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활판인쇄소’. 활판공방(活版工房)을 소개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이다. 모든 유일한 것들은 그 유일함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오프셋인쇄가 상용화되고 전자책 시장이 몸집을 키우는 속에서, 활판공방은 혼자 납활자 책을 빚음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책을 ‘빚는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활판공방의 책들이 조판부터 제본과 장정까지 일체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계로 면을 뽑아내는 국숫집들 틈에서 수타면 가게는 단독하다. 하지만 기계식이든 수타든 결국 국수에 관한 것이다. 밀가루는 기계로 갈리거나 주방장의 손으로 주물러져 면발이 된다. 면발은 국물에 담기고, 사람들의 입과 뱃속으로 들어간다. 기계면과 수타면은 국숫발을 씹는 맛의 차이는 있겠으나, 둘 다 음식이다.
오프셋인쇄, 전자책, 활판인쇄 역시 모두 글자에 관한 것이다. 오프셋인쇄 서적과 전자책의 글자들은 컴퓨터 자판의 글쇠로부터 비롯되고, 활판인쇄 서적의 글자들은 활자가 그 전신이다. 글쇠와 활자의 차이일 뿐,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 인쇄술은 근본적으로 글자를 위해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활판공방은 디지털로부터 분리된 외딴 곳이 아니라, ‘글자’라는 큰 틀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활판공방의 유일함은, 유일하지 않은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그 유일함을 유지한다.
활판공방은 2007년 11월 15일 개관한 이래 꾸준히 출간물을 내놓고 있다. 오래된 인쇄방식인 활판인쇄술로 책을 찍어내며 여전히 가동 중이다. 박한수(출판사 시월 대표), 박건한(시인)과 함께 이곳을 만든 북디자이너 정병규(정디자인 대표)는 “활판공방은 구시대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인쇄소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을 강조하면서 “사람 자체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뇌과학을 보면 알 수 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수십 년간 책을 만지고 읽어온 정병규의 말(言)은, 그대로 옮겨 적어도 온전한 문장이 될 만큼 문법적으로 적확하다. 그가 들려주는 활판공방의 의의와 디지털‧아날로그 담론이 텍스트처럼 선명하다.
시인 박건한 선생님께서는 정병규 선생님을 위해 ‘책(冊)’이라는 시를 손수 지어주셨죠. 그만큼 두 분의 인연이 오래되고 각별한 걸로 압니다. 또 박한수 대표님도 오랫동안 정디자인에 적을 두고 두 분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이런 세 분이 어떤 계기로 합심을 하여 활방공방을 만들게 된 건가요?
처음 이야기가 나온 건 1990년대 중반이었어요. 우리 세 사람이 정디자인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이었죠. 당시 출판업계는 매킨토시의 공격적인 보급으로 완전한 디지털화로 접어들던 무렵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매킨토시는 DTP(Desktop Publishing, 탁상출판)에 최적화된 컴퓨터입니다. DTP 환경이 구축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활판인쇄술도 과거의 유물처럼 여겨지게 되었어요.
저를 비롯해 그때 편집주간으로 있던 박건한, 북디자이너였던 박한수 이렇게 셋은 그런 시대적 변화를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내 안타까워했습니다. 타이포그래피와 시각디자인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활자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거죠. 다만 아쉬움으로 그칠 게 아니라 뭔가 실체적인 일을 해보자는 의견을 모았고, 그 결과로 활판공방이 세워진 것입니다. 특히 우리 셋 중 가장 젊은 박한수 대표가 굉장히 열성적으로 나서줬습니다.
10년간 전국을 누비면서 사라진 활판인쇄기, 주문공과 식자공을 찾아냈죠. 인쇄소 설립에 드는 비용 일부에 사비를 보탤 만큼 물심양면이었습니다. 활판공방의 맨 처음 위치는 홍대 앞이었어요. 그러다가 지금의 파주출판도시로 이사하면서 ‘인쇄소’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강화되었죠.
2008년에 기자간담회를 갖고 향후 10년간 100권의 활판인쇄 시집을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현재 스물여섯 권 출간된 활판인쇄 시집은 활판공방의 얼굴과도 같습니다. 앞으로도 일흔네 권이 더 남았군요. 왜 시여야 했나요? 활판공방이 시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 그게 벌써 2008년이었나요?(웃음) 활자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데에 시만큼 좋은 대상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시집 100권을 찍자는 계획은 박건한 시인이 처음 제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시란 무엇입니까? 문학의 시원이자 언어 예술의 가장 원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는 게 바로 시이죠. 그래서 시는, 근대 출판인쇄술의 기원인 활자와 상통하는 면이 있죠.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또한, 조판부터 제본까지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활판인쇄에는 글자 수가 많은 긴 산문보다 짧은 시가 더 적합하죠.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선생님을 ‘책에 몸을 지어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이 수식어가 마음에 드시나요?
참 멋들어진 말입니다. 몸이라···. 저는 북디자인을 세 가지 일에 비유하곤 합니다. 옷 짓기, 요리하기, 건축하기. 천 조각을 이어 아름다운 의복으로 만들고, 갖은 식재료를 썰고 다듬고 양념해 맛난 음식으로 만들고, 땅 위에 구조물들을 쌓아 올려 집으로 만드는 일.
북디자인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가죠. 책에 표지를 입혀 더 맛깔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책을 펼쳐 마음의 안식처를 얻게 하는 일이니까요. 이런 의․식․주는 사람의 몸과 직결되어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책에 몸을 지어주는 사람’은 북디자이너를 설명해주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활판인쇄 시집은 그러한 ‘몸’의 육체성이 짙어 보입니다. 조판, 문선, 제본, 장정 등이 일체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겠죠.
사람의 손이 닿고 안 닿고의 차이가 그토록 큰 거예요. 표지와 내지, 글자 하나하나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 문선공은 그 원고대로 활자들을 고릅니다. 식자공이 깨알처럼 작은 활자들을 식자틀에 심으면, 조판공은 배열을 맞추어 인쇄기로 찍어냅니다. 글자들이 찍힌 종이들은 제본공에 의해 권으로 묶여 비로소 책이 되죠. 손으로 시작하여 손으로 맺어지는 작업입니다.
활판인쇄 시집들의 표지는 무척 간결한 인상입니다. 원색 하드커버에 시인의 이름과 시집 제목만을 커다랗게 새긴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죠. 드물게 몇 권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그렇다 해도 ‘간결함’이라는 기본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더군요.
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을 만든 ‘사람’을 부각시키기 위한 디자인 콘셉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수수하고 간결한 편이 좀 더 사람의 본성에 가깝겠죠. 앞으로도 이런 표지 디자인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선생님은 『지식인의 서재』라는 책에서 “삶을 영위하는 안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책이 삶의 일부로 들어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아날로그적인 활판인쇄 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시대가 아무리 급변한다 해도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은 있게 마련이죠. 중요한 건, 그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느냐, 혹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박한수 대표, 박건한 시인과 제가 활판공방을 세울 때 제일 염두에 두었던 부분이기도 하죠.
사람들에게 그저 활판인쇄를 잊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공존’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디지털 시대, 오프셋 인쇄 시대에서 활판인쇄술이 잘 어울려 생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활판공방은 과거의 유물을 간직한 박물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활판 인쇄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어요. ‘오래된 것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라는 사실. 사람들이 활판인쇄 책을 보며 이 의미를 되새겨보기를 바랍니다.
전자책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안에 종이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옵니다. 활판공방에게는 어두운 소식이 아닐까요?
전자책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종이책은 굳이 담고 있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끌어안고 있었어요. 단순한 정보 검색이나 사전적 기능 같은 도구적인 면들은 빨리 디지털의 세계로 내보내야 합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종이책은 이런 것들을 전부 품어오면서 커졌습니다. 과부하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체중 조절이 필요한데 그걸 안 하니 나태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전자책이 등장했고, 비로소 종이책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죠.
이 현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종이책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고, 저처럼 긍정적으로 본다면 종이책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해볼 수 있겠죠. 책은 반드시 아날로그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고정해놓고, 디지털 책이 ‘도전’을 해온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네거티브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각각의 영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디지털은 신식이고 아날로그는 구식이라는 개념은 옳지 않아요. 이 둘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복합적인 속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뇌과학을 봐도 알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인간을 너무 아날로그적인 존재로만 바라보지 않았나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을 새로운 시각으로 대하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문제도 답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출판업계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잘 안 받아들여지죠. 시장에서는 공존을 하면 이익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대치’ 개념으로 몰고 가는 것이죠.
전자책과 종이책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명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전자책을 통해 종이책의 세계가 더 깊어질 수 있는데, 상업의 논리로만 판단하려 하면 안 되죠. 종이책은 이미 오랜 시간 쌓아올린 고유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건 쉽게 허물어지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가치에 대한 깊은 탐구를 시작해야 할 시점입니다. 전자책과 ‘전쟁’을 벌일 게 아니라 ‘진정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출판업계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인간도 발전하는 것이죠.
종이책의 어떤 변화 가능성을 예측하시나요?
아무래도 저는 북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형태상의 혁신을 예상합니다. 전자책이 표현해낼 수 없는 종이책만의 외형적 특성이 구축될 거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종이의 질감 같은 것이죠. 이 같은 변화의 핵심에 디자인이 있고, 더 좁히면 타이포그래피가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란 활자 인쇄로부터 기원한 것 아닙니까. 북디자인의 기본이죠. 종이책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본을 깊게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전자책 만드는 사람들도 이걸 알아야 종이책과 구분되는 전자책만의 장점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시장에서 땅따먹기만 하려고 합니까. 그런 대체의 논리는 이제 버려야 해요.
향후 계획 가운데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것도 있나요?
실무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제 독자적인 강의를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훈민정음과 타이포그래피’라는 주제이죠. 대학 시각디자인과에서 대개 처음 배우는 것이 알파벳 타이포그래피입니다. 이건 알파벳이라는 문자의 짜임새와 관계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언어에 적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요. 특히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헌법을 가진 문자입니다. 그 헌법이란 바로 훈민정음이죠. 한글은 헌법 체계로 디자인되어 기능하는 문자입니다.
한글을 시각언어적으로, 타이포그래피적으로 해석하려면 당연히 훈민정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20년간 훈민정음을 따로 공부해왔습니다. 훈민정음이라는 방대한 텍스트를 해석하는 일이 그토록 어렵습니다. 한국인들에게 한글은 공기와 같은 것인데, 젊은 사람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를 해야죠. 특히 현장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생님의 작업과 관련한 계획도 궁금합니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 활판공방 시집들의 장정 작업은 꼭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애착이 크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썼던 글들과 여러 인터뷰에서 했던 말들을 묶어 회고록 형태로 엮을 계획입니다. 과거를 돌이킨다는 게 무척 쑥스러운 일이기는 하죠.
하지만 디자인과 사회 문화에 대해 그동안 제 자신이 일관되게 말해온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것들을 모아 정리해보면 하나의 커다란질문이 도출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 질문을 새로운 시작점 삼아 북디자이너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