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글』을 잇는 오프라인 매체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은 늘 있었다. 모니터로 보는 타이포그래피와는 달리 인쇄매체에서 보는 타이포그래피는 왠지 모르게 짜릿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콘텐츠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의미로도 좀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꼭 소장하고 싶은 타이포그래피 전문 매거진’, 이것이 새롭게 제작될 『The T』의 지향점이었다.
2014년 4월부터 2019년 1월까지 발행된 『The T』는 창간 작업부터 마지막 발행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3권의 잡지를 발행하는 동안 편집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편집인이 바뀔 때마다 전체 기획이나 콘텐츠, 디자인 모두 새롭게 개편되었다.
2014년 봄, ‘Type & Typography Magazine’이라는 개념으로 제호를 단 『The T』의 창간호 소개 글은 이러했다. “『The T』는, 디자인은 물론 사회, 문화, 예술의 전 영역을 넘나들며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타이포그래피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담긴 ‘실험적·예술적·유희적’ 타이포그래피 전문 매거진입니다.”
실험적·예술적·유희적 타이포그래피 전문 매거진
내가 맨 처음 『The T』 편집인에게 주문했던 콘셉트는 ‘타이포그래피 화보집’이었다. 타입이 훌륭하게 적용된 타이포그래피 작품들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지금 시대에 걸맞은 아주 유용한 오프라인 매체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에 따라 『The T』 제1~4호는 ‘Inspiration works / Interview / Eye / Project / Education / Type’ 등의 카테고리를 바탕으로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과 인터뷰, 타이포그래피 교육 등을 소개했다.
1년 동안 총 4권의 『The T』를 발행했지만, 기대만큼 디자인계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The T』만의 차별화된 콘셉트가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The T』 5~8호는 카테고리를 더욱 명료하게 정리하고 콘텐츠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스트 디자이너를 도입하고 판형을 키우는 등 차별화에 집중했다.
게스트 디자이너와의 협업 과정도 보다 본격화되었다. 3호와 4호에 참여한 게스트 디자이너 이기준에 이어, 5호 허민재&이성균, 6호 스튜디오 고민, 7호 김가든, 8호 강구룡 등 독특하고 참신한 편집 디자인을 시도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및 디자이너들과 함께했다.
타이포그래피의 실천적 제안
『The T』 8호 발간을 어렵게 마치고, 정병규 선생과 『The T』 제작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국내 북 디자인 1세대로 꼽히는 정병규 선생은, 사실 『정글』 제작 당시부터 자문위원으로 윤디자인그룹과 인연을 맺어오고 있었다. 또한, 정병규 선생은 윤디자인그룹 폰트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한글을 주제로 한 개별 강의도 진행했던 터라, 현재 『The T』가 안고 있는 숙제—보다 전문적인 타이포그래피 전문지다운 모습으로의 발전—에 대해 문의하게 되었다.
곰곰이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정병규 선생은 『The T』를 본인이 직접 편집해보겠다는 의사를 건넸다. 정병규 선생이 주도한 『The T』 혁신호 콘셉트는 9호 인사말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The T』는 이번 제9호를 기하며 내용과 형식을 전면적 개편, 혁신호로 거듭난다. 한국의 디자인 현장에서 디자이너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아쉬움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즉, 작업과 함께 말과 글로써 디자이너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밝히는 담론의 장이 한국 디자인계에서 오랫동안 부재해 있었다는 뜻이다. (중략) 『The T』는 ‘현장’과 ‘사용자’를 아우르고, ‘나의 발언’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폭넓은 담론의 장을 만들고자 한다. 『The T』는 이 담론의 장을 ‘한국 디자인의 생태계’라 부르기로 한다. 이 같은 시도로써, 한국 현대 디자인의 역사를 새롭게 구축하는 지점도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The T』 9~11호는 정병규 선생의 진두지휘 아래 편집 기획 및 디자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담론의 장’이 주된 콘셉트였던만큼 ‘한국 디자인의 생태계’에 대한 특집을 비롯하여 특별기고, 연재 등 매 호마다 20여 편 이상의 글이 게재되었다. 이후 『The T』 12호는 전가경, 13호는 문장현·이경수의 기획과 제너럴그래픽스 디자인으로 작업되어 ‘한국 디자인 생태계’에 관한 담론을 이어갔다.
되돌아보니, 『The T』 1호부터 13호까지 단 한 권도 쉽게 작업된 적이 없었다. 특히, 9호부터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하고, 상당한 양의 필자들 원고를 정리하고 다듬느라 편집을 담당했던 직원들이 “『The T』 한 권이 나올 때마다 장기가 하나씩 파손된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했던 『The T』 13호가 정말 어렵게 발행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The T』를 제작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미 나도 직원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The T』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익숙한 지금의 대다수 독자들과 『The T』가 같이 호흡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고, 윤디자인그룹의 홍보·마케팅이 미흡했던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비록 『The T』는 폐간되었지만, 지금도 활발히 운영하고 있는 『타이포그래피 서울』 등을 통해 앞으로도 윤디자인그룹은 다양한 한글 타이포그래피 미디어를 계속해서, 그리고 더 발전적으로 운영해나갈 것이다. 윤디자인그룹이 미디어를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The T』 6호 ‘발행인의 글’을 통해 솔직하게 전했던 글이 지금도 마음에 와 닿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윤디자인그룹이 왜 『The T』를 만드냐는 질문에 대해
『The T』를 제작하면서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윤디자인그룹에서 왜 『The T』를 제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윤디자인그룹이 진행하고 있는 『타이포그래피 서울』이나 단행본 『The Typography』 등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은, 수익보다 지출이 더 많은 일들을 왜 기업이 굳이 하느냐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답을 드리면, 디자인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를 가장 잘 해온 윤디자인그룹이기에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련의 출간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타이포그래피’이니까요.
이번 6호 기획 중 ‘타이포그래피 교육’ 코너에서는 디자인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들의 대다수가 타이포그래피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답했으며, 또 대다수가 국내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 과목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의 기본이며 기초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대학에서 혹은 현장에서 타이포그래피 관련,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찾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수많은 디자이너들과 동고동락해온 윤디자인그룹이 그들을 위해 혹은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 일은 바로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웹진이나 잡지, 단행본처럼 많은 분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기에 사명감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꾸준히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숙제들도 하나씩 풀어나가려 합니다.(후략)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