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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의 저작권 이야기 #2 왕들의 시대, 그리고 저작권법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 저작권법 ― 김기태 교수가 알려주는 미디어 저작권 상식


    글. 김기태

    발행일. 2020년 04월 17일

    김기태의 저작권 이야기 #2 왕들의 시대, 그리고 저작권법

    오늘날 정보의 상품화에 있어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저작권 개념은 사실상 자본주의 이념 생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동체 생활과 자급자족의 미덕이 사라진 경제적 무한경쟁 시대를 예고하며 탄생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대량복제 시대를 연 인쇄술 발명을 통한 아날로그 혁명이 자리잡고 있다. 저작권 개념은 중세 이후 인쇄술에 의한 복제물의 대량배포가 가능해지면서 생겨났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술 발명은 저작권 사상이 싹튼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저작권 법제화의 역사는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왕의 이름으로 제정된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

    문자와 기록 매체가 있었다고 해서 바로 저작권 의식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남의 저작물 베끼기를 비열한 행위로 여겼는데, 이는 저작물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라기보다 도덕적 차원의 인식이었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이용하는 것도 직접 혹은 사람을 사서 필사(筆寫)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저작물에 대한 어떤 금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식의 관심은 부족했다. 그런 까닭에 로마 시대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에서는 “타인의 종이, 양피(羊皮) 등에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경우에는 일체의 권리가 그 재료의 소유자에게 귀속된다”고 하여 저작물의 가치를 그 표현 물체의 가치에 귀속시켰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중세 수도사들의 ‘저작물 이용’ 범위란,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글을 손으로 필사하는 정도였다. 원문에 대한 소유권이 문제가 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저작권 개념은 없었다. 나아가 저작자의 권리는 특정 지위에 있는 후원자가 베푸는 경제적·사회적 보상으로 충족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15세기에 이르러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했다. 저작물의 대량 복제와 광범위한 유통이 가능해졌고, 이에 세속적인 통치자들과 성직자들이 그들의 권위에 반대하는 내용의 저작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내용을 검열하기 위한 방편으로 특정 출판 업자에게만 저작물을 출판하게 하는 출판특허제도(the system of printing privileges)를 두었다. 이로써 저작자들은 간접적이나마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저작권 개념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출판특허제도는 기본적으로 출판 업자의 특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으므로, 저작자들에게 의무적인 저작물 사용료가 지급되지는 않았다. 이후 자연주의적 계몽사상과 개인주의 사상의 보급으로 출판물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는데, 전제군주로서의 국왕의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국왕의 특허가 유명무실해졌다. 이로 인해 저작물 복제가 성행하게 되자 기존의 출판특허권자들은 자기들이 투자해서 출판한 책들에 대한 무단 복제의 규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제정된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이 바로 영국에서 1709년 공포된 ‘앤 여왕법(The Statute of Anne)’이었다. 비로소 저작자에게 복제권(複製權, copyright)이라는 권리가 주어졌고, 이 권리를 양도받아 발행한 출판 업자는 그 출판물에 대해 14년 동안 독점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 법은 문서 저작물에 국한된 것이었다.

    1735년에는 미술가들의 요청에 따라 ‘조각가법’이 영국에서 제정되었고, 프랑스에서는 1791년에 공연권을 부여하는 저작권령(Copyright Decree)이, 1793년에는 저작자에게 배타적 복제권을 부여하는 저작권령이 제정되었다. 뒤이어 미국에서도 1790년 연방저작권법이 제정되었으며, 독일에서는 1794년 프러시아 민법전에, 러시아에서는 1830년 민법전에 저작권 관련 규정을 포함시켰다.

    이처럼 처음부터 저작자의 개인적 권리인 저작권이 중시된 것은 아니었다. 필사본 시대에는 손이 많이 가는 필사 노동 자체가 원저작자의 정신적 창작에 대한 노고를 무시한 채 이루어졌으며, 그 필사의 대상이 된 것은 대부분 고전이나 성서였으므로 저작자의 권리 보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되었을 때에도 인쇄 대상은 고전이나 성서였다. 따라서 저작자의 정신적 활동에까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 시스템 확립은 수작업을 기계 작업으로 전환시키는 비약적 발전을 이룸으로써 대량 복제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세워져 있는 앤 여왕 입상
    출처: Wikipedia

    출판특허제도, 이렇게 탄생했다

    애초에 인쇄술의 발명은 르네상스의 개화기와 일치했다. 당시 높아진 고대에 대한 관심은 고전 출판을 촉진했는데, 이것이 유럽 전역에 퍼진 인쇄 기술과 결합하게 된다. 거기서 발생한 문제가 두 가지 있다. 출판물 판매량에 따른 인쇄출판업자의 위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 고전이 원본 발견 및 정리 등에 따르는 노력의 대가를 담보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인쇄출판업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왕이나 영주가 인쇄출판의 특권을 보장하는 출판특허제도가 생겨났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이는 인쇄출판업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국왕 또는 영주로 하여금 서적 등에 대한 검열 제도를 연계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출판특허와 검열의 연계는 유럽 각국에서 나타났는데, 프랑스에서는 검열 제도가 종교개혁 운동에 대비해 일찍 도입되었고, 종교전쟁 후 국왕의 특허를 얻은 조합원이 출판업에 종사하는 파리서적상회 조합에게 위탁되면서 조합에 의한 검열을 거친 출판허가와 출판특권은 밀접하게 연계되기 시작했다.

    이에 지방 인쇄출판업자들은 파리서적상회 조합이 가진 특권에 불만을 품었고, 다툼 끝에 파리서적상회 조합은 그들의 출판 독점은 왕이 부여하는 출판특권보다도 오히려 원래 저작자가 저작물에 대해 갖는 정신적 소유권의 양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는 곧 인쇄출판업자 스스로가 저작자의 저작물에 대한 원천적인 권리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1789년 프랑스 혁명에 의해 국왕의 권위가 사라진 후에는 저작자의 권리만 온전히 남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그 결과 서적상회 조합이 국회에 낸 청원을 계기로 앤여왕법이 1709년에 제정되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저작자의 권리에 담긴 성질을 둘러싸고 정신적 소유권설, 무체재산권설, 저작자 인격권설 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저작자 보호 단체를 이끈 대문호 빅토르 위고

    저작자의 권리 보호를 천명한 저작권법 제정이 유럽 전역에서 빠르게 확산한 것은 아니었다. 스위스는 1883년에야 비로소 문학적 또는 미술적 소유권에 관한 연방법을 만들었고, 헝가리 최초의 저작권법이 만들어진 것은 1884년의 일이었다. 또 터키에서는 1882년 당시 정부에서 부여하는 특권 제도가 남아 있기도 했다. 저작권법을 제정한 나라들도 그 내용은 각양각색이었는데, 이는 외국 저작자에 대한 보호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

    프랑스는 1852년 법률에서 외국인 저작자에게 프랑스 국외에서 발행한 저작물에 대해서도 자국 저작물과 동일한 보호를 받도록 했다. 이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스페인, 그리스, 노르웨이, 포르투갈은 원칙적으로 타 국적의 저작물은 자국 영토 안에서 발행하더라도 보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자기 나라 저작자가 외국에서 저작물을 발행했을 경우에 적용하는 법적 효력도 제멋대로였다. 독일과 스웨덴에서는 자국 저작자가 그 저작물을 외국에서 발행하더라도 법으로 보호한 반면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자국민이 다른 나라에서 저작물을 발행하면 내국민 보호를 해주지 않았다. 저작권 보호를 위한 절차의 경우에도 공식 등록부에 기재하거나 권한 있는 관청에 납본해야 하는 등 나라마다 제각각이었다.

    이처럼 저작권은 많은 나라에서 불안정한 보호를 받고 있었고, 규정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었으므로 일반적인 국제조약의 체결을 바라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특정 국가끼리 조약을 체결한 사례도 있었지만 그 효력이 당사국 사이에만 미쳤기 때문에 일반적 국제조약의 체결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1886년 그려진 풍자화 ‘해적 출판업자(The Pirate Publisher)’.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의 작가들이 한 남성을 손가락질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 같은 당대 문호들도 보인다.)
    작가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은 다름 아닌 출판업자인데 해적으로 묘사돼 있다.
    해외 저작자들의 저작물을 무단 도용하던 출판업자들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출처: Wikipedia

    일반적인 국제조약을 체결해서 저작자를 국제적·통일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최초로 활동을 벌인 단체는 당시 문호이자 정치가였던 빅토르 위고를 명예회장으로 삼아 1878년 만국박람회 중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국제문예협회’였다. 이 협회는 준비 작업을 거쳐 일반적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 장소로 스위스 베른을 지정하고 스위스 정부에 이를 통보하게 된다. 그 결과 스위스 정부는 1884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이 모이는 각국 외교회의를 소집했다.

    1885년 제2회 베른회의를 거쳐 1886년 베른협약(Berne Convention, 원래 명칭은 ‘문학적 및 예술적 저작물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이다)이 10개국이 모인 가운데 조인됨으로써 1887년 12월에 발효되었다. 이 베른협약은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개방되어 체결국 모든 국민에게 내국민 대우를 부여하며, 국제관계에서 항상 문제로 인식되었던 번역권은 저작권에 귀속됨을 명확하게 밝히는 등 매우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초창기 저작권 제도는 대량복제에 대응하기 위해 복제권(copyright) 차원에서 나라별 사정에 따라 법률이나 대통령령으로, 또는 저작물 분야별로 개별법령 형태로 제정하여 시행되었다. 그러다 20세기 초반에 와서 대체로 저작권법이라는 통합적 법률을 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copyright는 ‘복제권’이 아닌 ‘저작권’이라는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저작재산권 중 하나인 복제권은 이제 copyright가 아닌 reproduction right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한편, 베른협약 이후 1952년에는 유네스코 주도로 세계저작권협약(UCC, 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이 성립되어 이 두 협약은 오늘날 저작권의 국제적 보호를 위한 양대 산맥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저작권 연구자,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미디어와 저작권의 상관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판 편집자로 일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문헌번호운영위원장, 한국전자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저작권 및 연구 윤리에 관한 자문, 강의를 맡고 있다. 2018년 ‘생활 속의 표절과 저작권’이 K-MOOC 강좌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출판실무와 저작권』, 『김기태의 저작권 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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