진다. 글꼴 디자인에 완벽한 완성이라는 것은 없다.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글꼴들도 여전히 진행 과정에 있으며 끝없이 다듬어지면서 커간다. 글꼴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을 병행하고 있는 윤민구 디자이너(홈페이지)를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3년 전, 안상수 선생님께서 소장으로 계신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안그라픽스에 입사한 뒤 계속 같은 곳에서 글꼴 디자이너 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연구소의 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글꼴 디자인 공부와 작업도 지지하고 격려해주시기 때문에 저한테는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최적의 직장이죠(웃음). 연구소라는 곳의 특성상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항상 충분히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 기본이고, 또 같이 있는 분들이 다 연구원들이다 보니 함께 일하며 아직도 스스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어요. 회사 밖에서는 성북동에 자리한 예술공간인 ‘17717’에 몇몇 분들과 함께 기획 멤버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글꼴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글꼴을 처음 만든 건 2001년 중순에서 2002년 초반이었어요. 당시엔 한창 비트맵 웹 폰트를 만드는 게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일반인이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글꼴을 만들어서 배포하기도 했지요. 그때 우연히 글꼴 디자인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어서 취미 삼아 웹 폰트 한 벌을 만들어봤죠. ‘바른글꼴’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 보면 엄청 부끄러워요. 한 마디로 조악하고 허점투성이에요(웃음). 그땐 제가 글꼴 디자인을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그냥 재미있어서 했어요. 웹 폰트 파일로 변환하는 방법이라든가 이것저것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여기저기 전문가분들께 메신저로 노하우를 물어보면서 공부했어요.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성취감이 생기더라고요.
2002년도라니… 놀랍네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신 건가요?
원래 웹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또래 애들이 그렇듯 저도 수시로 꿈이 바뀌다가 우연히 미대에 진학하게 됐죠. 대학교 1학년 때 노은유 선생님의 문자 디자인 강의를 듣긴 했지만, 한글과 글꼴 디자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건 3학년 때였어요. 수업 때 과제를 라틴알파벳 글꼴을 이용해 해갔는데 교수님께서 왜 영어로 디자인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 했어요. 돌아보면 저 스스로 왜 영어로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없었던 거죠. 그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내린 선택에 대한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 창피하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정말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무조건 한국어와 한글로 과제를 해갔어요. 하다 보니까 한국어, 그리고 한글로 디자인하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내가 한국인임에도 왜 디자인에 한글을 쓰는 게 어려운지, 왜 좋은 한글 글꼴이 부족한지에 대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네요. 누구나 그렇듯, 공부해야만 보이는 한글의 좋은 점, 다른 문자에는 없는 점 등이 조금씩 보이게 되고, 이후 한글 글꼴 디자인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요리사에 비유하자면 화려하게 감각의 호사를 부리기보다는 정말 좋은 재료에 최소한의 양념만 가미해서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선호한다. 지금 하는 작업을 '왜' 하는지 명확하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려고 노력한다.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면 선 하나, 점 하나도 억지로 넣지 않는다. 자기 안의 기준이 명확하다. 흰 종이에 검은 글자 하나만으로도 개성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윤민구의 스타일이다.
자신만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 강점이 무엇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세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작업을 대하는 자세. 내가 해서 될 일이라고 판단하면 열심히 하는 거고, 내 영역이 아니다 싶은 일이라면 건드리지 않아요. 모든 걸 잘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전 그렇지 못하거든요.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 다시 말해 그동안 내가 해온 영역에 노력과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편이에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못하는 게 뭔지 스스로는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찾았다는 점에선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요. 여담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이 ‘되면 한다’에요.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죠. 좋게 말하면 호불호가 확실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책임하다고도 들리겠네요. 어차피 상대적인 거니까요(웃음).
타이포그래피의 매력이 뭘까요?
아무래도 ‘글자’라는 재료를 다룬다는 점일 거예요. 글자를 그리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벌이는 게 정말 매력적으로 와 닿아요. 흔해 빠진 비유이긴 하지만 좋은 재료에서 나오는 좋은 요리 같은 거죠. 글자 자체가 훌륭한 재료라면 별다른 장식 없이도 훌륭한 작업이 되리라 생각해요. 다른 한 가지는 다양한 글꼴의 결핍에 대한 해소를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런 느낌의 글자가 없을까? 없다면 만들어 쓰지 뭐’하는 점도 레터링과 글꼴 디자인이 갖는 매력 중 하나이지요.
글꼴 작업과 그래픽을 같이 하시는 데 작업을 할 때는 어떠세요?
모든 글꼴 디자이너의 고민일 것도 같은데, 글꼴 디자인은 마이크로를 넘어 나노까지 들어가는 작업이잖아요. 세리프의 형태를 이루는 점 하나의 미세한 위치까지 고민하니까요. 반면 제 생각에 그래픽은 좀 더 크고 넓게 보는 눈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시야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할 것이냐, 내가 이동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랄까요. 그래서 저도 최대한 시야를 한곳에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글꼴 디자인에만 몰두하며 작게만 보기 보다, 큼직큼직한 시야가 필요한 그래픽 작업들도 함께하며 그 글꼴의 쓰임새와 성격, 표정을 함께 보고 싶을 뿐입니다.
작업하신 걸 보면 단아한 느낌을 많이 받아요.
이전에 작업이 드라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저 스스로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되게 건조한가 봐요(웃음). 왜 그런지 고민을 하다 보니 색을 다채롭게 쓰지 않는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색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죠(웃음). 색을 고르거나 꾸미는 것에도 워낙 소질이 없어요. 그냥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다, 라는 마음으로 보통 두 톤 정도의 색 안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색이나 형태 등 다른 요소가 많아지는 순간 정말 중요한 글자의 힘이 약해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거든요. 정말 완성도 있는 글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더 멋있고요. 그래서 저도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지금 그리는 글자에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제가 뭐 대단한 디자이너라고 벌써 그걸 멋 부림으로 숨기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날 것 그대로 드러내야 사람들이 좋은 건 좋다 하고, 이상한 부분은 이상하다고 말해주겠죠. 그게 또 저한테는 일종의 피드백이 되는 셈이고요.
완성도 높은 글자는 글자만으로도 빛이 난다. 다른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글자만의 멋. 클래식으로 남은 글꼴은 그 자체의 힘으로 오랜 시간을 지나왔다. 그는 글자 자체가 가진 멋과 맛을 알고 있는 디자이너다. 얕은 재주보다 진지한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진지한 스타일이 아닌 진지한 태도에는 시간과 정성을 충분히 들여야 한다는 것도 안다. 천천히 익어가는 와인처럼 그의 글꼴 작업이 무르익기를 기다려본다.
홈페이지에 공룡이 있는 게 특이했어요. 공룡을 좋아하시나 봐요
주변에선 ‘콘셉트질’ 하지 말라 하던데요…(웃음).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해요. 콘셉트이건 뭐건 간에, 일종의 일탈 같은 건데, 어렸을 때부터 공룡을 엄청 좋아했거든요. 학명을 열심히 외우면서 피규어랑 포스터도 모으고. 제가 만든 글꼴에 별도로 만들어 넣어둔 공룡 모양의 기호활자가 들어있기도 해요.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지루함을 느끼던 중에 우연히 책장에 꽂혀있던 공룡 책을 펼쳐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왜 본인의 전공이랑은 별개로 한두 개 정도는 더 공부하고 싶은 학문이 있잖아요? 주변에 친구들이 저한테 자연사 박물관 소속 디자이너로 취직해서 공룡 소개하는 리플렛 같은 것들 실컷 만들라고…(웃음). 사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했던 작업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어떤 건가요?
최근에 만든 글꼴인 윤슬체에요. 처음엔 전시용으로 10글자만 레터링을 했는데, 나중에 글꼴로 파생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레터링은 단독으로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진 아름다움에 그 가치를 두지만 한 벌의 글꼴은 전체 글자의 어울림을 고민해야 하거든요. 그전엔 멋있는 글자를 그리기 위해 이것저것 다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글꼴 작업을 하다 보니까 내 욕심에서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선택’에 대한 고민과 글꼴로서의 가치를 위해 포기하고 절제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다듬는 작업이라 흥미로웠어요. 처음으로 정말 ‘글꼴’을 작업했다는 생각을 준 작업이기도 하고요.
윤슬체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있으세요?
‘윤슬’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강이나 바다가 빛을 받을 때 반짝거리는 잔물결이라는 뜻이 있는데,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붙여주고 싶은 이름이에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라 벌써 붙이면 어떡하느냐, 나중에 정말 대표작을 만들면 그때 쓰라는 의견도 있었는데, 제게 처음으로 의미를 준 글꼴에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각오이기도 하고. 지금 안 쓰면 누가 쓸 것 같기도 해서…(웃음).
글꼴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세요?
태도라고 봐요. 이건 다른 어떤 디자인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이죠. 나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 글꼴을 보면 만든 사람의 성격과 생각, 태도, 품성이 정말 다 드러나거든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 형태로 드러나는 글꼴이라는 게 사실 대단한 거잖아요. 그런 글꼴을 디자이너로서 하나쯤 갖고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기도 하고. 저도 어떠한 글꼴을 만들 때 제 느낌이 드러나면 좋겠어요. 그게 어떤 느낌일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왠지 딱딱하고 드라이한 느낌이려나(웃음)? 라틴알파벳 글꼴을 봐도 똑같아요. 이 디자이너가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살았으니까 이런 글꼴을 만들었겠구나, 라고 느껴지는 글꼴이 있거든요. 만든 사람이 죽어도 훌륭한 글꼴은 계속 남죠. 오래가는, 만든 사람의 삶이 묻어나는, 그리고 거기에 내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한 글꼴을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도 계속 공부를 하는 중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