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하니 방학 동안 조용했던 학교가 신입생들의 조잘거림으로 활기에 넘친다. 배우는 학생들도, 가르치는 교수도 새로운 다짐으로 학기를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 학생들에게는 비로소 첫 과제가 주어졌다. 과제를 받아든 학생들은 대부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선배들은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물어보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교수가 왜 그런 테마의 과제를 제시했는지, 또한 학생들은 그 과제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제시된 과제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만 하다가 지쳐버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우리가 잘 아는 ‘육하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기자가 신문 기사를 쓰거나, 형사가 범인 심문 조서를 꾸밀 때에도 이 원칙을 따른 것이 일반적이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5W1H’라고도 부른다. 신문 기사나 심문 조서만이 아니라, 수천 년 전에 생겨난 고대신화에서부터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하이퍼텍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는 이 원칙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는 극적인 표현을 위해 이 육하원칙의 순서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만약 이런 순서 바꾸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구분된 문학 장르나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미디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추리소설은 그 순서에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할 ‘누가(who)’를 끝까지 감춰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만약 추리소설이 ‘누가(who)’를 먼저 공개해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추리 소설이 아니다. 그리고 판타지 소설은 처음부터 ‘언제(when)’나 ‘어디서(where)’를 일부러 혼재시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컴퓨터 게임은 시간과 장소의 혼재를 적극 즐기고 있다. 그리고 ‘왜(Why)’는 마치 트럼프의 조커처럼 연극이나 뮤지컬, 코미디 등의 장르에 상관없이 이리저리 위치를 옮겨 다니면서 복선과 반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요즘 디자인이나 마케팅에도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바로 재미있는 스토리텔링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육하원칙의 순서 바꾸기 연습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그것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잘 이야기한다는 의미는 이해와 설득도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의미한다. 설득의 대상에 따라 이야기의 편집 방법 역시 달라져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이 장발장이라는 동화책에서 영화, 뮤지컬, 연극 등의 다양한 미디어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새롭게 편집되는 것은 그 소구 대상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디자인에서도 누구를 대상으로 편집되어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육하원칙 가운데 그 순서를 항상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what)’과 ‘어떻게(how)’이다. ‘무엇을(what)’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고, ‘어떻게(how)’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기 때문에 그 순서는 바뀔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을(what)’이 먼저 결정되어야만 ‘어떻게(how)’는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떻게(how)’가 앞서게 된다면 이야기는 비논리적으로 전개되어 객관적인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디자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이런 논리적인 설득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무엇을(what)’이 아니라 ‘어떻게(how)’를 먼저 고민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what)’형과 ‘어떻게(how)’형의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어떻게(how)’는 실행 방법이고, ‘무엇을(what)’은 그 본질이기 때문에 실행 방법이 본질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상식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 입시에서도 자신의 적성은 성적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뀌어 버리고 학교의 이름값에 의해 전공이 결정된다. 이렇게 결정된 전공은 대학에 들어와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의 실행 방법에 따해 쉽게 버려지고 고시원의 딱딱한 의자 위의 엉덩이 종기처럼 자라난다.
누군가가 고시의 특징을 3가지로 정의해 주었는데 그것은 1. 외국인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2. 합격만 되면 다시는 공부할 필요가 없고, 3. 합격과 더불어 주어지는 부상이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글로벌 시대, 이제는 평생 공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회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신의 직장에 선택받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앞에는 고시원으로 가득하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 법을 집행하고, 민원을 처리하고, 정치인이 된다. 실행 방법만이 인생의 목표였던 그들이었기에 처음부터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는 안중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 보잘것없는 디자이너들도 그들을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클라이언트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만 생각하는 기업시녀형 디자이너로 차고 넘친다.
TED를 설립한 리처드 솔 워먼은 이렇게 말했다. “디자인, 저널리즘,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학교는 ‘무엇을(what)’형의 인간을 키워내는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어떻게(how)’형의 인간을 길러 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만약 교육이 지적 영웅을 추구한다면 교육 현장은 영원한 지적 감옥이다.” 디자인을 성공하는 과정은 그 의미(what)와 해석(how)의 커뮤니케이션이고, 그 근본적인 해법은 바로 장르를 초월한 융합적인 사고에 있다. 따라서 학생들은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이 과제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기 바란다.
김경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다수의 심포지엄과 전시회 기획, 공공디자인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십인십색』, 『일본문화의 힘(공저)』 등이 있다.