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문의





    검색

    닫기
    t mode
    s mode
    지금 읽고 계신 글

    활판공방 3부작 #2 눈 내리는 날, 『타이포그래피 서울』 명함을 찍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디자이너의 활판공방 방문기 “쌓인 눈 위의 발자국들이 흰 종이 위에 찍힌 글자들처럼 보였다.”


    글·사진. 이희진

    발행일. 2012년 02월 10일

    활판공방 3부작 #2 눈 내리는 날, 『타이포그래피 서울』 명함을 찍다

    오늘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활판공방에 가는 날. 아침부터 뉴스가 폭설주의보를 내보낸다. 눈이 쌓이면 허허벌판 파주의 절경을 감상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잠깐, 갈 길이 걱정이다···. 회사 근처 합정역에서 버스를 탄다. 다행히 눈은 아직 오지 않는다. 편안한 좌석에 앉아 히터 바람을 맞으니 잠이 솔솔··· 잠깐 졸고 나니 어느새 파주에 와 있다.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는데 서서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길을 약간 헤매기는 했지만, 두근두근 설레는 맘을 안고 드디어 활판공방에 도착한다.

    활판공방 외부 전경. 건물 앞 조형물은 임옥상 작가의 한국근대출판 기념 조각 〈백년의 명촉〉

    실제로는 난생 처음 보는 활판기기들이 나를 반긴다. 공방 안에서 일하고 계시던 나이 든 장인 몇 분께서 푸근한 미소를 건네신다. 디자이너인 나는 타이포그래피에 무척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정작 그 배움의 토대가 되는 활판인쇄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게 사실···. 그 무지함이 국내 유일의 활판인쇄소인 이곳에 들어서자 나를 위축되게 한다. 디지털 시대의 서체와 오프셋 인쇄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벽을 가득히 메운 납 활자들이 그 자체로 신기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활판공방의 각종 인쇄기기들 

    하얀 종이에 글을 새기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목판인쇄, 두 번째로 금속활자인쇄, 마지막으로 요새 널리 쓰이는 옵셋 인쇄를 꼽을 수 있다. 목판인쇄는 금속활자와 더불어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가 사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저 선조들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고서, 어렵다고 힘들다고 투정만 부렸던 거구나···.

    목판인쇄는 시간이 지나면 휘거나 좀이 슬기도 하고 불에 타면 완전히 훼손되는 단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금속활자인쇄이다. 이 금속활자라는 것도 원료가 철로부터 시작하여 구리를 거쳐 납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길다. 철과 구리는 각각 1500˚C, 1200˚C 열을 가해 인쇄에 사용한다. 반면 납의 경우 450˚C 열만 가하면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손쉽다.

    활판공방 내부

    활판공방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이었던 2008년부터 김종해, 이근배, 허영자, 신달자 등 시인들의 시선집을 활판 인쇄본으로 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26권이 나왔는데 앞으로 100권 완권이 목표라고 한다. 시집 한 권 한 권에는 시인들이 자필로 쓴 짧은 글과 서명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 판권 인지 옆에 시집의 에디션 번호까지 붙어 있다.

    활판공방에서 발간한 시집

    오프셋인쇄가 1시간에 2만장을 찍을 수 있는 것에 비해 납활자 인쇄는 1시간에 1,000장밖에 찍어내지 못 한다. 실로 대단한 디지털 시대의 위엄이고 상당한 차이다. 게다가 납 활자는 철에 비해 그 견고함이 약해서 1,000장의 종이를 찍으면 마모가 되어 더 이상 쓸 수 가 없단다.

    활판인쇄보다 오프셋인쇄가 훨씬 편리한데 왜 어려운 길로 가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다.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옛날방식 그대로의 맛이 있다는 것. 특유의 손맛이 느껴지는 이 활판인쇄본은 디지털 시대가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그 무언가의 감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발간된 시선집이 더 값지게 느껴진다. 또, 한 권 한 권 만드는 데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시간이 들어가는 만큼 활판인쇄로 만들어낸 책은 그 수명 역시 500년~1000년을 간다. 오프셋인쇄로 찍어낸 책이 100년을 못버티는 것에 비하면 굉장한 생명력이다.

    납 활자의 매력을 직접 느끼기 위해 간단하게나마 공정을 간소화한 체험을 해본다. 나는 문선 과정부터 시작해볼 수 있었는데, 실제 활판인쇄는 크게 일곱 단계의 공정을 거친다.

    활판인쇄 과정

    1. 원도 제작
    활판인쇄를 하려면 먼저서체 개발자가 손으로 원도를 그려야한다. 활판공방의 원도를 보면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완벽하다. 이곳에서는 최정순의 원도를 바탕으로 한 활자를 갖추고 있다. 자모를 활자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원도는 활자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어, 일명 자부(字父)라고도 한다.

    원도

    2. 자모 제작
    자모는 활자의 어머니이다. 원도를 올려놓으면 자모조각기가 그 모양대로 파낸 자모를 만든다.

    자모

    3. 납활자 주조
    자모는 수많은 활자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된다. 활자주조기에 자모를 넣고 납을 녹이면 활판인쇄에 필요한 납활자가 탄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납 활자들은 활자선반에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보관된다.

    활자주조기

    4. 문선
    문선은 선반에 있는 수많은 활자 중 필요한 활자만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나는 주조의 과정은 생략하고, 최정순 원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납 활자 선반에서 ‘눈 내리는 날 타이포그래피 서울’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납 활자들을 뽑아내는 문선 작업부터 시작한다.

    활자들을 찾기가 마치 숨바꼭질처럼 어렵다. 가, 나, 다 순서로 정리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알고 보니 빈번하게 쓰이는 순서에 따라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활자들은 눈, 내, 리, 는, 날, 타, 이, 포, 그, 래, 피, 서, 울. 일단 이 열세 글자를 찾는 일이 가장 급하다!

    납활자 선반

    5. 조판 및 식자
    선별한 활자들을 원고에 맞게 판을 짜는 작업이다. 컴퓨터 작업과 비유하자면 일종의 레이아웃 짜기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로 글자를 배치하는 작업 역시 쉽지만은 않지만 활판인쇄에서는 공을 더 들여야 한다. 다양한 공목과 약물을 사용해 순서, 행수, 행간, 자간, 위치 등을 일일이 조정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글씨와 여백의 상관관계부터 어울림까지···. 생각해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컴퓨터라는 수단은 작업물을 손쉽게 이리저리 배치할 수 있게 하여 다양한 작업을 쏟아내도록 돕는다. 그에 비해 활판인쇄에서 판을 짜는 작업은 컴퓨터 작업과 비교도 안될 만큼 어렵다. 컴퓨터에 익숙해진 나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글자가 찍혀 나올 모습을 미리 상상해서 활자들을 배치해야 하고, 찍는 순간까지도 안심할 수 없다.

    컴퓨터 화면으로 미리 미리 볼 수 있는 요즘 시대와 비교한다면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그만큼 그 오묘한 손맛과 기대감을 느끼게 해준다. 자, 이제 ‘눈 내리는 날 타이포그래피 서울’이라는 문구가 잘 찍히도록 판을 한번 짜볼까.

    조판작업

    6. 인쇄
    조판한 한 쪽을 ‘스틱’이라한다. 이를 흐트러지지 않게 꽁꽁 묶어 고정을 한 뒤 인쇄기에 인쇄한다. 인쇄기는 한번에 4쪽을 인쇄할 수 있다.

    실제 인쇄공정

    나는 간단한 인쇄를 위해 잉크를 묻힌 롤러를 스틱에 골고루 바른다. 레이아웃은 조판 과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찍어낼 종이를 어느 위치에 올려놓느냐에 따라 완성본이 각기 달라진다. 이 때문에 인쇄 과정에서도 수차례 시험인쇄를 통해 알맞은 위치를 찾아내야 한다. 까다롭고 힘들기는 하지만, 마침내 마음에 드는 완성본이 나왔을 때의 보람이란 정말···!

    간단한 체험인쇄

    7. 제본
    이렇게 명함이 완성된다. 수많은 실패작들 끝에 잘 나온 명함을 보니 정말 뿌듯하다. 기계의 압력으로 종이 위에 꾹꾹 눌린 글자 자체가 지닌 매력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아날로그의 힘인가 보다.

    간단한 명함 제작이기에 제본 작업은 없다. 그래도 활판공방의 장인 분들께서 친절히 제본 과정을 설명해주신다. 한 면에 4쪽씩 새겨진 인쇄본은 2단으로 접어서 제본을 한다. 뒷장에 먹이 배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배려에서 나오는 공정이라고 한다. 또 활판공방에서는 접지와 제본 역시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완성된 명함과 내 손에 묻은 잉크를 보니 뿌듯하다.

    손맛에 따라 흐려지고 진해지고 뭉쳐지는 활판인쇄만의 특징은 디지털 시대의 그 어느 디자이너도 포토샵으로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본 명함은 활판인쇄의 과정을 아주 간소하게 맛본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디자이너인 나에게는 이러한 체험 자체가 실로 값지다. 활판인쇄 고유의 감성을 느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컴퓨터로 뽑아낸 차가운 글자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그 뜨거운 활판인쇄의 온기가 내 마음을 녹인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활판공방을 나서니, 어느새 눈이 가득 쌓여 있다. 하얀 눈 위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이 마치 흰 종이 위에 찍힌 글자들 같다. 눈 녹듯 사라지고 있는 활판글자들을 앞으로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Popular Series

    인기 시리즈

    New Series

    최신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