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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석훈의 한글 디자인 품과 격 #16 한글 디자인이 세상에 기여하는 법 ‘희망한글나무’ ①

    윤디자인그룹 편석훈 회장 저서 『한글 디자인 품과 격』 요약본 ― ‘희망한글나무’ 캠페인의 목적


    글. 편석훈

    발행일. 2021년 09월 17일

    편석훈의 한글 디자인 품과 격 #16 한글 디자인이 세상에 기여하는 법 ‘희망한글나무’ ①

    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희망한글나무는 윤디자인그룹이 매년 한글날을 즈음해 진행하는 기부 캠페인이다. 2009년 제1회를 시작으로 10년 넘게 이어왔다. 매 회마다 특정한 한글 폰트 1종을 ‘희망한글나무 서체’로 지정하고, 그것을 참여자들이 구입하면 모금액 전액을 소외계층 이웃과 복지단체 등으로 전달한다. 기업 차원의 사회공헌 활동, 이른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인 셈이다.

    대기업들이 시행하는 다양한 이웃 돕기, 일손 돕기 활동과 비교한다면 캠페인 규모 면에서나 모금액 액수 면에서나 사실 약소한 편에 속한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해 희망한글나무 한 그루씩을 심을 때 “올해도 잊지 않고 시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이번에는 지난해 기부 액수보다 몇 천 원이라도 더 보태서 기부하고 싶다” 같은 응원과 격려의 말을 들을 때면 좀 면구스러워지기도 한다. 보다 많은 모금액을 보다 많은 분들께 후원해드리고 싶은 마음 탓이다. 어쩌면 이러한 송구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어서 희망한글나무를 해마다 꾸준히 지속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제1회 희망한글나무 성금으로 제작된 점자책

    희망한글나무는 희망‘한글’나무다

    희망한글나무에서 강조 표시가 적용돼야 할 부분은 ‘한글’이다. 희망한글나무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대중에게 한글을 알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부터 기획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한글을 알리겠다니, 이것은 마치 중국인들에게 한자를 알리겠다는 말과 같지 않나?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해보자면, 한글 문자 자체가 아니라 ‘한글 문자의 조형미에 대한 알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한글 낱자는 ‘가’와 ‘나’처럼 초성과 중성이 서로 모여 있거나, ‘감’이나 ‘남’처럼 초성·중성·종성의 모임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모아쓰기 된 한글 낱자는 기하학적 구조 층위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서체(폰트) 한 벌을 디자인하는 과정은, 한글 문자의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글의 초성과 중성, 그리고 초성·중성·종성 모아쓰기로 나타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려 11,172자에 달한다. 즉, 한글로 표현 가능한 글자가 총 11,172자라는 뜻이다. 로마자로 표현할 수 있는 글자 수가 52자인 점을 생각한다면, 서체 디자이너들이 왜 이구동성 ‘알파벳보다 한글이 디자인하기 까다롭다’라고 말하는지 이해될 것이다.

    이렇듯 ‘디자인하기 까다로운’ 특유의 구조적 특성이야말로 한글 고유의 조형미 아닐까. 이 생각은 지금껏 윤디자인그룹의 일원으로서 수많은 한글 서체 디자인을 기획하고 총감독해본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완성도 높은 한글 서체는 한글 문자만의 조형적 고유성을 아름답게 유지한다. 아니, 거꾸로 말해야 더 정확해질 듯하다. 한글 문자만의 조형적 고유성을 아름답게 유지해야만 완성도 높은 한글 서체로 볼 수 있다고 말이다.

    한글(한글 서체)을 알리고 싶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 문자인 한글에 대한 대중의 심미안을 드높이고 싶다는 의미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당연히 좋은 한글 서체가 더 많은 대중의 눈에 띄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72년 미국 뉴욕의 지하철 사인(sign) 시스템 디자인으로도 유명한 거장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가 이런 말을 했다. “디자이너의 삶은 ‘추함과의 싸움(fight against the ugliness)’이다”라고. 실로 맞는 말이다.

    거장의 말을 빌리자면, 추한(?) 한글 디자인의 자리에 완성도 높은 한글 디자인을 새로 놓는 일. 그것이 아마도 한글 서체 디자이너들의 삶 아닐까 싶다. 그래야만 한글 디자인을 보는 대중의 안목도 높아질 테고, 그것이 자연스레 한글 디자인의 완성도를 상향 평준화시켜주리라 나는 믿고 있다.

    희망한글나무 1,2회 밝은체·법정체 이야기

    앞서 소개한 것처럼, 희망한글나무는 매회 한글 서체 1종을 선정한다. 해마다 각기 다른 캠페인 주제를 표방하기에, 선정 서체 또한 매번 해당 주제와 결을 맞추어 엄선된다. 이 같은 기획을 통해 의도한 바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글의 본새가 특정 주제(메시지)에 따라 얼마만큼 적확한 꾸밈새를 갖출 수 있는지, 그 조형적(디자인적) 가능성을 한글 서체로서 증명해 보이기. 둘째, 이러한 한글 디자인 작업이 시각적 성취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대중의 일상생활로 스며들어 사회 공헌의 매개체로 기능하도록 하기.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기획 의도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윤디자인연구소 신임 대표로 취임했던 2005년은 이미 국내 서체 시장의 하락세가 조용히 점쳐지던 때였다. 회사가 설립된 198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를 중흥기라 본다면(윤디자인연구소는 2001년 폰트 회사로는 최초로 코스닥 상장도 했었다), 그 이후의 시장 감퇴는 더욱 또렷이 대비되었다.

    시장 상황이 이러할진대, ‘현실 경영’이 아닌 ‘감성 경영’이 과연 통할 것인가 하는 자체 검열도 여러 번 했다. 당시 희망한글나무 기획에 참여했던 직원들도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희망한글나무의 첫 번째 ‘묘목’을 심어보기로 했다.

    2009년 563돌 한글날에 시작해 12월 9일 종료한 두 달간의 제1회 희망한글나무. 선정 서체는 ‘밝은체’였다. 밝은체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최 제1회 한글 글꼴디자인 공모전에서 ‘세종대왕상’을 수상한 명계수 교수(당시 건국대학교 디자인조형대학 학장)의 작품을 폰트로 만든 것이다. 서체명이 곧 제1회 희망한글나무의 주제이자 취지였다.

    제1회 희망한글나무 ‘밝은체’ 캠페인 사이트

    2,925명의 참여 시민들은 저마다 최저 1,000원 이상의 금액으로 밝은체를 내려받았고, 이렇게 모인 후원금은 총 328만 4,500원이었다. 여기에 윤디자인그룹도 100만 원을 더 보탰다. 윤디자인연구소 사이트와 삼성모바일닷컴을 통해 쌓인 첫 희망한글나무 모금액은 점자책 제작에 쓰였다. 아동 및 청소년을 비롯한 시각장애인들의 독서를 밝은체가 ‘밝혀드린’ 것이다. 밝은체 수익금으로 만들어진 312권은 서울, 광주,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의 맹학교로 배포되었다.

    이듬해 두 번째 희망한글나무의 주제는 ‘자연과 이웃’이었다. 이 주제는 그해 3월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오랜 화두이기도 했다. 그분의 유명한 수필 『무소유』를 몹시 아끼기도 한 터라, 나는 2010년 희망한글나무를 통해 법정 스님의 정신을 많은 이들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소유』에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우리말을 몹시도 사랑했던 종교 지도자, 그리고 그의 손글씨를 원도로 제작한 한글 서체. 제2회 희망한글나무 선정 서체인 ‘법정체’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제2회 희망한글나무 ‘법정체’ 광고

    서울 성북동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가꾼 도심 속 사찰이다. 경내에는 ‘침묵의 집’이라는 참선실이 있는데, 법정 스님이 직접 쓴 붓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법정체는 바로 이 ‘침묵의 집’ 원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서체다.

    법정체 제작과 관련해 지금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법정 스님과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자연 보호와 이웃 사랑을 위해 1994년 만든 시민단체 ‘(사)맑고향기롭게’에 대한 기억이다. 서체 작업에 필요한 법정 스님의 친필 서한 및 현판 같은 귀중한 자료들을 당시 맑고향기롭게 측에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제공해주었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 크다. 이렇게 법정체는 완성되었고, 서체 수익금은 공익포털사이트 ‘해피빈’으로 자동 기부되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였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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