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목용이든 본문용이든 서체는 일단 ‘잘 보이고 잘 읽혀야’ 한다. 이때 잘 보이고 잘 읽혀야 한다는 것은 디자인 완성도, 글자체 특유의 개성, 자모음의 시각 변별성, 문장 및 줄글 입력 시 가독성과 판독성 등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해 서체의 기본 속성은 기능성이다. 장식적 성격이 강한 제목용 서체라 해도, 그 장식성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기능적 속성이 기본 탑재돼 있어야 한다. 이렇다 보니 서체가 ‘서체 자체’로서 존재감을 빛낸 사례는 적어도 국내에선 찾아보기 드문 것 같다. 풀어 얘기하면, 서체의 존재 가치는 늘 기능성을 근거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기능성(사용성)은 기본으로 갖추되,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서체를 만들어보자’라는 기획이었다. 좀 과장하자면, 성경에 등장하는 몰약(沒藥, Myrrh) 같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고 할까. 몰약나무 진액을 응고시킨 몰약은 약재용으로서 존재 가치가 있다. 또한 몰약은 성경에도 등장한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바친 선물’로 말이다. 약재로서의 사용성을 차치하여도, 몰약은 그 존재 자체로 상징적(종교적)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념주화 같은 서체를 만들어보자
그렇다면 서체라는 대상에 어떤 가치를 배치/조합시킬 것이냐, 이것이 2013년 기획 초기 단계의 최대 고민이었다. 당시 나와 직원들은 ‘역사’에 꽂혀 있었다. 서체로 역사적 의의를 전파하고 싶은 내 평소 생각이 은연중 틈입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대한민국 독도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과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분들을 돕고자 진행한 ‘희망한글나무’ 캠페인처럼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역사’를 화두 삼아 계속 머릿속 아이디어들을 가르고 고르고 벼려 나갔다.
대한민국의 무구한 역사들 중 우리는 ‘광복’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2013년은 광복 68주년을 맞은 해였고, 이해로부터 7년째가 되는 2019년은 광복 74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나와 직원들은 2019년을 목표로 장장 7년간의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기에 이르는데, 이름하여 ‘대한민국만세’였다. 대한체, 민국체, 만세체라는 서체 3종을 순차적으로 개발·배포하자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국가 행사 때 으레 기념주화가 제작되듯, 윤디자인그룹도 대한민국의 특별한 100주년을 기리는 ‘기념서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일종의 애국적 포부였다. 게다가, 처음의 대한·민국·만세 3종은 서체 개발이 진행되는 와중에 대한·민국·독립·만세 4종으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어느 영화감독의 농담이 생각난다. 시나리오는 분명 독립영화였는데, 만들고 나니 블록버스터가 돼 있더라는···.
첫 서체 대한체가 ‘하이브리드 명조’인 이유
대한민국만세, 아니,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는 요컨대 ‘서체’라는 대상과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라는 가치를 배치/조합한 기획물이다. 일단 큰 범주의 개념이 이러하고, 여기에 속하는 하위 범주들(대한체·민국체·독립체·만세체) 또한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에 상응하는 서체 각각의 특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4종의 서체는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의 완전체로서 제 색깔을 낼 것이다.
서체 4종은 프로젝트명의 서체 이름순대로 차례차례 완성되었다. 맨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은 2014년 대한체다. 바탕체(명조체)를 기본 골격으로 한 본문용 서체다. 당시 대한체를 선보이며 표방했던 수식어가 ‘하이브리드 명조’였다. 굳이 ‘하이브리드’라는 영어 표기를 써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기는 하다.
변명을 하자면, 2013년과 대한체를 발표한 2014년 우리나라에서는 ‘하이브리드’라는 말이 이른바 트렌드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자동차 시장에서는 2013년부터 하이브리드 차량의 생산과 판매량이 늘어나 관련 산업이 융성하기도 했다. 하이브리드는 문화 콘텐츠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제목에 ‘융합’ 혹은 ‘융복합’이 들어가는 온오프라인 콘텐츠들이 꽤나 성황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여, 당시 시의성을 고려해 대한체의 홍보 문구로 ‘하이브리드 명조’를 고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이브리드인가. 앞서 소개한 것처럼 대한체는 본문용 바탕체다. 그런데 돋움체(고딕체)의 요소를 일부 품고 있다. 서체 기획 단계에서 의도된 디자인 콘셉트다.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 1호 서체의 메시지를 나와 직원들은 ‘화합’으로 정했다.
대한체·민국체·독립체·만세체 각각은 4종의 서로 다른 글자체이나, ‘대한민국독립만세’라는 큰 제목 하에 하나의 가족군으로 묶일 수 있다. 각기 다른 서체들이 하나 되듯, 우리나라의 개개인이 광복의 기쁨과 함께 한민족이자 한 민족으로 화합한 것처럼 말이다. 대한체를 화합의 서체로 앞세운 까닭이다.
서체의 의미가 이러할진대, 서체의 디자인 콘셉트가 화합의 정서를 따르지 않으면 서체 자체의 존재 가치도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기본 골격을 바탕체로 삼되, 돋움체의 시각 요소를 융합한 형태로 디자인 방향성을 잡은 것이다. 말 그대로 ‘하이브리드 명조’인 셈이다.
대한체의 이러한 디자인 콘셉트가 명징히 표현된 부분은 획이다. 세리프를 단 획들은 바탕체의 외형을 보여주는데, 획 맺음부는 돋움체처럼 직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세리프 또한 최대한 직선/직각 구조로 설계돼 획 맺음부의 돋움체적 특성과 조응을 이룬다. 이 같은 ‘바탕·돋움 하이브리드 획’들이 낱자를 이루고 문장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기존 바탕체와는 색다른 시각성이 형성된다.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의 첫 서체를 본문용 바탕체로 정한 데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한체·민국체·독립체·만세체 4종은 우리나라의 광복을 주제로 한 서체들이다. 기획 의도상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한 서체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 의도에 근거하여 4종 모두를 무료 배포했다.
디자이너가 아닌 이들이 제목용 서체를 그리 자주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쓰는 서체는 본문체다. 사무직 회사원들이라면 매일매일 마주하는 문서 작업 과정에서, 그리고 학생들이라면 각종 수업 과제 제출 시 본문체를 사용할 것이다. 또한, 본문용 서체로 좀더 널리 활용되는 쪽은 돋움 계열보다는 바탕 계열이다.
아직도 이런 분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왠지 있을 것 같기는 하다만), 고지식한 직장 상사라면 돋움체로 작성된 문서에 대해 ‘점잖지 못하다’라며 후임을 나무랄 수도 있다.(1990년대만 해도 이런 직장 상사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한마디로 본문용 바탕체는 ‘국민 서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독립만세의 선발 글자인 대한체는 ‘국민 서체’를 표방한 ‘하이브리드 명조’인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면, 대한체 기획 단계에서 이런 의견도 나왔었다. 대한민국의 전용서체로 대한체를 제안해보자는 것.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만약 그렇게 됐더라면 ‘국민 서체’, ‘국가대표 서체’로서 보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지녔을 듯하다. 경영인으로서 가정을 전제로 어떤 프로젝트를 회상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과 반성 역시 경영인의 덕목 아니려나.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