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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판공방 3부작 #1 활자와 시와 사람의 공간

    시 한 수, 활자 한 자, 사람 하나가 여기에서는 동격이다. 공방 곳곳을 분주히 이동하는 장인들의 걸음새와 ‘철커덕’ 하는 인쇄기들의 작동이 서로 닮았다.


    글. 임재훈 / 사진. 이희진

    발행일. 2012년 02월 10일

    활판공방 3부작 #1 활자와 시와 사람의 공간

    파주출판도시에는 300여 곳이 넘는 출판인쇄업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2007년 11월 15일에 개관한 활판공방(活版工房) 역시 그중 한 곳이다. 이 지역의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이다. 읍 서쪽의 한강과 북동쪽의 임진강이 여기로 동시에 흘러들어와 합쳐진 뒤, 서해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교하(交河)라는 지명이 붙었다. 서로 다른 수질의 두 강이 서로 사귀어 바다로 동행하는 지점이다. 국내 단 하나의 납활자 인쇄소인 활판공방은, 이곳에서 교하의 이치를 따르며 글자들을 낳고 있다.

    디지털과의 상생을 꿈꾸며

    활판공방은 오프셋 인쇄와 전자책이라는 시류 속에서 착실히 제 흐름의 속도를 유지하며 그것들과 합류한다. 그 흐름이란 사실 몹시 느린 것이다. 책 한 권을 찍어내는 데 활자주자, 문선, 조판, 교정, 인쇄, 해판, 복제판, 지형, 제책, 장정 등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자동화가 될 수 없고, 오로지 기술자들의 수동으로 이루어진다. 활판공방의 책 전신은 사람의 손이 지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활판공방의 느림은 늘보의 굼뜸이 아니라 200년을 사는 거북의 더딤이다. 활판공방의 책들은 최대 수명이 1,000년이라고 한다. 종이에 잉크를 바르는 오프셋인쇄와 달리, 활판인쇄는 잉크 묻힌 글자를 종이에 눌러 찍어내기 때문이다. 이 글자들은, 1,000년이나 썩지 않고 버티는 한지 위에 거북의 족적처럼 찍힌다. 그렇다 해도 활판공방이 존재하는 시공간은 1,000년 후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이다.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다는 건 먼 미래에 누릴 혜택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오프셋인쇄나 전자책이나 활판인쇄는 ‘사람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한다’라는 공통점을 가지므로 평등하다. 활판공방을 공동 설립한 북디자이너 출신 박한수(출판사 시월 대표), 박건한(시인), 정병규(북디자이너)의 애초 지향점도 디지털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이었다. 정병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같은 길을 다른 방식으로 가는 것, 즉 상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활판공방의 설립 기원이기도 하다. 디지털화와 스마트화의 급물살을 견제하지 않고, 그저 그 속에 살아 있는 것. “전 세계 출판인쇄업과 타이포그래피의 시원인 활판인쇄술을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하고 싶다”라고 정병규는 덧붙인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가 되는 교하에서, 활판공방은 여전히 살아 있다.

    활자에게서 시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활판공방이 찍어내는 책들은 전부 시집이다. 제1호 시집은 2008년 7월에 출간된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이근배)와 『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김종해)이다. 이후 해마다 6~7권씩 꾸준히 시집을 선보였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꽃피는 것 기특해라』(서정주, 2012년 12월)를 포함해 지금까지 스물여섯 권이 출간되었다.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이었던 해였다. 당시 활판공방은 이를 기념해 향후 10년간 ‘활판공방 시인 100선’이라는 표제를 단 납활자본 시선집 100권을 출간할 계획을 세웠다. 첫 시집 두 권의 표지를 장정한 정병규는 작가 이근배‧김종해와 함께 그해 8월 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활판공방의 10년 계획을 설명하기도 했다.

    활자와 시의 연계성은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육당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생활을 접고, 남은 학비로 현지에서 인쇄기를 구입했다. 귀국 후 그는 이 인쇄기로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少年)』을 창간하며, 자작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권두에 실었다. 신체시로 불렸던 이 시는 한국현대시의 효시가 되었다. 100주년인 2008년 8월 기자회견장에서, 이근배는 1908년에 대해 “활자문화를 시로써 복원한 해”라고 밝힌 바 있다.

    활판공방의 시선집 출간은 박건한(위 사진)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활자의 깊고 오래된 가치는 노시인들의 시를 통해 가장 완벽한 형태로 표현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 역시 1966년에 등단한 원로시인이다. 직접 편집주간으로 나서 문단 데뷔 40년 이상의 시인 100명을 직접 선정했다. 미당 서정주처럼 고인이 된 시인의 경우, 그 가족들을 찾아가 시선집 발간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 특히 박건한은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한 은사 박목월의 시들을 모으며 감격에 젖기도 했다. “목월 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존경으로 그분의 시선집 『산이 날 에워싸고』를 엮었다.”

    그의 회고는 활자가 시뿐만 아니라 사람과도 관계 맺고 있음을 알게 한다. 활판공방의 기술자들은 여섯 명인데, 모두 예순 살을 넘겼다. 주조공 정흥택, 문선공 김표영, 식자공 권용국, 인쇄공 김진수‧김찬중, 제책공 이청일이 바로 그들이다. 오프셋인쇄가 빠르게 도입되던 1990년대 중반, 활판인쇄기의 퇴장과 함께 인쇄소 밖으로 물러나야 했던 장인들이다. 흩어진 활자들을 하나하나 모으듯, 박한수가 10년간 전국 각지를 돌며 여섯 명의 장인들을 다시 찾아냈다. 또 그는 장인들의 장비들도 하나씩 인쇄소 안으로 가져왔다. 현재 활판공방에는 국8절 활판 인쇄기 2대, 국4절 활판인쇄기 2대와 더불어 연판기, 활판교정기, 청타기, 지형기, 주자기 등이 구비되어 있다. 이들 장비 역시 지금의 규모를 갖추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이렇게 오래된 사람들과 오래된 기계들이 활판공방에서 시집을 찍어내고 있다. 시 한 수, 활자 한 자, 사람 하나가 여기에서는 동격이다. 공방 곳곳을 분주히 이동하는 장인들의 걸음새와 ‘철커덕’ 하는 인쇄기들의 작동이 서로 닮았다. 활판과 활자의 ‘활(活)’이란 이런 게 아닐까. 늙되, 낡지 않고 살아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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