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로 프로젝트]는 2018년 시작된 민간 주도 도시 재생 사업이다. 이 사업을 기획하고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이들(개항로 노포 상인들, 브랜딩 전문가, 쉐프 등 10~20명이 협업한다)의 단체명이기도 하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구도심(중구 동인천역 일대)의 낙후한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고,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들에 브랜딩이라는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이 지역, 그러니까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 일대는 이른바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도시들이 차례로 대외 무역의 문을 열며 개항장(開港場)으로 불렸다. 이 시기가 이른바 ‘개항기’다.]과 함께 외래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근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정확히는 발전을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문장으로 부연할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 지역 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 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시절의 명암이야 어떻든, 당시 개항의 격랑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오랜 살아냄, 혹은 이겨냄의 흔적들이 지금껏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그 흔적들에 다시금 빛을 비추는, 그곳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사람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발단과 전개를 기획한 이들은 이창길(경영 컨설턴트)과 권순만(브랜드 디렉터). 두 사람은 ‘플레이스랩’이라는 법인을 공동 설립하여 개항로 로컬 브랜딩을 지속·지원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3년 초 [개항로 서체] 개발 사업도 시작되었다.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디자이너들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이 [개항로 서체] 개발 과정을 초창기부터 최종 공개 시점(8월 예정)까지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를 매달 한 회씩 연재한다. 개발 담당 디자이너들이 일종의 일기체로 기록하는 에세이 연작이다. 이들은 이번 작업을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 명명했다. 단순히 주목도 높은 서체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글자 디자인으로써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연차까지 내고 서둘러 개항로 답사를 다녀왔던 이유는 ‘개항로 서체를 만들겠다!’라는 결의 이전에 ‘개항로 서체를 만들어도 될까?’란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얻고자 함이었다. 지난 글에 기록했듯 답사는 성공적이었다.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과 [개항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플레이스랩 이창길 대장님까지 만나서 서체 얘기를 꺼내 버렸으니, 다음 스텝은 매력적인 제안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도시 브랜딩을 위한 도시 전용서체는 이미 많이 나와있다. 2008년 윤디자인그룹에서 제작해 발표한 서울시 서체 [서울남산체]와 [서울한강체]가 본격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 순천시, 포천시, 정선군, 완도군, 최근에는 창원시나 평창군의 사례까지 도시 전용서체는 꾸준히 개발되어 각 도시 홍보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도시 전용서체를 개발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인천시의 서체가 아니라 ‘개항로’라는 상징성 있는 지역의 글자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로컬이란 무엇일까,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로컬(local)’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해 전부터 로컬 푸드, 로컬 맛집, 로컬 크리에이터 등의 단어가 자주 들린다. 우리는 이 로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루하지만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자면 영단어 ‘local’은 현 상태 또는 현재 이야기가 되고 있거나 본인이 살아가는 특정 지역의 현지, 고향, 주민, 현지인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로컬을 종종 지방이나 시골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서울의 해방촌이나 홍대앞도 로컬이다. 서울이냐 아니냐의 지역 차이가 아니라 오래되고 점점 잊혀 가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발견될 풍부한 이야기와 가능성 있는 공간들이 ‘로컬’인 것이다.

로컬은 대도시의 집중보다는 ‘분산성’, 과거의 성장 가치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 능동적 삶을 위한 ‘자립성’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폭넓은 범위를 뜻한다.

_{류석진·조희정·김용복, 『로컬의 진화: 낡은 것과의 연대로 탄생하는 새로운 기회』(스리체어스, 2020)}

로컬에 좀더 집중한 브랜딩 사례, 그리고 지역과 서체를 접목한 경우를 살펴보기 위해 케이스 스터디를 진행해 보기로 했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을지로체]였다. 배달 서비스 플랫폼 ‘배달의민족’이 2019년 개발해 무료 배포한 서체다. 이름처럼 서울 을지로의 글자들, 즉 간판 글자들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글꼴이다. 을지로 간판 글자의 특색은 아래 인용문을 통해 참고해 볼 수 있다.

을지로에는 공구거리, 조각거리임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판이 걸려 있지는 않지만, 골목마다 가득한 붓글씨 간판들이 자연스레 지역의 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간판은 주석을 도금하여 부식을 방지하는 얇은 강판인 함석판 위에 하얀색 페인트로 배경을 칠하고 커다란 붓으로 단숨에 써내려간 글씨들로, 1970~80년대에 들어선 공업사들과 세월을 함께하고 있다.

_{장혜영,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오래된 한글 간판으로 읽는 도시』(지콜론북, 2020)}

지금은 재개발로 을지로의 풍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을지로에는 ‘무명의 간판 장인’이 그린 간판 글씨가 정말 많았다. 당시 페인트 통과 큰 붓을 실은 자전거를 천천히 끌고 다니던 어느 한 장인의 솜씨가 입소문이 나면서 그 골목의 공업소들이 모두 같은 장인에게 간판을 부탁해 모양이 똑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글씨의 가치를 알아본 배달의민족은 [을지로체]를 시작으로 2020년 [을지로10년후체], 2021년 [을지로오래오래체]를 차례로 선보였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칠성조선소체]. 칠성조선소는 강원도 속초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칠성조선소의 이야기는 내게 특히나 흥미로웠는데 2019년 가을, 친구와 속초 여행을 계획하며 속초를 미리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속초의 로컬 스토어 ‘동아서점’ 김영건 사장님이 쓴 『대한민국 도슨트 01 속초』(21세기북스, 2019)를 읽다가 칠성조선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책을 보며 독특한 획 놀림의 칠성조선소 글자를 잘 다듬어 서체로 만들어도 좋겠단 생각을 했었는데, 며칠 후 진짜로 [칠성조선소체]가 나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칠성조선소는 1952년, 실향민이었던 할아버지가 ‘원산조선소’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곳으로 목선을 주로 만들다 2대인 아버지가 물려받는다. 어업과 조선업이 호황이던 때를 지나 쇠퇴기를 맞았고, 아버지는 칠성조선소를 수리 조선소로 바꾸어 명맥을 잇는다. 이를 물려받은 아들은 레저용 선박을 만들고 카페와 갤러리를 열어 시대에 맞는 공간으로 칠성조선소를 탈바꿈한다.

[칠성조선소체]는 은퇴한 아버지의 조선소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목적을 바꾼 아들이 목선에 새기던 아버지의 글씨를 디지털로 남기고 싶어 서체 회사에 의뢰한 경우다. 배 만들기의 마지막 과정은 배의 이름을 써주는 것이라, 당시의 목선엔 모두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서체를 만들고자 함은 아마도 아버지의 레거시를 오래도록 남기고 싶었던 아들의 염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마침 내가 속초에 갔을 때 칠성조선소에서 서체 전시를 하고 있어 서체의 면면을 살피며 참 잘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아버지 본인의 글씨를 디지털 서체라는 유산으로 세상에 남겨준 아들을 뿌듯하게 바라봤을 부성을 상상하니, 나까지 절로 흐뭇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항로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개항로의 글씨는 위 사례들과 어떻게 달라야 할까. 어떤 지점을 향해야 할까.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을지로체]와 [칠성조선소체]의 훌륭한 만듦새와는 별개로 기획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우선 [을지로체]와의 차별점은 개항로 글씨의 경우 원작자(원도의 주인, 즉 전원공예사 전종원 대표)를 정확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해당 로컬(개항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서체를 개발하면서 현재 진행형으로 구술 채록 및 개발 과정을 아카이빙 자료로 남겨두기 용이하다는 부분과, 후일담으로 만들어지는 전체 스토리의 켜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 큰 차별점이었다. 그리고 [칠성조선소체]는 한 지역을 대표한다기보다는 좀더 내밀한 개인의 삶에 집중한 경우라 하이퍼 로컬의 사례라고 판단했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한결같이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플레이스랩에서 발행한 개항로 프로젝트 관련 책자를 보면 개항로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웃 사람. 개항로에서 오랜 시간 장사를 해 온 노포 운영자들이다. 두 번째는 젊은 사람. 개항로에서 장사하는 이삼십 대 혹은 삼사십 대 젊은 층들이다. 세 번째는 사는 사람. 말 그대로 개항로에 집이 있는 거주민들이다.

[개항로 프로젝트]가 다른 로컬과 가장 달랐던 점은 ‘노포’라는 자원을 가지고 이를 이롭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지역 노포(개항로 이웃 사람)와 로컬 크리에이터(개항로 젋은 사람)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지역 자원을 창출하여 개항로를 매력적인 장소로 변신시켰다. 결국 이는 개항로 사는 사람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결과를 만들었다.

우리가 매력적이라 생각한 개항로의 글자, 즉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이 쓰신 ‘개항로 맥주’ 글자 역시 개항로 노포의 자원이다. 이 글자를 서체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개항로의 터줏대감 전종원 사장님의 글자를 디지털 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이 아니다. 개항로 사람들(이웃 사람, 젊은 사람, 사는 사람)의 삶과 자부심을 글자로 상징화하는 일이다.

서체는 파급력이 있다. 말 그대로 력(힘)이다. 개항로 서체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개항로를 알리게 될 것이고 더 넓게는 인천까지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개항로를 궁금해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개항로를 찾아 이곳이 활력을 이어간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개항로에서 시작하는 ‘로컬 타이포 브랜딩’(ft. 제안서 작성)

[개항로 프로젝트]는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지만 서체는 프로젝트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소재가 될 수 있다. 근래 들어 ‘스테이(stay) 서비스’로 총칭되는 민박 및 지역 체험 사업의 사이니지나 다양한 어플리케이션 시스템에 서체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노포의 메뉴판, 각종 프로모션 행사, 기념 상품, 소셜 미디어 등에 서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개항로의 일관된 브랜딩을 형성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래, 이건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엷은 구름이 걷히며 하늘이 쨍해지는 기분이었다.

‘타이포 브랜딩(typo branding)’이란 ‘타입 및 타이포그래피(Type & Typography)’와 ‘브랜딩’의 합성어다. 글자를 통한 차별화된 브랜딩 활동을 의미한다. 새로운 마케팅 활동을 펼치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되는 서체에 브랜드의 표정과 음성을 담아 사용자들과 소통하며 브랜드를 구축해 나가는 것은 효과적인 로컬 브랜딩의 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로컬 타이포 브랜딩’의 개념을 개항로에서 시작해보는 거다!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는 큰 틀이 잡히고 나니 제안서의 개요가 술술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음은 글자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다. 현재 서체 시장에서 비슷한 포지셔닝의 글자는 없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했고, 유사 서체들이 시장성을 담보하는지, 그리고 개항로 글씨의 특징과 매력 포인트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객관적으로 구술할 필요가 있었다.

얼핏 보기에 개항로의 글자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익숙히 보았던 ‘붓글씨’라는 범주 안에서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실제로 약간의 서법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서체와 위에서 언급한 [을지로체]를 비롯하여 꽤 다양한 붓글씨 콘셉트 서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개항로 글자의 차별점은 용도와 프로세스에 있었다. 개항로 서체는 목간판 글씨를 모본으로 삼는다. 지난 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종이에 붓으로 글자를 쓰고 목재에 옮긴 후 조각도와 망치로 글씨를 파내고 페인트로 글자를 칠하는 과정을 거친다.

개항로 글자는 ‘종이’에 ‘쓰는’ 행위로 시작하여 ‘나무’에 ‘그리는’ 행위로 마무리된다. 그래서인지 개항로 글자는 나무의 물성을 닮아 우직함이 느껴진다. 간판으로서의 기능을 위해 두껍고 큰 붓으로 작업된 특성상 주목도가 매우 높다. 획에 힘이 있다. 이런 두께의 필력이 강한 흘림체 포지션은 드물기 때문에 이 글자는 개항로의 고유한 로컬 이미지와 결합하여 강력한 브랜딩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제안서를 정리해 갔다.

제안서를 마무리할 즈음 알았는데, 놀랍게도 2023년은 인천항 개항 140주년이 되는 해였다. 게다가 [개항로 프로젝트] 5주년, 전원공예사 개업 55주년을 맞는 해였다. 어쩌면 이렇게 5의 배수로 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이 일과의 운명론을 운운하며 제안서의 마무리 글을 썼다.

꿈틀꿈틀. 복작복작. 왁자지껄.
개항로 이웃 사람. 개항로 젊은 사람. 개항로 사는 사람.

몇몇 로컬 크리에이터의 꿈틀꿈틀한 아이디어로 시작된 [개항로 프로젝트]는
개항로를 복작복작 들끓게 하더니
결국 왁자지껄한 핫 스폿으로 만들어
개항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끊임없이 살아 숨쉬는 멋지고 힙한 유기 생명체, 인천 개항로.
2023년, 타이포 브랜딩으로 개항로의 새로운 ‘켜’를 함께 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_{제안서 맺는 글 전문}

2022년 연말의 큰 선물, 계약 성사

몇 차례 내부 검토와 수정 후 제안서는 드디어 플레이스랩 이창길 대장님에게로 보내졌다. 이틀 후 회신이 왔다. 너무 성의 있는 제안에 감사하며 프로젝트 멤버,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과도 이야기를 나누겠다 하셨다. 그리고 다음달, 미팅을 통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플레이스랩 공동 대표 권순만 디렉터 님의 연락에 우리 서체 디자이너들은 당장 만남 일정을 잡고 권순만 디렉터 님이 운영하는 ‘064 스튜디오’로 향했다.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설명을 했던 것 같다. 대표님과 끊임없이 눈을 마주쳤고 ‘개항로에 대한 제 애정이 보이시나요?’라는 마음을 담아 제안 발표를 마쳤다. 그때 권순만 디렉터 님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저보다 개항로를 더 잘 아시네요.” 그래픽 작업을 담당하고 계셨던 권순만 디렉터 님은 서체 개발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고, 이후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의 원도 양도와 서체 사용에 대한 플레이스랩과의 파트너십 제휴 등 구체적인 일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22년 12월 19일. 개항로 서체 개발을 담당할 윤디자인그룹 TDC 서체 디자이너들은 최종 계약을 위해 개항로의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에 모였다.

자신의 글자가 디지털 서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여전히 조금은 어리둥절한 전종원 사장님께 이창길 대장님은 말씀하셨다. “어르신 글씨가 너무 멋있어서 이분들이 컴퓨터에서도 어르신 글씨를 쓸 수 있게 만들어준대요. 이분들, 대한민국에서 글자 제일 잘 만드는 분들이세요!”라며 사장님과 우리를 동시에 추켜세웠다. 뒤이어 우리에게 나지막이 덧붙이셨다. “저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 어르신이 기분 좋으셨으면 좋겠어요.” 이 말에는 [개항로 프로젝트]가 늘 강조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 노포를 운영하는 어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의지가 느껴져 마음 한 구석이 찡했다.

전종원 사장님께 2022년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되자마자 본격적인 진행을 위해 찾아 뵙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개항로 국숫집 개항면으로 향했다. 개항로 서체 계약이 성사된 역사적인 날, 마무리도 역시 개항로 맥주로! 끈질긴 구애의 결실. 한겨울 개항면의 음식들은 뜨끈했고, 개항로 맥주는 우리의 기분만큼이나 뜨겁게 시원했다. _{^{(다음 연재에서 계속)}}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소속 서체 디자이너. 2000년대부터 글자를 짓기 시작했으며 서울시 전용서체 [서울남산체]·[서울한강체] 개발 참여를 시작으로 [어반빈티지], [YTN 뉴스 자막 서체], [KoddiUD 온고딕] 등 다양한 서체를 만들었다. 2023년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로컬 타이포 브랜딩’의 효용성과 그 가치를 알리고 있다. @booookty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